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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34화 (134/261)
  • 134화

    “…….”

    잠깐 아진의 눈치를 보던 석주가 아진의 발등을 살폈다. 족쇄 때문에 다쳤던 발목은 많이 아물었다. 붕대를 할 필요도 없었다. 옅은 멍만 남아 있었는데, 석주의 미간은 심각한 상흔이라도 본 듯 한껏 구겨졌다.

    석주는 발등에도 연고를 아낌없이 발랐다. 그러면서 차가운 발을 조물조물 매만졌다. 커다란 손으로 발가락을 한 번에 모아 쥐기도 하고, 뒤꿈치를 손바닥으로 슥슥 문대기도 했다. 아진은 그 손길이 치료와 하등 상관없음을 알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절대 말이 적은 편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침묵이 편했다. 석주가 제 눈치를 보며, 제 침묵에 담긴 뜻을 가늠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걸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석주는 손목과 발목에 이어 아진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제가 저질러 놓은 사고들을 수습하려는 모양새였다. 아진은 그저 멍하니 몸을 내주고 있었다.

    그러다 콜라병이 텅 비었을 때쯤. 붕대가 감긴 아진의 손목을 매만지던 석주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네가 왜 아파야 하니. 아프려면 내가 아파야지.”

    “…….”

    “괴로운 것도, 불행한 것도, 슬픈 것도 다 내가 할게, 아진아.”

    잔잔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에 시선을 내리고 있던 아진이 그를 쳐다봤다. 풍성한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이는 게 참 아름다웠다. 석주가 그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를 너무 내몰지 마. 벼랑으로든, 죽음으로든 내몰지 마. 그러지 않아도 돼.”

    “…….”

    “계속 살아 있어.”

    “…….”

    “살아서 나한테 벌줘.”

    네가 내리는 벌이면 무슨 벌이든 다 받을 테니까, 살아만 있어.

    * * *

    아진은 요즘, 자신이 양반이 될 팔자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잠이었다. 잠.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딱히 낮잠을 자는 것도 아닌데, 종일을 게으르게 보내니 밤이 되어 누워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처음엔 잠자리가 너무 고급이라 그런가 했었거늘. 잠을 잘 만큼의 체력을 소모하지 않아서 그랬다.

    이전에는 이른 아침부터 온 집 안을 뛰어다니며 마당을 쓸고, 마루를 닦고,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진이 다 빠져서 정신없이 곯아떨어졌었는데. 지금은 손톱만큼의 체력도 쓰질 않으니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질 않았다.

    오늘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아진은 꽃님이 잠든 걸 물끄러미 지켜보다, 그녀의 이불을 올려 주고는 마루 밖으로 나왔다. 자정이 다가오는 시간. 모든 세상이 하루를 끝마치고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

    그 고요한 순간에 아진만 다음 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마루 아래로 맨발을 축 늘어트린 그가 별이 자욱한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발을 흔들 때마다 댓돌이 발바닥을 사포처럼 긁었는데, 그 느낌이 묘하게 좋아서 나풀나풀 계속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코끝이 은근히 시리기 시작했다. 그 드센 겨울을 이긴 봄이라도 밤에는 기세가 한풀 꺾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진은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

    그때. 자박, 자박.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바쁘게 가까워지던 소리는 아진의 곁에 다다라서 멈춰 섰다. 아진은 발소리의 주인을 어렵지 않게 가늠했다. 고개를 슬쩍 돌리자 소쿠리를 든 석주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석주는 놀란 기색이었다. 아진과의 만남을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

    그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가, 소쿠리를 들썩거렸다가, 괜히 뒤를 돌아보며 고민하다 숨을 크게 마시고는 다가왔다. 그가 아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소쿠리를 내려놓았다. 늘 그렇듯 과일 한 종류와 각양각색의 간식들이 들어 있었다.

    아진은 그걸 흘끔 보고는 다시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게도, 방금까지 시리던 코가 따뜻해졌다.

    석주는 목적을 마쳤음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아진은 그의 존재감을 뚜렷이 인지하고 있었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이곳은 석주의 집이고, 그가 못 갈 곳은 없었다. 꺼지라고 내쫓으면 꺼지긴 하겠지만, 굳이 입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때. 어깨 위로 따뜻한 온도가 내려앉았다. 석주의 후끈한 체온이 담뿍 묻은 두루마기였다. 아진이 석주를 올려다봤다.

    “밤에는 추워. 옷 챙겨 입어. 감기 잘 걸리잖아.”

    “…….”

    아진은 이불처럼 커다란 두루마기를 한 번 보고는 또 침묵했다. 그 침묵에 석주의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던 그가 은근슬쩍 마루에 걸터앉았다. 아진과 그렇게 가깝지 않은 곳에. 그러나 그의 속눈썹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지도 않은 곳에.

    “…….”

    “…….”

    두 사람은 아무런 말 없이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댓돌을 스치던 아진의 발이 우뚝 멎었다. 발이 시렸기 때문이다. 무릎을 모아 접은 아진이 차게 언 발가락을 꾹꾹 주물렀다. 그러고 있으니 낮은 목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왜 안 자고 나와 있어.”

    아진이 무릎 위에 턱을 괸 채 석주를 쳐다봤다. 그를 훔쳐보던 석주가 얼른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아진이 멋쩍어하는 석주의 옆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갈 곳이 없어서요.”

    이상한 말이었다. 왜 자지 않냐는 물음에 갈 곳이 없다고 답하다니. 이 야밤에 갈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러나 석주는 되묻지 않았다. 그저 답을 제시해 주었다.

    “내 방 있잖아.”

    그 말에 아진이 나직이 코웃음을 흘렸다.

    “뻔뻔하시네요.”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석주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슬쩍슬쩍 아진과 눈을 맞추기도 했다. 그런 그의 귓바퀴가 붉었다. 마치 부끄럼을 타는 것처럼. 본인이 뻔뻔하다고 말하면서 얼굴은 영 따로 놀았다. 그러나 행동은 저돌적이었다. 늘 그랬듯이.

    석주가 한 뼘쯤 아진의 곁에 붙어 앉았다. 발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쭉 옆으로 미끄러지는 게 그렇게 능글맞을 수 없었다.

    “언제든 오고 싶으면 와.”

    “…….”

    “나는 매일 매 순간 너를 기다리고 있어, 아진아.”

    “…….”

    “와 준다면 정말 감사할 거야.”

    아진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진짜 뻔뻔하네…….” 하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석주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풋풋한 소년 같았다.

    “얄미우면 한 대 때려.”

    석주가 말했다. 장난처럼 한 말이나, 장난은 아니었다. 아진이 쥐어팬다면 얼마든지 맞을 수 있었다. 그렇게나마 제 죄를 덜어 보려는 못된 의도도 있었다.

    근데 아진은 미친놈이 또 미친 말을 하네,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 손을 올리지 않았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번에 정적을 깬 건 아진이었다.

    “담배…… 있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석주가 눈썹을 올렸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는 곧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도 함께 꺼냈다. 담배 한 개비를 내밀자 아진이 그것을 받아 물었다. 석주가 그의 담배에 친히 불을 붙여 주었다.

    석주는 그 빌미로 아진의 곁에 한 뼘 더 가까이 붙어 앉을 수 있었다.

    새빨간 불씨가 아진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가 사라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통통하고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연기는 뭐가 그리도 고혹적인지. 연기를 내뿜을 때마다 은근히 들려오는 숨소리는 왜 그렇게 야한지. 들썩이는 가슴은 왜 그리 귀여운지.

    “콜록…….”

    기침하는 것도 어찌나 사랑스러운-, 까지 생각하던 석주가 우뚝 굳었다.

    ……기침?

    어쩐지. 한창 붙어 있을 때도 담배 달라는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싶었다. 제가 옆에 앉아 주야장천 줄담배를 태워도 뭐가 좋다고 저걸 달고 사나, 하는 표정으로나 봤었지.

    “처음 피우는 거 아니에요.”

    아진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아무 말 안 했어.”

    석주가 대답했다.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휙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고집 어린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머금었다가 뱉길 반복했다. 입 안 가득 들어차는 매캐한 연기가 낯설었다. 기침도 나오려 했다.

    이전에 명진이 주는 담배를 받아 물었던 이후 두 번째로 피우는 거였으니 당연했다. 아진은 찡한 코끝을 연신 삼켰다.

    저도 모른다. 왜 갑자기 담배가 태우고 싶었는지. 그냥 서늘한 밤에, 고요한 정적에, 수많은 별에, 옆에 앉은 석주까지. 담배 생각이 났고, 그 즉시 담배 있냐는 말이 튀어 나갔다.

    난데없이 태우는 담배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담배 안에 니코틴이고 뭐고 들어 있다는데. 그건 뭔지 모르겠고. 숨을 느릿하게 몰아쉬는 것만으로도 휴식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진은 계속해서 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빨아 당기는 모습이 어색했다. 그런 그의 옆모습으로 석주의 시선이 집요하게 박혀 왔다.

    “뭘 그렇게 봐요.”

    아진이 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석주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예뻐서.”

    “…….”

    “아니, 잘생겨서. 참 잘생겼다, 너.”

    얼른 고치는 말에 아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석주와 이따위 대화나 하고 있다니.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우스웠다. 뭐, 그렇다고 과거에는 양질의 대화를 했느냐마는. 그때도 시답잖은 장난과 석주가 주도하는 음담패설 따위가 대부분이었다.

    아진이 멀면서도 멀지 않은 날들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는데. 석주가 나직이 입을 뗐다.

    “담배 피우는 건 처음 보네.”

    “…….”

    “잘 어울린다.”

    예상치 못한 감상에 아진이 이를 비틀었다. 물고 있던 담배가 휘청거렸다. 희멀건 연기가 일렁였다.

    아진은 잠깐 석주를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그 말이 기분 좋았다. 담배가 잘 어울리는 남자. 사내답지 않은가. 제 비루한 남성성을 다름 아닌 석주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 뿌듯하기까지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사내답지 못한 것인데. 제가 아직 풋내기 애인 모양이다.

    콧잔등을 찡긋거린 아진이 담배를 힘껏 빨아 당겼다. 그리고 자욱이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사장님은 왜 안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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