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그 반응에 민망해진 아진이 어깨로 자신의 귓불을 긁으며 주절주절 변명했다.
“롤……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제, 제가 아니라 아줌마가 먹고 싶은 건데, 아니, 어, 저도…… 저도 먹고 싶기도 하고…….”
“내가 지금 가서 사 오마.”
석주가 곧장 발을 뗐다. 아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만류했다.
“아뇨, 아뇨. 내일 퇴근하실 때 사다 주셔도 괜찮아요.”
“아니야. 금방 다녀올게.”
“진짜 괜찮아요. 어차피 아줌마 지금 자요.”
아진이 석주의 손을 두 손으로 쥐고 당겼다. 석주가 마지못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그럼……. 내일 사 올게.”
그러면서 은근히 아진의 손을 감쌌다. 말랐으나 여전히 작고 보드라운 손이 참 좋았다. 아진 특유의 시원한 체온에 명치에 엉켜 있던 열기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간질간질한 설렘에 석주가 남몰래 입꼬리를 올리는데.
“감사합니다.”
아진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의 검은 머리칼이 석주의 셔츠를 사각거리며 스쳤다가 멀어졌다. 아진은 그대로 뒤를 돌려 했다. 허나 석주가 손을 놓아주지 않아 팔이 길게 늘어났다.
아진이 당황 어린 표정을 지었다.
“손…….”
“아, 미안.”
석주가 얼른 사과했다. 그래 놓고 손을 놓는 건 몹시 느렸다. 손바닥이 멀어지고, 손가락이 스치고, 마침내 두 사람의 손이 완전히 떨어졌다.
재차 꾸벅 인사한 아진이 뒤를 돌았다. 그리고 삐뚜름한 다리를 추스르며 절뚝절뚝 걸어가는데. 석주가 큰 보폭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아진이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올려다봤다. 석주의 눈동자가 좌우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뭐든 아진을 조금 더 잡아 둘, 조금 더 그와 함께할 거리를 찾는 거였다. 그러다 급한 마음에 영 창의적이지 못한 말을 내놓았다.
“밥 아직 안 먹었지?”
“네. 꽃님이 아줌마가 자서…….”
“같이…… 먹을래?”
“…….”
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가 고개만 돌려 다실 쪽을 바라봤다. 일자로 쭉 이어진 복도 끝에서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고, 떠들고, 잔을 부딪치고.
제가 저 사이에 앉으면 어떤 모습일까. 보나 마나 불청객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겠지. 어쩔 줄 모르고 밥그릇만 빤히 보고 있을 게 뻔했다. 저도 불편하겠지만 다른 이들도 불편할 터였다.
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이따 아줌마랑 먹을래요.”
“……그래.”
기대로 솟았던 석주의 어깨가 아래로 떨어졌다. 아진은 세 번째 인사를 또 꾸벅하고는 방으로 향했다. 절뚝이는 걸음걸이로 대청마루를 가로질러 복도 모퉁이를 돌다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근데 석주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우직이 서서 제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제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움직일 생각일랑 없는 듯했다.
그 모습에 희한하게도, 들썩거리던 심술이 잠잠해졌다.
* * *
세수를 마친 아진이 거울을 쳐다봤다. 자신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다 손으로 앞머리를 죽죽 잡아당겼다.
“앞머리가 잘 안 기네…….”
먼 옛날. 진걸이 칼로 댕강 자른 앞머리는 조금 더 자랐을 뿐. 도통 눈썹을 넘어설 줄을 몰랐다. 뒷머리는 덥수룩하게 자라서 병원에 있을 때 꽃님이 다듬어 주었는데, 불쾌하게도 앞머리만 잘 안 자랐다.
“이상해…….”
아진이 앞머리를 더 세게 잡아당겼다. 평생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살다가 훤히 드러내 놓으니 적응이 안 됐다. 시야가 밝아진 건 좋은데, 기분이 영 께름칙했다.
꽃님에게 주야장천 들어 온 말이 목에 걸린 가시 같았기 때문이다.
‘얼굴 좀 가려.’
‘고개 들고 다니지 마.’
‘앞머리가 그게 뭐냐. 눈 다 보이잖냐. 앞으로 몰아라.’
‘내가 그랬지. 넌 얼굴 드러내 놓고 다니면 단명할 팔자라고.’
얼마 전까지 죽고 싶다고 주절주절 말하고 다니던 주제에 이제 와 그걸 걱정하는 거냐고 비웃는다면 할 말이 없다만. 아무리 그래도 제가 죽을 날을 골라 제 손으로 죽는 것과 이유도 모르고 갑자기 단명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니, 근데 제가 단명할 일이 없는데. 혹시 제 앞머리를 잘랐던 진걸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 시퍼런 칼을 들고 제 앞머리만 잘랐지 않나. 사실 그때 그가 제 목을 그었어야 하는 운명인데, 그가 그걸 못 해서 죽어 버린 게 아닐까.
병원에 있을 때 들었다. 진걸이 뒤 구린 짓을 하다가 석주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혹 그의 죽음으로 제 단명할 팔자도 뒤집힌 게 아닐까.
“모르겠다…….”
아진이 코로 훅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수건을 든 그가 절뚝절뚝 방으로 돌아가는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말이 노래지, 고성방가에 가까웠다.
늦은 밤. 다실에서 술을 먹던 조직원들은 다들 얼큰히 취해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마당에서 공을 차는 이들도 있었고, 마루에 늘어져 담배를 태우는 이들도, 저들끼리 모여 부족한 술을 더 채우는 이들도 있었다.
아진은 방에서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못해 씻으러 나온 거였다.
그는 얼른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꽃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잠든 상태라 딱히 기다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혼자 두기가 뭣했다. 그녀는 밤에 잠이 안 오면 어쩌냐 걱정하더니, 저녁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요즘 너무 많이 자는데…….”
아진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잠자는 게 무슨 병이냐마는. 꽃님의 모든 행동이 걱정스러운 지금이라 별것이 다 거슬렸다. 그가 연거푸 한숨을 내쉴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아진이 지내는 방은 집 오른쪽의 가장 첫 번째 방이었다. 그래서 차가 오가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근데 이 시간에 차 소리가 들리는 건 드문 일인데. 이 밤에 누가. 설마 석주가 진짜 롤케이크라도 사러 갔다 온 걸까, 하는 그런 주책맞은 기대도 해 봤다.
“…….”
아진이 무언가에 홀린 듯 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빼꼼 열린 창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자동차의 쨍한 헤드라이트가 눈을 아프게 찔렀다. 아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시야를 헤치는데. 차 문이 열렸다. 두툼하고 커다란 문 아래로 발 하나가 나타났다.
뾰족한 힐을 신은 여자의 하얀 발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비슷한 생김새의 발이 우르르 내렸다. 곧 문이 닫히고, 그들의 모습이 오롯이 드러났다.
예쁘게 발린 립스틱. 짧은 치마.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머리칼. 높은 음성의 웃음소리.
“…….”
아진이 얼른 창문 아래로 몸을 숨겼다.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마주치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아는 얼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절로 몸이 움직였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두툼해질 만큼 마시고 또 마셨다. 도은이 떠올랐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는데, 그땐 저도 정신이 없을 때라 애도고 뭐고 하지도 못했다.
근데 이렇게 떠오를 줄이야.
아니, 이 집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녀를, 그녀가 저지른 일을, 명진을, 바닥을 적시던 명진의 피와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그의 손가락을 기억하고 있을 텐데. 또 창녀를 부르다니.
다들 미친 건가.
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난 아진이 다급하게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근데 몇 걸음 가지 않아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대청마루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 석주의 방이 보였다.
“…….”
아진은 떫은 것을 먹은 듯 입천장이 당기는 걸 느꼈다. 방으로 가야 하는데. 꽃님을 돌봐야 하는데. 이상하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여자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집으로 들어왔다. 조직원 두엇이 신사처럼 웃으며 그녀들을 맞이했다. 우르르 들어온 여자들은 복도를 돌아 제각각 찢어졌다. 몇몇은 아진의 옆을 스쳐 가기도 했다. 그러나 찰나의 시선도 받지 못했다. 아진은 더할 나위 없이 이 집에서 일하는 종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라.
진한 분 냄새와 향수 냄새가 허공 여기저기에 남았다. 창녀들 사이에서 살던 아진에겐 익숙한 냄새였다.
아진은 여자들이 각기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내내 멀뚱히 서 있었다. 비스듬히 선 무릎이 지끈거렸는데 움직일 줄 몰랐다.
그쯤, 차에서 가장 처음 내린 여자가 현관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여자들이 다 들어가는 동안 바깥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핸드백을 옆구리에 낀 그녀가 힐을 벗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대청마루 쪽으로 향했다.
여자의 긴 머리칼이 살랑살랑 참 예쁘게도 흔들렸다. 걸음걸이는 올발랐고, 어렴풋이 보기에도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
아진이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끈질기게 좇았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는 걸까. 어느 방문 앞에 멈춰 설까. 그 방 안에 누가 있을까.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수건을 움켜쥔 손이 축축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발이 멈추었다.
아진의 심장도 덩달아 멈추었다.
그녀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 소리는 매우 멀었는데, 아진은 누군가가 자신의 귓구멍에 못을 박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복도가 아득하게 멀어진다 싶더니,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이제 아진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영원 같은 몇 초가 흘렀다. 세상 소리가 다 사라진 것처럼 복도가 적막했다.
이내,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석주가 나타났다. 그는 맨몸에 두루마기만 걸친 채 담배를 물고 있었다.
꾹 다물려 있던 아진의 입술이 뻐끔 벌어졌다. 뭐에 얻어맞은 것처럼 몸이 휘청거려서 기둥을 짚고 섰다. 틀어막힌 숨을 끅끅거리며 뒤틀던 그가 복도 너머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여자의 존재를 확인한 석주가 문 옆으로 비켜서고 있었다.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여자는 별다른 말 없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두 사람이 사라진 그 방 안으로, 아진은 들어가지 못했다. 들어갈 수 없었다. 굳게 닫힌 문이 아진에게 호통을 치는 것 같았다. 감히 뭘 훔쳐보는 거냐, 어딜 들어오려 하는 거냐, 절름발이 사내종 주제에 무엇을 넘보는 거냐, 신랄하게 비꼬았다.
“…….”
아진이 초점이 어긋난 눈동자로 닫힌 문을 쳐다봤다. 문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쪼그라들었다. 사방의 벽이 성큼성큼 가까워진다 싶더니 정수리를 누르고, 어깨를 칠 만큼 가까워졌다.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숨에 가슴도 답답해졌다.
꼭 관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산 채로 관 안에 들어가 매장당한 기분이었다.
그만큼 비참했고, 두려웠고, 서글펐으며…… 화가 났다.
아진은 하릴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나약한 무릎이 앞으로 훅 꺾이려 할 때쯤에야 뒤를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