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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38화 (138/261)

138화

이불을 가슴까지 덮은 아진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잠이 오길 기다리는 보통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뺨은 파리했고, 얼이 빠진 듯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그렇게 있기를 한 시간. 아니 두 시간인가.

자정이 넘어가면서 시끄럽던 조직원들도 하나둘 자러 들어갔다. 노랫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밤벌레 소리만 어스름히 들려왔다.

깊은 밤. 묵직한 적막. 드문드문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 잠을 자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인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올 리 없었다.

석주가 자고 있을까 봐 겁이 나서. 다른 이와 나란히 누워 있을까 봐 신경이 곤두서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진이 대들보가 박힌 천장을 노려봤다.

잠 안 자도 된다고 했으면서. 제가 없어서 못 잔다고 했으면서.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해 놓고.

아진은 그날, 석주가 했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뭘 외우고 기억하는 데에 딱히 재능이 있진 않았는데. 석주와 관련된 건 이상하게도 또렷하고 선연했다.

‘잠?’

‘안 자. 일이 많아서.’

‘거짓말이야.’

‘못 자. 네가 없어서.’

분명 그렇게 말했잖아.

‘그래도 괜찮아. 자고자 하는 욕망을 버린 지 오래라. 이제 밤에 눈 뜨고 있는 게 익숙해.’

‘안 자는 게 좋은 점도 있어. 그 덕에 널 오래 생각할 수 있거든.’

나긋한 음성으로,

‘나는 낮에도 밤에도 너를 생각해, 아진아.’

‘염치도 없이 너를 그리워해.’

‘너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좋아.’

그렇게 말했잖아. 서글프게,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해 놓고.

거짓말이었던 거지. 거짓말한 거지.

감히. 감히 당신이. 감히 나한테.

아진이 이불을 걷어찼다.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원래 열에 궁색한 몸뚱이인데. 지금은 눈알까지 녹아내릴 듯 뜨끈뜨끈했다. 잇몸이 지끈거릴 정도로 이를 악물게 됐다. 관자놀이가 불룩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아진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몸을 비비 꼬며 치미는 분노를 삼키다 끝내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이불이 침대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그는 앞뒤 생각 않고 방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갔다. 그리고 석주의 방을 향해 가다, 복도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춘 후, 돌연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장 책상으로 향했다. 씨근덕거리는 숨을 내쉬며 책상 서랍에서 무언갈 꺼냈다. 묵직하고 두툼한 것이 나타났다. 그걸 움켜쥔 아진이 쿵쿵 뒤꿈치로 마루를 찍으며 다시 방을 나섰다.

석주의 방 앞에 도착한 아진은 방문도 두드리지 않고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무례한 행동이었다. 이 집에 있는 그 누구도 석주의 방문을 이리 함부로 열 순 없었다. 허나 아진은 그 ‘누구도’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시원하게 방문을 밀어젖힌 그가 짝이 맞지 않는 다리로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진은 긴 복도를 걸어 여기까지 오면서 어떠한 장면을 상상했다. 아니, 실은 예쁜 여성들이 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그 장면을 상상했다.

석주와 여자. 여자와 석주.

깨끗한 이불 위로 몸을 겹친 두 사람. 멋진 근육이 꿈틀거리는 나신과 보드랍고 풍만한 나신 같은 것을. 저에게 그랬듯 여자의 몸을 다정히 쓰다듬어 주고, 머리칼을 넘겨 주고, 품에 안고 재우는, 그러다 그녀와 함께 잠드는 석주의 모습 같은 것을 상상했다.

그런데.

“……아진이?”

그런데 방에는 석주 혼자 있었다. 온전히 혼자였다. 다른 누구는 없었다.

그는 서재 책상에 앉아 있었다. 상박은 두루마기도 없는 나신이었으며, 한 손에는 만년필을 들고 있었고 또 한 손은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경계하듯, 서랍에서 총을 꺼내고 있었다.

그러다 한 박자 늦게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하곤 긴장으로 수축했던 근육을 풀어 내렸다.

“아진이 네가 왜…….”

석주가 총을 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진은 대답 대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여자의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바닥에는 이불도 깔려 있지 않았다. 정사의 흔적이라고는 없었다. 뜨끈한 열기 대신 시원하게 열린 창호지 문을 통해 찬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고, 야릇한 신음 대신 석주가 만년필을 휘갈기던 소리의 잔상만이 남아 있었다. 정액 특유의 비릿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의 책상에 수북이 쌓인 종이 냄새와 담배 냄새만 어렴풋이 날 뿐이었다.

아진은 도박장 겸 풍속점에서 일하던 이고, 남녀가 떡을 친 후의 방을 수도 없이 치워 왔다. 그 경험을 말미암아 이 방을 평가하자면. 이 방에선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석주의 방이었다.

아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여자랑 못 잤구나. 못 자겠는 거지. 저 때문이든, 본인의 죄의식 때문이든, 아랫도리에 문제가 생겼든, 어쨌거나 쌤통이었다.

그러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것을 시도했다는 것부터가 배신이었다. 그의 죄를, 나의 눈물을 배신한 것이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분노가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아진이 들고 온 것을 석주를 향해 겨누었다.

아진이 가지고 온 것은 총이었다. 병원에서 석주가 그에게 주었던 그 총.

“…….”

석주의 입매가 단단히 굳었다. 눈썹은 살짝 일그러지고, 아진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매우 검고 또렷해졌다.

아진은 그 표정에서 더 큰 노여움을 느꼈다. 그의 총구가 부들부들 경련했다.

왜 그런 얼굴이야. 왜. 설마 또 거짓말을 한 건가. 언제든 죽이라고 해 놓고. 제 손에 죽겠다고 해 놓고. 이제 와 죽기 싫은 걸까. 제 손에 죽고 싶지 않은 걸까. 갑자기 살고 싶어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본인이 제게 저지른 그 모든 행위가 죽을 만큼의 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또 제 머리채를 움켜쥐려나. 감히 누구에게 총을 겨누는 거냐고 두들겨 패기라도 할까. 이 방에 다시 절 가두고, 주제도 모르고 그를 해하려 한 벌을 주려나.

그리 생각하니 이 방에서 있었던 일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제가 얼마나 아파했고, 얼마나 억울해했고, 얼마나 무서워했고, 얼마나 슬퍼했는지. 언제쯤 석주가 다정해질까, 언제쯤 오해를 풀어 줄까, 언제쯤 저를 다정하게 안아 줄까, 기대하며 버텼는지. 모두 떠올랐다.

개새끼. 씨발 새끼…….

아진은 뺨이 경련할 정도로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쉽게 방아쇠를 당기진 못했다. 그러다 문득, 석주가 총을 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장님이 미쳤나, 생각하고 있지?’

‘그래. 미쳤다. 단단히 미쳤어.’

‘그러니 미친놈이 개짓거리를 하는구나, 생각해. 이 미친 새끼가 또 때리면 쏴 버려야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겨야지, 머리를 터트려 버려야지, 어차피 미친놈이니까 그렇게 뒤져도 상관없지. 그리 생각해.’

그래. 어차피 미친놈이니까. 죽어도 싸니까. 제가 죽인다면 얼마든지 죽어 주겠다고 한 놈이니까. 그게 거짓이었든 아니든, 저는 그 약속을 받았으니까.

분노의 파도에 휩쓸린 아진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석주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총구가 머리와 명치를 휘적거리며 겨누는데도 겁을 먹지 않았다. 아진이 들이닥쳤을 때만 해도 놀란 기색이더니. 오히려 지금은 차분했다.

그 꼴이 더 짜증이 났다. 얄미웠다. 저 잘생긴 얼굴을 아주 죽사발을 내 주고 싶었다.

“이익…….”

이를 아득 문 아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쩌렁쩌렁한 총소리가 세상을 온통 뒤흔들었다.

잠을 자던 명진은 총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그는 이게 무슨, 누가, 어떻게, 왜,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튕기듯 일어났다. 그리고 당연하게 석주의 방으로 달려갔다. 잠결에 총소리가 어디서 울렸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냅다 석주에게로 갔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다른 조직원들도 이쪽으로 우다다 달려오는 게 보였다. 명진은 전신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총소리가 석주의 방에서 난 게 맞는 모양이었다.

“형님!”

“석주 형님!”

“언 씨발 새끼야? 언 놈이 우리 형님한테!”

명진을 비롯한 조직원들이 석주의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리고 우뚝, 멈춰 섰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영 기이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아진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있었고, 석주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총소리의 시발지로 추정되는 권총도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 피는 보이지 않았다. 석주도 멀쩡히 서 있었다.

그러나 석주는 원래 총을 맞든 칼을 맞든 곧은 자세로 서 있는 사람이었다. 명진이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며 그의 몸을 살폈다. 근육이 잘 짜인 상체에는 흉터만 가득할 뿐 새로운 상처는 없는 듯했다.

“……형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명진이 물었다. 그에 석주가 아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무 일도 없어. 괜찮으니 나가.”

“…….”

“괜찮다니까. 나가, 얼른.”

석주의 말에도 명진과 조직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가 깨지는 소리만 났어도 심장이 철렁했을 텐데. 다름 아닌 총소리가 울렸으니 예민한 게 당연했다.

“…….”

석주가 조직원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이 서늘했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하나하나 잡아다 목이라도 꺾을 기세였다.

명진이 눈치껏 조직원들에게 돌아가라 손짓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꾸벅 허리를 숙이며 방을 나섰다. 훤히 열려 있던 방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총소리에 뛰어왔다가, 상황도 모르고 쫓겨난 조직원들이 잠과 술기운이 뒤섞인 눈동자로 명진을 끔뻑끔뻑 쳐다봤다. 명진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다, 마. 형님 멀쩡한 것 같으니까 가서 자던 거 마저 자라.”

“그래도 형님…….”

“어여, 어여. 해산, 해산.”

명진이 짝짝 손뼉을 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덩치 좋은 사내들이 하나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명진이 석주의 방문을 쳐다봤다. 푸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쉰 그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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