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30화 (130/261)
  • 130화

    ‘형님. 집입니다. 아진이가 많이 아파요. 아가 부들부들 떨고, 눈도 못 뜨고, 말귀도 못 알아듣습니다. 근데 이게…… 어디가 아픈 게 아니라요, 아픈 게 맞긴 한데, 병원 간다고 되는 일은 아니고…… 그니까, 아우, 와 보시면 압니다. 얼른 오세요. 이러다 아진이 가보다 꽃님이 아지매가 큰일 날 것 같습니다.’

    회사에 있던 석주는 전화를 받자마자 곧장 집으로 왔다. 차에서 뛰어내린 그가 아진의 방으로 달려갔다. 신발을 벗을 새도 없이 댓돌과 마루를 성큼성큼 뛰어 올라간 그가 덜컥 문을 열었다.

    방에는 집에서 일하는 이들 몇 명과 석주에게 전화한 조직원, 그리고 꽃님과 그녀의 품에 안긴 아진이 있었다.

    “아진아.”

    석주가 아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아진의 앞머리를 크게 쓸어 넘겼다. 파리한 얼굴이 오롯이 드러났다.

    아진은 한눈에 보기에도 심하게 아파 보였다. 검은 머리칼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몸은 간헐적으로 경련하듯 떨렸다. 입술은 하얗게 질렸고, 눈은 가늘게 뜬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인지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아가 계속 목마르다 캐서 물을 먹이긴 했는데, 그래도 목이 마르다고…….”

    조직원이 아진의 상태에 대해 말했다. 꽃님이 그를 옆으로 밀며 석주를 원망했다.

    “우리 아진이 왜 이래. 응? 왜 이래. 또 무슨 짓 했어, 우리 아진이한테!”

    부리부리하게 치켜뜬 눈에 분노와 공포가 엉망으로 뒤섞여 있었다.

    “…….”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답할 말이 없었다. 정말 제가 ‘무슨 짓’을 한 게 맞아서. 지금 아진이 아픈 이유가 제게 있는 게 맞아서.

    귀신같은 꽃님은 석주의 침묵에 정말 그가 잘못한 것이라는 걸 대번에 눈치챘다. 그녀가 석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분노에 전 마른 손이 질겼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은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이 육시랄 새끼…….”

    “아이고, 아지매. 가마이 좀 있어 봐요. 형님이 봐야 병원에 델꼬 가든 다른 걸 하든 하지.”

    조직원이 꽃님을 뒤로 당기며 말렸다. 그 말에 발악하던 꽃님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그녀가 순순히 석주의 멱살을 놔주었다. 아무래도 분노보다는 아진을 살리는 게 우선인지라.

    그 허락 아닌 허락에 석주가 아진을 갓난아이를 안듯 조심히 추슬러 안았다. 그리고 불그스름한 눈두덩을 엄지로 살살 문질러 주며 그를 불렀다.

    “아진아. 나 봐 봐.”

    “흐으…….”

    “아진아.”

    꾸준한 부름에도 아진은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몸은 더욱 뜨거워졌고, 갈무리되지 못한 사지는 축 바닥으로 늘어졌다. 꼭 몸살이 난 상태로 술을 얼큰히 마신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석주의 어깨 너머로 보던 명진이 걱정스레 읊조렸다.

    “형님, 이건…….”

    “그래. 이제 온 모양이다.”

    석주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이 아픈 건 다름 아닌 약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약물 금단 현상.

    석주의 방에 갇혀 있던 겨우내 약을 먹었고, 병원에서는 투약량을 줄이면서 끊게 한다며 소량을 주었고, 퇴원해서도 야금야금 먹다가 이제 완전히 끊어 냈으니 금단 현상이 오는 것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양을 줄여 가며 끊은 터라. 다른 약쟁이들은 바닥에 토를 하다못해 소변이나 대변을 지리거나, 안면 근육이 보기 싫게 뒤틀리거나, 사지 뼈가 꺾인 채 굳는 경우도 있었다.

    석주는 마약을 파는 이고, 약쟁이만큼은 아니더라도 금단 현상으로 고생하는 이를 꽤 봐 왔다. 그 덕에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왜. 뭔데. 이게 뭔데. 아진이가 왜 이러는데!”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는 석주와 명진에 꽃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석주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더워…….”

    아진이 자신의 저고리 깃을 아래로 죽죽 잡아당기며 신음했다. 석주가 흐트러진 그의 옷을 다시 여며 주며 조직원에게 말했다.

    “내 방 욕조에 물 받아라. 찬물로.”

    “예.”

    “명진이 너는 두꺼운 이불 내 방에 갖다 두고.”

    “예, 형님.”

    두 사람이 바쁘게 방을 나섰다. 석주가 아진의 무릎 뒤와 등을 받쳐 안아 들었다. 마른 몸이 참 쉽게 들렸다. 그가 성큼성큼 방을 나서는데. 튕기듯 일어난 꽃님이 석주의 옷을 부여잡고 늘어졌다.

    “어, 어디 가는데? 병원 가는 거야?”

    “아니요. 제 방으로 갑니다.”

    “왜! 거기 뭐가 있는데! 아진이를 왜 또 그 끔찍한 곳으로 데리고 간다는 거야! 약이 있는 거면 내가 가서 갖고 오면 돼. 어디 있는지 말해.”

    “아무 일 없을 겁니다. 그저 열을 좀 식히려는 것뿐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버러지 같은 네 품에 아진이가 들려 있는데! 꽃님이 세상이 무너지라 소리를 질렀다. 산발이 된 그녀의 머리칼이 스산하게 휘날렸다.

    “…….”

    석주의 입이 한일자로 꾹 다물렸다. 한시가 바쁜데 시비를 걸어 대는 꽃님이 영 못마땅했다. 그녀의 걱정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아진이 우선이었다. 석주가 꽃님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 물었다.

    “아진이 들고 뛸 수 있습니까?”

    “뭐?”

    “아진이 데리고 병원은 갈 수 있나?”

    “…….”

    “아진이가 왜 아픈지, 어떻게 해야 안 아파질지 아나?”

    “…….”

    “지금, 그걸 할 수 있는 건 나뿐입니다, 아줌마. 아줌마도 그걸 아니까 나 부르라고 방방 뛴 거 아닙니까.”

    “…….”

    “이래서 아진이를 내 집에 둔 거예요. 아프면 치료해 주고, 울면 달래 주려고.”

    석주가 커다란 손으로 아진의 뒤통수를 감싸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했다. 잠시 몸을 뒤틀던 아진이 익숙하게 그의 품 안에서 자리를 잡아 갔다. 그리고 석주의 옷을 꾹 틀어쥔 채 웅얼거렸다.

    “사장님, 나 더워…….”

    그 말에 꽃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노기와 분노가 아래로 쏙 빠진 거였다. 석주가 아진을 달래듯 마른 등을 토닥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진이가 아픈 건 나도 싫습니다.”

    “…….”

    “이 아이가 아프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방해는 하지 마요.”

    “…….”

    “아줌마가 해야 할 건 아진이 옆에 있어 주는 겁니다. 그러라고 수술시켜 주고, 그러라고 약 먹이는 거예요. 당신이 없다고 아진이가 외로워하면 안 되니까. 울면 안 되니까.”

    “…….”

    “남은 욕은 아진이가 나으면 그때 마저 들어 줄 테니 너무 답답해하지 말고.”

    말을 마친 석주가 꽃님을 지나쳤다. 꽃님이 멀어지는 석주를 멀거니 쳐다봤다.

    석주가 욕조에 손을 넣어 물 온도를 확인했다. 닿자마자 손가락이 서늘하게 식는 물은 계곡처럼 차가웠다. 석주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욕조 옆에 앉혀 둔 아진의 저고리를 당겨 풀었다. 그러다 흠칫 몸을 굳히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가.”

    짧은 명령에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명진과 조직원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명진이 마지막으로 욕실 문을 닫으며 꾸벅 묵례했다.

    비로소 욕실에 석주와 아진 둘만 남았다. 석주가 아진의 저고리를 벗겨 냈다. 하얀 상체가 드러났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살결이 강렬하게 시선을 끌었다.

    석주는 부러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음험한 속내를 키우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아진의 바지까지 벗기려다, 그래도 선은 넘지 말자 싶어 손을 거두었다.

    석주가 아진을 안아 들어 천천히 욕조 안에 내려놓았다. 행여 찬물에 놀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진은 찬물이 편하다는 듯 옅은 탄식만 흘렸다. 한껏 구겨져 있던 말간 미간이 느슨해졌다.

    석주가 덩달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진의 몸에서 손을 거두는데. 중심을 잡지 못한 아진이 욕조 안으로 쑥 미끄러졌다. 물이 출렁거리며 그의 입술을 삼켰다. 놀란 석주가 얼른 그를 다시 잡아 건져 냈다.

    “이런…….”

    석주가 낭패라는 듯 입술을 짓씹었다. 어찌하나, 고민하던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그리고 대충 구두와 양말만 벗고 아진이 있는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석주는 아진을 등 뒤로 안고,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혀 두었다. 그의 커다란 몸집에 욕조 물이 밖으로 콸콸 쏟아졌다. 석주는 욕조 배수구를 열어 수심이 아진의 쇄골 언저리에서 찰랑거릴 때까지 물을 빼냈다.

    그 후, 붕대가 감긴 아진의 손목을 욕조 턱에 걸쳐 놓았다. 웅크린 다리도 편히 펴 주고, 앞으로 고꾸라진 고개를 펴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아진의 허리를 감싸 그를 고정했다.

    그렇게까지 하고 났더니 몸이 후끈해졌다. 찬물에 전신을 담그고 있는데도 긴장으로 인한 열은 어쩌지 못했다.

    “하아…….”

    석주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천장을 향해 한숨을 흘려보냈다. 그러면서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다시 아진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진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덥다며 허리를 비틀지 않았고, 눈두덩과 광대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있던 열기도 조금 가라앉았다. 색색거리며 내쉬는 숨은 여전히 가빴지만 그래도 괴로워 보이진 않았다.

    석주는 아진의 어깨에 연신 물을 끼얹어 주었다. 동그랗고 하얀 어깨가 물기를 머금어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석주가 그것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

    이러지 말자, 이러면 안 된다, 제 주제에 감히, 탐낼 걸 탐내야지, 석주는 그렇게 자신을 내몰다 끝내는 갈망에 굴복하고야 말았다.

    아진을 조금 더 세게 껴안은 그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옅은 물비린내 너머 아진의 냄새가 났다. 그의 매끄럽고 보드라운 피부가 사무치게 좋았다.

    석주의 표정이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등신 같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 울 주제가 못 되는지라 꾸역꾸역 삼켜 냈다.

    “아진아…….”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다. 아진이 더 아픈 건 싫으니, 그냥 다 멈추고 잠깐만, 아주 잠깐만 이 황홀하고 감사한 순간을 누렸으면 했다. 염치도 없이 지금이 미치게 좋았다.

    아진이 너무 좋았다.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이렇게 몸을 맞대고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기적 같은 일인지 미처 몰랐던 이전이 통탄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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