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내가 널 이토록 사랑한다는 걸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이런 감정도, 이런 마음도, 이런 몸도, 이런 상황도 처음이라 어른답게 행동할 수가 없다.
석주가 아진을 조금 더 깊게 껴안았다. 그리고 고요히, 그러나 시끄럽게 아진을 만끽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의 수발을 드는 걸 소홀히 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열이 오르는 아진의 팔뚝이나 뺨에 찬물을 묻혀 주고, 숨을 헐떡이면 팔뚝이나 등을 문지르며 달래 주고, 제 체온과 아진의 체온으로 물이 미적지근해진다 싶으면 물을 빼내고 새로이 다시 받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아진이 몸을 옆으로 뒤틀며 웅얼거렸다.
“목…… 말라…….”
석주가 얼른 욕조 옆 간이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물잔에 미적지근한 물을 따라 아진의 아랫입술에 대 주는데. 아진은 입을 뻐끔 벌리면서도 물을 삼키진 않았다. 기껏 들어간 물이 다시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드문드문 목에 걸려 아프게 기침하기도 했다.
석주가 눈썹을 구겼다. 이걸 어쩌나……. 고민하던 그가 아진의 턱을 조심히 감싸 쥐고, 그의 입 안으로 검지를 두 마디 정도 집어넣었다. 축축한 입 안이 느껴진다 싶더니 지문에 뜨끈하고 말랑한 혀가 닿아 왔다. 석주의 눈썹이 예민하게 벼려졌다.
“흐…….”
갑작스럽고 무례한 침입이었음에도 아진의 혀는 석주를 밀어 내지 않았다. 그저 축 늘어져 있는 게 그만큼 힘이 없는 모양이었다.
석주는 아진의 혀와 턱을 아래로 꾹 내리누른 채, 검지를 따라 물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아진의 입 안에 물이 스미듯 차올랐다.
아진은 처음엔 적응하지 못하고 고개를 뒤틀었다. 그러다 이내 그것이 물임을 깨닫고, 꼴깍꼴깍 미약하게나마 삼키기 시작했다. 석주의 손가락을 빨아당기는 모양새가 마치 젖병 문 아이 같았다.
그럴 때마다 석주의 관자놀이가 안으로 움푹 들어갔다가 나오길 반복했다.
다행히 아진은 별일 없이 물잔을 모두 비워 냈다. 석주가 빈 잔을 협탁에 내려두고, 아진의 입에서 천천히 손가락을 빼냈다.
그래, 시인하자면 그 행위가 썩 깔끔하진 않았다. 온 정신을 손가락에 집중하고 부러 느리게 빼냈다.
손끝에 닿는 아진의 혀와 타액과 입술이 눈 뒤집히게 좋아서, 그와 입을 맞추고 싶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를 어떻게 해 버리고 싶어서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석주는 더 이상 금수처럼 굴지 않기로, 아니, 금수로 태어났지만 아진의 앞에선 인간이 되기로 맹세했다.
마른침을 삼킨 석주가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물을 마시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아진을 다시 당겨 안는 순간이었다. 아진이 매가리 없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중얼거렸다.
“목이 자꾸…… 말라요…….”
물을 머금어 촉촉해진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물을 먹다 못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음에도 그 갈증이 해갈되지 않는 듯했다. 아진의 몸이 원하는 게 물이 아니어서 그랬다. 다른 것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석주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아진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동그란 이마에 촉촉 입을 맞추기도 했다.
“괜찮아. 괜찮아. 조금 있으면 없어질 갈증이야.”
아진의 귓가로 조곤조곤 속삭이는 음성이 매우 감미로웠다. 아진은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석주의 가슴팍에 뺨을 묻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드나, 싶었는데. 이제 한 파도 넘겼나, 싶었는데.
아진의 미간이 다시 구겨지기 시작했다. 닿아 있던 몸이 시시각각 차가워진다 싶더니 아진이 목을 자라처럼 오그리고, 어깨를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파랗게 질린 입술로 추위를 토로했다.
“추워…….”
그 말에 석주가 머뭇거림 없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예상했던 바였다. 약을 끊으면 더웠다 추웠다 하는 게 기본인지라.
물이 촤아아- 하고 떨어졌다. 석주는 아진을 바닥에 앉혀 두고 찬물에 젖은 그의 바지를 벗겨 냈다. 그리고 나신이 된 그를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 냈다. 아진은 그 찰나도 버티지 못해 덜덜 떨어 댔다.
“너무 추워요……. 으, 추워…….”
“응. 알았어. 잠시만.”
석주는 다정하게 그를 달래며 물을 닦아 주었다. 머리칼도 털어 주고, 손가락 사이사이에 묻은 물도 닦았다. 그 후 흠뻑 젖은 자신의 옷도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어깨에 수건 하나를 대충 걸친 그가 아진을 안아 들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방에는 명진이 두고 간 두툼한 솜이불이 있었다. 눈치 좋은 그가 따로 언질을 해 둔 모양인지 방바닥도 뜨끈뜨끈했다.
석주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아진을 마주 보고 껴안았다. 그리고 이불로 아진과 자신을 함께 싸맸다. 뜨끈한 바닥에, 두툼한 이불에, 맞닿아 있는 나신의 아진까지. 석주의 체온이 순식간에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진이 본능적으로 석주에게 달라붙었다. 두툼하고 단단한 가슴팍에 뺨을 비비고, 허리를 안고, 속에서부터 치미는 냉기를 석주에게 부지런히 묻혔다.
그저 살고자 하는 몸짓일 뿐인데, 아진이라서 그런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띤 석주가 마른 등을 슥슥 쓰다듬었다. 차게 식은 발도 조물조물 만져 주고, 그의 목덜미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훔쳐 주기도 했다.
그렇게 아진을 따뜻하게 달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사장님…….”
아진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왔다.
“…….”
석주가 흠칫 굳었다. 아진이 저를 알아보는 게 반갑지 않았다. 얼어 죽었으면 죽었지, 이렇게 붙어 있는 걸 허락해 줄 리 없어서. 발작하듯 몸을 뒤틀며 제 품에서 빠져나가려 할 터였다. 그가 두려움 섞인 시선으로 아진을 쳐다봤다.
근데 어째 아진의 시선이 묘하게 이상했다. 가늘게 뜬 눈이 분명 석주를 응시하고 있는데, 석주가 아니라 다른 걸 보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꿈속의 석주를 본다거나, 과거의 석주를 본다거나, 혹은…… 미래의 석주를 보는 것 같은. 지금 이곳에 있으나 이곳에 없는 눈빛이었다.
아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가 석주의 가슴을 손톱으로 내리그으며 한탄했다.
“사장님, 저 아파요…….”
“……아진아.”
“흐으, 너무, 너무 아파요……. 아파…….”
아진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석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아픈 근저가 석주에게서부터 비롯되었음을 아는 듯한데, 석주의 허리를 안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아진은 약을 먹지 않았으나 약에 취한 상태였다. 아니, 고통에 취한 상태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아파-아…….”
아프다고……. 아진이 짜증을 내며 어깨를 비틀었다. 분하다는 듯 머리로 석주의 가슴을 쿵쿵 들이박기도 했다.
“…….”
석주는 그 나약한 원망을 가만히 감내하고 있었다. 간간이 흐트러지는 이불을 추스르면서. 그런 그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얇았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가면을 쓴 듯한 모습이었다.
아진은 훌쩍훌쩍 눈물을 떨구더니 이내 허어엉, 하고 거센 울음을 터트렸다.
“흐으, 큽, 흐어어……. 무서워…….”
석주가 딱딱하게 굳었다. 가슴을 긁어 대는 아진의 손끝이 심장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의 손아귀에 심장이 짓이겨지는 듯한 환촉이 일었다. 이렇게 더 있다간 아진의 울분에 옥죄인 심장이 터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에게 바친 지 오래된 심장이라. 어차피 제 소유가 아니었다.
헌데 다른 게 문제였다. 아진의 손에 심장이 터져 죽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데. 그의 울음까지는 도저히 참아 낼 수가 없었다. 그의 눈물에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의 몸도, 제 몸도 물에 젖어 있어서 더 그랬다. 마치 아진의 눈물에 빠진 듯했다.
석주가 아진을 껴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아진의 귓불에다 대고 지루한 사과를, 보잘것없는 사과를, 무용한 사과를 이어 갔다.
“미안하다, 미안해.”
“흐어어, 아파…….”
“아진아, 내가 잘못했어.”
“으흑, 흐으……, 끅, 흐으…….”
“그러니 울지 마…….”
석주가 간절하게 속삭였다. 허나 아진의 울음은 멈출 줄 몰랐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도, 가슴과 가슴이 맞붙고 서로의 숨결이 엉킬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데도, 두 사람의 거리는 세상의 끝과 끝만큼 멀었다.
그래서 석주의 기도가 도무지 아진에게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 * *
온전한 봄이 온 세상에 내렸다. 매번 봄에 패배하는 겨울이 이번에는 조금 질기게 버티다 사라졌다. 치열한 전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세상은 승리한 봄에 복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꽃이 피고, 나무는 풍성해졌고, 구름은 몽글몽글해졌으며, 바람은 솜털처럼 부드럽고, 햇살은 온화했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게 만개하는데, 아진은 자꾸 시들어 갔다.
창호지 문을 열어 두고 방과 마루의 경계에 앉은 아진이 파란 하늘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 눈이 과거, 석주의 방에 걸려 있던 파도 그림을 볼 때와 비슷했다.
아진은 살이 조금 내렸다. 근 며칠, 약물 금단 현상으로 몸이 지지리도 아팠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아진에게 무슨 병인지, 무엇 때문에 아픈 것인지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깨달았다. 머리 한편에 동그랗고 하얀 알약이, 그것을 먹었을 때의 그 께름칙한 쾌락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그 뒤틀린 갈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아진은 그 고통의 여운에서 도통 빠져나오질 못했다. 말수가 사라졌고, 기력이 없었다. 시종일관 멍하니 있는 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생 차가운 체온에 적응해 온 영혼이 갑작스레 치미는 열기에 반쯤 타 버린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릴없이 하늘을 보던 아진이 나직이 꽃님을 불렀다.
“아줌마.”
그 부름에 침대에 앉아 있던 꽃님이 아진을 바라봤다. 아진이 그녀를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아줌마 죽으면, 아줌마 장례 치르고, 아줌마 볕 잘 드는 곳에 잘 묻어 주고, 그다음에…… 나도 죽을까?”
“…….”
“괴롭거나 우울하거나, 뭐 그렇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이제는 사는 게 별로 재미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