139화
석주가 아진의 앞에 무릎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그러다 그냥 퍼질러 앉아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앞머리를 크게 쓸어 넘기며, 나직이 아진을 불렀다.
“아진아.”
“…….”
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석주가 자신의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진은 석주의 머리를 터트릴 듯 비장한 표정을 하더니, 끝내 그를 죽이지 못하고 애꿎은 천장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러더니 탕! 하고 울린 천둥 같은 굉음에 놀라 파드득 몸을 떨며 총을 떨어트렸다. 서 있는 게 힘든지 주르륵 주저앉기도 했다.
석주는 아진이 그럴 것을 진즉부터, 그러니까 그가 총을 쥐고 이 방문을 열었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저를 죽이라고 총을 주긴 했지만, 그가 죽여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눈을 감겠지만, 아진은 애당초 총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유약한 존재라기보다는 천성이 그런 것과 맞지 않았다. 물론 주걱이나 걸레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헤실헤실 웃으며 놀거나, 연필을 꼭 움켜쥐고 글을 끄적거리는 게 제일 잘 어울렸다. 귀하게 자란 양반집의 막내 도련님처럼 말이다.
“괜찮아?”
“…….”
아진은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석주가 떨어진 총을 주웠다. 아진의 마른 어깨가 움찔 떨렸다. 석주가 총으로 자신을 위협할 거라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석주는 그 총을 다시 아진의 손에 들려 주었다.
“무슨 일 있니?”
그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방금까지 자신을 죽이려 한 이에게 총을 쥐여 주면서 참으로 너그럽고, 지나치게 태평했다.
아진이 총 손잡이를 꾹 움켜쥐며 읊조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
이번엔 석주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제가 무슨 짓을 한 모양이다. 그것으로 아진이 화가 난 것 같았고. 근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아진에게 저지른 짓이 어디 한두 가지여야지.
그러나 되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제가 저지른 죄 중에 무엇 하나 중죄가 없으니, 무슨 이유로든 간에 그가 죽음을 선고한다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석주의 침묵에 아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금 중얼거렸다.
“어떻게…… 또…… 누나들을 부를 수 있어요.”
그 말에 석주의 입이 슬쩍 벌어졌다. 그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석주는 고민했다.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어떻게 해야 빨리 풀 수 있나.
아니, 제 주제에 오해를 풀고 말고 할 수가 있나. 아진이 생각하는 대로 두는 게 맞지 않나.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아진을 미워하고 괴롭혔던 것처럼. 그의 미움을 받아 내는 게 맞지 않나.
침묵이 늘어졌다. 그것에 답답함을 느낀 아진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며, 명진이 형님이 그 꼴을 당했는데, 겁도 없이…….”
아진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하등 상관없는 명진을 언급한 게 민망했다. 그게 아닌데.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닌데. 내가 화가 난 건, 당신이 내가 아닌 타인과 잠자리를 가지려 했기 때문인데. 날 두고 혼자 편히 자려 했기 때문인데. 그걸 차마 사실대로 토로할 수가 없었다.
제가 왜 이러고 있나. 뭘 바라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 아진이 참담하게 눈을 내리감는데. 석주가 한숨처럼 말했다.
“사내새끼들은 다 그래. 좆 달린 것들은 원래 다 그래. 떡 치고 싶어서 못 하는 짓이 없어.”
“…….”
“근데 아진아. 나도 그런 사내새끼가 맞는데. 그런데.”
“…….”
“오늘은 아니다.”
“…….”
“지금은 사내새끼 이전에 죄인이라서.”
아진이 눈꺼풀을 올렸다. 군청색 눈동자가 전구에 비춰 반질반질 참 예쁘게도 빛났다. 그 큼지막한 눈동자에 석주가 맺혀 있었다. 석주는 황홀한 기분으로 그 눈을 응시하며, 한 치의 거짓 없이 말했다.
“내 방에 들어왔던 이는 마담이고, 나는 그저 돈을 주었을 뿐이다. 오늘치 값을 치러 주었어.”
“…….”
“아무것도 안 했다.”
아진이 숨을 색색 가쁘게 몰아쉬었다. 새초롬히 파인 저고리 너머로 들썩이는 가슴팍이 보였다. 마른 쇄골이 도드라졌다가 연해지길 반복했다. 석주는 당장이라도 그곳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입술을 비비고 혀로 핥고 싶었다.
잠깐 시선이 팔린 석주가 다급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치미는 열기를 갈무리하며 말을 끝맺었다.
“나는, 너밖에 없어.”
“…….”
“널 만나고 다른 이를 품은 적도, 품고 싶다 생각한 적도 없어. 찰나도. 단 한 순간도.”
“…….”
“이제 네가 아닌 그 누구와도 밤을 보내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거야. 거짓말쟁이인 내 말에 무슨 신뢰가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약속하마.”
지극한 말에 아진은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래도 분노가 일렁이던 눈동자는 한결 평온해졌다. 불안하게 출렁이던 석주의 마음 역시 고요해졌다. 아진이 오해를 푼 것 같아서. 이렇게 쉽게 풀린 오해가 다행이면서도 아쉬웠다.
아진이 지금처럼 화가 나지 않는 이상, 그가 제 방에 올 일이 없으니까. 그냥 오해하게 둘 걸 그랬나. 매일 밤 찾아와서 총을 겨누거나, 뺨을 때리거나 해 주면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의 입맛을 다신 석주가 총을 쥔 아진의 손목을 살짝 쓰다듬었다. 놀란 아진이 총을 내려놓으려 했다. 그러자 석주가 그의 손과 총을 한 번에 감싸 쥐고, 조곤조곤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총을 쏠 땐. 가까이서 쏴.”
“…….”
“그래야 내가 맞아 줄 수 있으니까.”
아진이 멍하니 석주를 쳐다봤다. 그의 매혹적인 군청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른다 싶더니, 이내 말간 볼 위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석주가 그 눈물을 조심히 닦아 냈다. 그러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혹시 지붕을 무너트려서 죽이려 했던 거면 똑똑하네.”
아진이 그 웃음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총을 쥐고, 총을 쏘는 이 상황에 어떻게 웃을 수 있나. 자신의 죽음을 운운하며 어떻게 웃을 수 있냔 말이다.
온갖 꼴을 다 당한 저도 총에 맞아 죽는 건 무서운데. 석주는 왜 웃나. 지금 당장 제가 그의 머리에 총구멍을 내 버리면 어쩌려고. 죽는 그 순간에도 웃을 건가.
눈물을 투둑투둑 비처럼 떨구던 아진이 물었다.
“왜…… 웃어요.”
“네가 내 방에 온 게 좋아서.”
“……미친놈.”
“응. 좋아해, 아진아.”
“사장님은 미쳤어.”
“그래. 좋아해.”
도무지 이길 수 없는 말씨름에 아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눈물도 그쳤다. 석주가 턱 끝에 매달린 마지막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내며 속삭였다.
“좋아해…….”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아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눈물 젖은 아진의 뺨에 입맞춤을 받쳤다. 기교도, 불순한 의도도 없는 정직한 입맞춤이었다.
아진은 그런 석주를 밀어 내지 않았다.
* * *
“안 먹으련다.”
한쪽 무릎을 접어 올리고 앉아 있던 꽃님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앞에는 한 움큼의 약을 쥔 아진의 손바닥이 있었다. 그것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힘이 없으면서도 단호했다.
“…….”
아진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약을 든 손이 들썩였다. 잔말 말고 먹으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꽃님이 아이처럼 고개를 팩 돌렸다.
“안 먹고 싶어, 이제.”
요즘 꽃님은 투정이 늘었다. 밥도 안 먹는다, 생각 없다, 배가 안 고프다, 하더니 이제는 약까지 싫단다. 뭐 하나라도 제대로 먹으면 이렇게 답답하지 않을 텐데.
꽃님이 제대로 한 식사는 이틀 전, 석주가 사다 준 롤케이크가 다였다. 아진의 팔뚝만 한 그것을 혼자 반이나 먹더니, 그 이후론 뭘 주어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아진은 다시 권유하려다,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그래.”
그는 쓰레기통에다 알약을 우수수 쏟아부었다. 화가 났다고 시위하는 건 아니었다. 꽃님이 안 먹겠다는데 어쩌겠나. 버려야지. 그래도 약은 차고 넘치게 있었다. 책상 서랍을 아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꽃님이 약 먹다 뒤진다며 쯧쯧 혀를 찰 정도였다.
아진이 약 특유의 끈적하고 텁텁한 기운이 남은 손바닥을 바지춤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가벼워진 손바닥이 마음에 들었다. 꽃님이 약을 먹지 않았다는 것에 안달이 나지도 않았다.
아진은 그렇게 하나하나 놓아주고 있었다.
아진이 이런저런 뒷정리를 하는 동안 꽃님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스르륵 매가리 없이 누웠다. 베개 대신 손을 포개 베고, 이불 속으로는 발만 대충 넣어 두었다. 온화한 봄 날씨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었다.
“자련다. 책 읽어 주라, 아진아.”
“응. 뭐 읽을까?”
아진이 무릎걸음으로 책장을 향해 갔다. 책을 읽어 주는 것. 꽃님이 요즘 즐거워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책장에는 석주가 사다 놓은 책이 가득했는데, 아진이 그것을 자기 전에 하나씩 읽어 주곤 했다.
아진이 이야기꾼처럼 생동감 넘치게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글을 읽는 것에 서툴러 더듬더듬 읽는데. 하물며 아진의 수준에 맞춰 하나같이 쉬운 책들인데. 꽃님은 희한하게 그것을 좋아했다.
“아무거나.”
꽃님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아진은 뒷덜미를 긁으며 책을 골랐다. 어디서 주워들어 대강 아는 이야기도 있고, 생전 처음 보는 제목도 있었다. 고민하던 아진이 책 하나를 검지 끝으로 툭 건드렸다.
“음……. 심청전 읽을까?”
“그래.”
아진이 [심청전]을 뽑아 들었다. 흔한 이야기나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었다.
책을 든 아진이 꽃님의 침대 아래에 퍼질러 앉았다. 그리고 협탁 조명을 끌어와 책을 비추었다. 빼곡한 글자에 벌써부터 겁이 났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읽어 가기 시작했다.
“옛……날 옛쩍에, 황주 도화동에, 앞을 못 보는 심학, 구, 규가 살았다. 심학-규에게는 곽씨 부인이 있었다. 이 부부는 나이가 마흔이 차도록 자식이 없었다. 두 사람은 자식을 갖기 위해 온갇, 온갖 정성을 드을-여 기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곽씨 부인은 선녀가 자기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렇게 나은, 낳은 아이가 바로 청이. 심청이였다.”
심청전은 어렵지 않았으나 신비로웠고, 적당히 감동적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홀로 아버지를 돌보던 심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재물로 팔려 간다. 그렇게 인당수에 떨어졌는데, 놀랍게도 죽지 않고 용궁으로 간다. 그녀의 효성에 감격한 용왕이 극진히 대접해 주고, 그녀가 시집갈 나이가 되어 뭍으로 올려 준다. 그녀는 왕에게 시집을 가고, 나라는 태평성대를 맞이한다.
그러다 심청이가 심학규, 즉 심 봉사를 찾고, 심 봉사는 극적으로 만난 딸을 보려 안간힘을 쓰다 눈을 뜨게 되는 이야기였다.
아진은 즐겁게 글을 읽었다. 심청이가 팔려 갔다더라, 정도만 알고 있던 이야기였는데. 자세히 알아보니 훨씬 신비로웠다.
마지막 책장을 넘긴 그가 책을 탁 덮었다. 그리고 침대 위로 턱을 올리곤 꽃님을 바라봤다.
“아줌마. 진짜 바닷속에 용궁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