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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33화 (133/261)
  • 133화

    잘 차려입은 정장에 비단 두루마기를 걸친 모습이 방금 퇴근한 모양새였다. 아진의 속눈썹이 깊게 접혔다.

    “어, 왜…….”

    사장님이 이 시간에 집에……. 종소리도 안 울렸는데. 어째서. 그가 왔다는 종이 울렸다면 제가 알아서 도망쳤을 텐데. 그와 마주하는 이 지독한 찰나가 있었을 리 없는데.

    아진이 굳은 낯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석주를 지나쳐 갈 요량이었다. 근데 석주가 그의 앞에 떡 버티고 서서는,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넓은 두루마기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석주는 그의 가슴과 아진의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앉았다. 덕분에 아진은 의자에 앉은 채로 속박당해야 했다.

    “비켜요.”

    아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석주는 침묵을 유지한 채, 아진의 손목을 함부로 잡아챘다. 몹시 오랜만의 무례한 손길이었다. 어금니를 짓씹은 아진이 손목을 뒤틀었으나 석주가 놔주지 않았다.

    “…….”

    석주의 시야에 아진의 손목이, 정확히는 그의 손목에 둘둘 감긴 붕대가 들어찼다. 때가 탄 붕대는 헐거워진 상태였다. 드문드문 피가 묻어 있었고, 진물도 난 듯 얼룩까지 져 있었다.

    석주의 만면에 분노가 스몄다. 지레 겁을 집어먹은 아진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석주의 분노는 그가 아니라 석주 자신을 향해 있었다.

    석주는 아진이 괜찮은 줄 알았다. 며칠 금단 현상으로 앓긴 했어도 그 후엔 조용했으니까. 조직원들이 이렇게 저렇게 제보해 주는 그의 목격담이 하나같이 평화로웠으니까.

    꽃님과 집 안 여기저기를 산책하고, 꽃구경도 한댔다. 그의 밥을 꽃님이 직접 해다 먹인다고 했다. 종일 작은 강아지를 보고 있었다고 했다. 봄볕을 즐긴다고 했다. 중정에서 물고기 구경도 한댔다. 제가 매일 고심해서 갖다 바치는 소쿠리의 음식도 뒤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석주는 기뻤다. 아진이 슬슬 행복해지는 것 같아서. 저는 아진을 가까이서 보살필 권리를 박탈당한 이라, 남이 말해 주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줄만 알았다.

    근데 아진이 거꾸로 가고 있을 줄이야. 이렇게 본인의 몸을 돌보지 않을 줄이야. 죽음을 입에 올릴 줄이야. 꽃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온전치 못할 줄이야.

    “왜 이래. 왜 약 안 먹어. 왜 붕대 안 갈아.”

    “……비키라니까요.”

    “못 하겠으면 말을 해. 내가 해 주는 게 싫으면 아무나 잡고 부탁해. 그것도 싫으면 의사를 불러 줄 테니, 말만 해. 말이라도 해.”

    “…….”

    “이런 상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덧나면 순식간이야. 더군다나 너는 몸이 약해서 정말 큰일 날지도 몰라. 살이 썩기라도 하면 손목을 잘라야 해. 운이 안 좋으면 팔까지 잘라야 할 수도 있어.”

    주절주절 이어지는 불행의 극치에 아진이 미간을 한껏 구겼다. 짜증이 났다. 왜 이런 말을 다른 이도 아닌 석주에게 들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진은 석주의 어깨를 떠밀며 팔을 빼내려 했다.

    “비키라고!”

    그러자 석주가 아진의 손을 자신 쪽으로 휙 당기며 소리쳤다.

    “아진! 너 이러다 죽어!”

    석주의 저음이 중정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때마침 하늘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연못에 물결을 만들었다.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진이 밭은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그의 흰자위가 불그스름했다. 군청색 눈동자는 도려낸 듯 또렷해졌다.

    아진이 바람기가 많이 섞인 음성으로 매우 고요히 읊조렸다.

    “그래서요? 죽는 게 뭐.”

    “…….”

    “왜 죽으면 안 되는데?”

    “…….”

    “사장님한테는 나를 말릴 권리가 없어요.”

    그 말에 석주의 만면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권리. 그것을 따지자면 석주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아진이 손목을 뒤틀었다. 그렇게 그에게서 벗어나나, 했는데. 석주가 팔을 깊이 뻗어 이번에는 아진의 팔꿈치를 잡아챘다. 전보다 더 강한 아귀힘이었다.

    아진이 당황 어린 시선으로 석주를 쳐다봤다. 석주가 그의 눈을 직시하며 입을 달싹였다.

    “그래, 맞다. 나에겐 그럴 권리가 없지.”

    “…….”

    “헌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언제 권리 따져 가며 살던 놈이더냐.”

    뻔뻔하다 못해 무서운 말에 아진의 눈동자가 출렁거렸다. 석주가 그의 반대편 팔꿈치까지 쥐었다. 피부가 그의 손가락에 꾹 짓눌렸다.

    이제 아진은 고작 팔을 흔드는 것으로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언젠가처럼 격렬히 몸부림을 치고 우짖어야 했다. 아니, 그래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진의 뺨에 조금씩 조금씩 공포가 스몄다. 석주가 그 공포를 직시하며 말했다.

    “아진아. 나는 널 살리기 위해선 못 할 일이 없어.”

    “…….”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너를 내 방에 가두고, 네 손을 묶고, 네 발목에 족쇄를 채울 거다. 그렇게 해서 네가 산다면 얼마든지. 망설임 없이. 그 짓을 수백 번도 더 반복할 거다.”

    “……사장님.”

    아진의 낯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 여린 얼굴을 올려다보던 석주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단호하고 단단하던 그의 목소리에 균열이 생겼다.

    “그러니…… 그게 싫으면 살아. 악착같이 살아서 나한테 복수해. 너 혼자서도 잘 산다는 걸 보여 줘. 내가 없어서, 내가 없어야 네가 더 반짝인다는 걸 증명해.”

    “…….”

    “그럼, 그럼 내가 슬퍼하며 놓아줄 테니까…….”

    석주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진의 손목에 칭칭 감긴 붕대 위로 얼굴을 묻었다.

    “살아. 살아, 아진아.”

    죽지 마, 제발.

    석주는 아진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아진은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괜히 뻗대 봐야 석주가 매치듯 들고 갈 걸 알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헌데 방 앞에 다다라서, 석주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가 아진의 얼굴 한 번, 쥐고 있는 아진의 손 한 번, 그리고 자신의 방문을 한 번 보더니 천천히 손을 놓았다.

    “잠시만…… 기다려.”

    “…….”

    “기다려야 해. 꼭.”

    그렇게 당부한 석주는 방문을 벌컥 열고는 바쁘게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훤히 열려 있어 아진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석주는 서랍에서 약상자를 꺼냈다. 깨끗한 수건을 물에 적시고, 잠시 방황하다 콜라 한 병과 빨대도 챙겼다. 그렇게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는 밖으로 나왔다.

    다시 아진의 손을 쥔 그는 방 바로 앞에 있는 대청마루로 향했다. 그리고 한쪽에 쌓인 방석 하나를 툭 내려놓더니 앉으라 눈짓했다.

    아진은 그제야 석주의 괴이한 행동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제가 그의 방에 들어가는 게 싫었던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제가 그 방에 들어가는 걸 싫어할 거라 생각한 듯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기억이 잔뜩 묻어 있는 곳이라서.

    그래서 번거롭게 약을 싸 들고나온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제 환심을 사 보겠다고 콜라 한 병을 챙긴 게 참…….

    하여튼 등신…….

    하여간 미친놈…….

    이럴 거면 처음부터 그러질 말지.

    아진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방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석주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방석도 없이 마루에 대충 퍼질러 앉은 그가 두루마기를 벗었다. 그것을 반으로 접어 내려놓으려다, 아진을 보며 물었다.

    “추워?”

    “…….”

    아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석주가 턱을 주억이며 두루마기를 내려놓았다. 그 후 재킷도 벗고, 와이셔츠 소매를 둘둘 걷었다.

    콜라 뚜껑을 딴 그는 빨대까지 꽂아 아진의 무릎 옆에 슬쩍 내려놓았다. 그리고 물러나다, 콜라를 아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밀었다. 아진이 탄산이 보글보글 솟아오르는 검은 물을 빤히 내려다봤다.

    ‘간장이에요?’

    ‘구정물…… 같은데요.’

    ‘미국에서 온 거라고요? 근데 이걸 저한테 왜 보여 주시는 거예요? 자랑하시는 거예요?’

    그 언젠가 석주가 제게 콜라를 처음 주던 날이 떠올랐다. 얼마나 멍청하고 바보 같았던지. 석주가 뚜껑을 따 주며 일단 먹어 보라 하던 말이, 빈 병이 예쁘다며 갖고 싶다는 제 말에 매일 사 주겠다던 말이 덩달아 떠올랐다.

    아진이 피식 실소했다. 그 작은 웃음에 석주의 넙데데한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아진의 미소를 조소로 판단한 그가 누그러든 음성으로 말했다.

    “……싫으면 안 마셔도 돼. 명진이 주면 되니까.”

    그 말에 아진이 재차 웃음을 흘렸다. 김빠진 콜라를 받은 명진의 표정이 어떠할지 상상이 돼서. 석주가 준 거라 버리진 못하고 흉터가 길게 난 턱을 벅벅 긁으며 ‘잘 묵겠습니다, 형님.’ 그러겠지.

    아무래도 그를 위해 제가 먹어 주는 게 좋을 듯했다.

    아진이 콜라를 들어 빨대를 물었다. 그리고 두 모금 크게 빨아 당겼다. 입천장을 간질이는 탄산에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

    그 모습을 보던 석주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폈다. 그러다 너무 좋은 티를 내면 아진이 싫어할까, 얼른 입꼬리를 눌러 내렸다.

    석주는 진드기처럼 자꾸 아진에게 가 달라붙는 시선을 갈무리하며 손목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붕대를 풀고, 피와 진물이 엉켜 있는 상처를 젖은 수건으로 살살 닦아 냈다. 짓무른 상처가 어찌나 아플 것 같은지. 그 고통을 통감하는 석주의 눈썹이 한껏 구겨졌다.

    석주는 피를 다 닦아 내고 연고를 듬뿍 짜 발랐다. 꽃님처럼 연고를 많이 바르면 금방 낫는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주 한 통을 다 쓰겠다는 듯 굴었다.

    그리고 조심히 붕대를 감아 주었다. 몸에 흉터가 많은 사람답게, 붕대를 감는 손길이 매우 익숙했다. 석주는 뚝딱 치료를 마쳤다.

    “물 닿으면 안 돼. 번거롭더라도 조심해. 씻기 힘들면 꽃님이 아줌마한테 부탁하거나 아니면, 어…… 나한테…… 말해도 돼.”

    “…….”

    “그, 발목도 좀 봐도 돼?”

    “…….”

    지극한 걱정이 담긴 물음에 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콜라만 쭉 빨아 마셨다.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제법 맛이 좋았다. 갑자기 약과가 먹고 싶어졌다. 오늘 석주가 소쿠리에 약과를 두고 간다면, 꽃님이 먹은 척 하나를 빼 먹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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