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잠?”
석주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구쳤다. 잠이라. 오랜만에 입에 올리는 단어가 어색했다. 그도 그럴 게, 꽃님에게 찔린 옆구리가 덧나 사경을 헤매던 그날 이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사실 사경을 헤매던 때도 잔 건 아니었다. 기절한 상태였지.
이후, 아진의 병실 앞을 지키고, 그가 퇴원하고, 제집에 와서, 대화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까지. 석주는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잤다는 것도 드문드문 눈을 감고 있던 하루의 모든 순간을 모아 두 시간인 거지. 자겠다고 이불을 깔고 누운 적이 없었다.
누워 봐야 잘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걸 상기했더니 눈알이 뻑뻑한 게 선연히 느껴졌다. 석주가 마른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놓으며 두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안 자. 일이 많아서.”
“…….”
“거짓말이야.”
“…….”
“못 자. 네가 없어서.”
적나라한 고백에 아진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던 담배 연기가 흐려졌다. 그걸 놓칠 리 없는 석주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엔 더워서 못 잤거든? 속에서 자꾸 열이 치밀어서 말이야.”
“…….”
“널 만나고 괜찮아졌었는데. 이제는 더운 것보다는 네가 없어서 못 자. 덥지 않아도 못 잘 것 같아. 네가 없으면.”
“…….”
“밤이 길어. 외롭고. 때때로 무섭기도 해.”
석주가 자욱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담배는 아진이 피우고 있는데, 꼭 그가 연기를 뿜는 것 같았다.
씁쓸한 표정을 짓던 석주가 돌연 빙긋 웃었다. 멋진 미소가 나타났다.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아진을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자고자 하는 욕망을 버린 지 오래라. 이제 밤에 눈 뜨고 있는 게 익숙해.”
“…….”
“안 자는 게 좋은 점도 있어. 그 덕에 널 오래 생각할 수 있거든.”
석주가 슬쩍 아진의 옆에 붙어 앉았다. 마루에 박힌 기둥의 끝과 끝에 있던 두 사람은 이제 딱 한 뼘의 거리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리가 더 좁혀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석주가 등 뒤로 손을 짚고 상체를 느슨히 넘겼다. 그리고 아진의 옆얼굴을 보며 독백을 마무리했다.
“나는 낮에도 밤에도 너를 생각해, 아진아.”
“…….”
“염치도 없이 너를 그리워해.”
“…….”
“너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좋아.”
석주의 마지막 문장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 아진이 입에서 담배를 빼냈다. 하얀 연기가 밤공기 사이로 스멀스멀 흩어졌다. 청색 눈동자가 그 연기의 행방을 느릿하게 좇았다.
석주의 구구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듣는 게 나쁘지 않았다. 그가 저를 그리워하며 적당히 불행하고, 적당히 괴로워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제가 멍하니 있는 순간에도, 꽃님과 대화하고, 밥을 먹고, 씻고, 그렇게 일상을 보내는 순간에도 석주는 저를 생각하겠구나, 싶었다.
저는 손목에 흉터가 남았지만, 석주는 마음에 흉터가 남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저는 손목의 흉터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석주는 잊지 못하겠지. 마음에 남았으니까.
이건 아진의 독보적인 승리였다. 아진은 깨지고 부서졌으나 결론적으로는 승리했다. 이 승패는 다시는 뒤바뀌지 않을 것이다.
아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쩐지. 지금 누우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댓돌에 짧아진 담배를 문질러 껐다. 그 후 어깨에 걸치고 있던 석주의 두루마기를 반으로 접어 석주에게 내밀었다.
“잘래요.”
“……그래.”
석주가 두루마기를 받아 쥐었다. 아진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호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다,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사장님도 자요.”
“……노력할게.”
적선하듯 던진 말에 석주가 흐리게 웃었다. 아진은 더 말을 건네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꽃님의 상태를 가볍게 확인한 그가 침대에 누웠다. 푹신한 베개에 뺨을 묻고, 이불을 어깨까지 당기고, 눈을 감았다.
마침내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아진이 잠들 때까지, 아진이 잠든 후에도. 석주가 돌아가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흩날리는 꽃잎이
꽃님이 대낮부터 이상한 소리를 했다.
“강 사장한테 방 하나 내 달라고 해야겠다.”
꽃님의 약은 명진이 때마다 타 온다. 근데 먹어도 먹어도 도무지 줄지를 않았다. 수북이 쌓인 약 봉투를 정리하던 아진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왜?”
“너랑 따로 자게.”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나 코 골아?”
아진이 손등으로 자신의 코를 가렸다. 온갖 사람들이랑 모여 잘 때도 잠자리가 사납다는 말을 못 들어 봤는데. 요즘 게으르게 사는 데다가 선잠을 자니 많이 뒤척이나, 싶었다. 근데 꽃님이 상상치도 못한 말을 해 왔다.
“내 몸에 네 혼이 묻어난다.”
“……뭐?”
아진이 바보 같은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며칠 새 또 마른 꽃님이 침대에 구부정하게 앉아 주절주절 알아듣지 못할 말을 쏟아 냈다.
“예전에는 강 사장 몸에 네 혼이 묻어 있었는데. 지금은 내 몸에 네 혼이 묻어나.”
볕에 나가지도 않는데 까무잡잡하게 탄 얼굴로 혼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꽃님이 꼭 귀신 같았다. 아진이 무릎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른 손을 꾹 쥐었다. 그런 아진의 손목에 감긴 붕대가 새하얬다. 일전에 석주가 갈아 주고, 어제 새로 갈았기 때문이다.
“괜찮아. 나 이제 안 죽고 싶어, 아줌마. 안 죽을 거야.”
“네 혼이 묻는다니까!”
꽃님이 잡힌 손을 빼내며 빽 소리를 질렀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진 그녀의 눈가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에 아진이 지지 않고 덩달아 고함쳤다.
“아씨, 내 혼이 민들레 씨 같나 보지. 그래서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 하나 보지!”
“아진!”
“나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 쌩쌩해! 발은 다 나았고, 손목도 다 나아 가.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약이나 마저 먹어.”
아진이 협탁에 올려 둔 물잔을 내밀었다. 도통 말귀를 못 알아먹는 그에 꽃님이 씨근덕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가슴을 움켜쥐고 신음했다. 미간에 진 주름이 더욱 깊어지고, 누렇게 변색된 손톱이 갈퀴처럼 구부러졌다.
다급하게 일어난 아진이 꽃님의 등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과 속상함에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화 좀 내지 마, 화 좀. 어?”
“나가. 나가라, 아진아…….”
“누워. 일단 누워.”
물잔을 내려놓은 아진이 그녀를 부축해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당겨 덮어 주었다. 흐트러진 꽃님의 머리칼을 쓸어 주고, 서늘하게 식은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기도 했다.
“아줌마한테 내 혼이 묻을 일이 뭐 있어. 아줌마가 나한테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내 몸에 아줌마 혼이 묻었으면 묻었지.”
“아진아…….”
“내가 아줌마 되게 귀찮게 했잖아. 맨날 밥 달라고 쫓아다니고. 하루건너 하루 아파서 아줌마가 간호해 주고. 아저씨나 형들이 괴롭히면 와서 혼내 주고.”
꽃님이 그만하라는 듯 겨울철의 나뭇가지처럼 비쩍 마른 손을 휘저었다. 아진이 그 손을 잡아 이불 속으로 넣어 주었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줌마는 내 친구였고, 내 가족이었어.”
“…….”
“지금도 그래.”
“…….”
“설사 아줌마한테 내 혼이 묻어난대도 괜찮아. 가져가. 가져가서 흥청망청 써 버려. 아줌마는 그래도 돼.”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아진의 말에 꽃님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썩 꺼지라는 소리 대신 침묵을 택했다. 아진이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리고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저녁 되-게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아침에 마루 닦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엄청 바쁘게 움직이더라. 오늘 조직원 누구 생일이래. 그래서 고기 먹는다나 봐. 우리도 주겠지? 음, 안 주진 않을 거야.”
“…….”
“뭐, 매번 반찬에 고기가 있긴 한데 그래도. 어쩜 고기는 질리질 않아. 아, 전도 먹고 싶은데. 아줌마가 붙여 주는 김치전 먹고 싶다. 내일 점심때 둘이서 전 구워 먹을까? 솥뚜껑에다가?”
“…….”
“그리고 커피 타서 꽃 구경 가자. 개나리도 보고, 달래도 보자. 운 좋으면 그때 봤던 강아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때 되게 작았는데. 한 달쯤 지났으니까 그새 또 컸겠다. 새끼 강아지는 엄청 빨리 자라잖아. 우리 못 알아보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고기 뼈 같은 거 조금 챙겨서 가자. 못 만나면 말고…….”
주절주절 말을 잇고 또 잇던 아진이 흘끔 꽃님을 바라봤다. 꽃님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른 입술로 중얼거렸다.
“졸린다, 아진아.”
“……자.”
“지금 자면 밤에 못 잔다.”
“밤에는 나랑 놀면 되지. 화투를 치든, 술을 마시든, 할 건 많아.”
발랄한 아진의 음성에 꽃님이 소리 없이 웃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이내 눈을 감았다.
“그래, 그럼. 조금 자야겠다.”
“응. 계속…… 옆에 있을게.”
아진이 이불 위로 꽃님의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꽃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꽃님은 금세 잠이 들었다. 그녀가 가슴을 들썩일 때마다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호흡이 어찌나 짧은지, 잠을 자는 것뿐인데 고문이라도 받는 것 같았다.
“…….”
그걸 보고 있던 아진의 낯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우울했다.
손목을 그었을 때와 같은, 붕대를 갈지 않을 때와 같은 그런 무기력하고 죽고 싶은 우울함이 아니라, 슬퍼서 우울했다. 꽃님이 곧 제 곁을 떠날 것 같아서. 더는 그녀를 잡을 방법이 없어서.
아진이 꽃님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꽃님은 매일 달라진다. 어제에서 오늘.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 그새 또 말랐고, 생기가 사라졌다. 그게 너무 선연히 느껴졌다.
죽지 마.
나 두고 가지 마.
날 혼자 두지 마.
그리 말하고 싶은데. 그것마저도 꽃님에게 짐이 될 것 같아서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진은 한참 동안 꽃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주책맞게 눈물이 차올라서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방에 자꾸 죽음이 차오른다.
혼이 묻어난다는 꽃님의 말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