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29화 (129/261)

129화

“그놈 엿 먹이는 것 같아서, 복수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냐고. 날아갈 것 같냐고.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그렇냔 말이다. 그럼 내 얼마든지 여기 있으마.”

“…….”

“근데 아니잖아, 너. 밤에 잠도 못 자고 처우는 등신 새끼가, 강 사장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 새끼가, 그놈 마주칠까 봐 화장실도 새벽에 가는 새끼가, 뭣 하러 여기 부득부득 붙어 있어.”

“…….”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그깟 밥이 뭐라고 이렇게 금수같이 사냔 말이야!”

아진이 흡, 하고 숨을 멈췄다. 정곡이었다. 항상 모든 걸 다 아는 꽃님은, 이번에도 멍청하지 않았다. 아진이 열과 성을 다해 숨겨 온 진실을 참으로 쉽게 까발렸다.

아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심장이 괴상한 박자로 뛰어 댔다. 눈알이 뜨끈뜨끈했다. 차오르는 분노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줌마 미워! 내 마음도 모르면서! 나도 이제 아줌마랑 말 안 해!”

아진은 어린아이가 떼쓰듯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씨근덕거리며 창호지 문을 박차고 나왔다. 제가 화난 걸 표출하듯 문을 쾅 닫고, 휘영청 뜬 달을 노려보다 씩씩거리는 호흡을 삼켰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 기분은 하나도 생각 안 해 주고. 아줌마는 나로 살아 본 적 없으면서. 절름발이로 안 살아 봤으면서…….”

씨발, 씨발, 씨발……. 아진이 욕을 읊조렸다. 분노를 표출하듯, 발뒤꿈치로 마룻바닥을 쾅쾅 때리기도 했다. 그가 박박 얼굴을 긁었다. 어찌나 세게 긁는지 코끝이 새빨개질 때였다.

바스락.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가 마당 흙을 밟는 소리였다. 아진이 그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인영이 망막에 박혀 왔다. 석주였다.

와이셔츠를 입고, 두루마기를 어깨에 걸친 그가 소쿠리를 든 채 서 있었다. 다섯 걸음쯤 떨어진 거리였는데,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아진과 꽃님이 대차게 싸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먼 거리는 아니었다.

아진의 광대가 화르륵 타올랐다.

“어, 언제부터…….”

“미안. 들으려던 건 아닌데…….”

석주가 단정한 음성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시선을 맞추며 조심히 걷는 게 혹 아진이 놀란 토끼처럼 도망칠까 달래는 듯한 몸짓이었다.

“…….”

아진이 그런 석주를 경계 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쭈뼛쭈뼛 뒷걸음질을 치기도 했다. 석주는 마루에서 한 걸음 떨어진 지점에서 멈춰 섰다. 더 다가가지 않겠다는 듯 눈짓을 하기도 했다.

그가 들고 있던 소쿠리를 마루 끄트머리에 슬쩍 내려놓았다.

“이거 주려고.”

“…….”

“종로에 도넛츠 가게가 생겼어. 미국 빵인데 맛이 좋더라고. 빵 안에 초콜릿도 들어 있어. 네가 좋아할 맛인데, 혹시 입맛에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 약과도 같이 사 왔다.”

“…….”

“목 막힐까 봐 우유도 넣어 놨어. 우유가 몸에 좋다더라. 요즘 애들한테는 약으로도 먹인대.”

석주가 묻지도 않은 것을 주절주절 말했다. 그런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 있었다.

“…….”

아진이 소쿠리 안을 쳐다봤다. 석주가 말한 것들이 수북하게 들어가 있었다. 그 밖에도 각양각색의 간식거리가 있었다.

단 한 번도 주는 걸 먹은 적이 없는데. 매일 쉬지 않고 다른 것으로 갖고 오는 게 참…… 얄미웠다. 또 이런 걸 사과랍시고 하는구나, 그 언젠가 여름 사과를 주었던 그때처럼 구는구나, 싶어서 신경질이 확 솟구쳤다.

입을 앙다문 아진이 발로 소쿠리를 퍽 차 버렸다. 밑이 둥그런 소쿠리는 큰 저항 없이 날아갔다. 그것이 머금고 있던 내용물을 와르르 쏟아 냈다. 그러고는 한결 몸이 가벼워진 몸뚱이로 데구루루 마당의 어둑한 곳까지 굴러가 버렸다.

석주가 부러 예쁜 것만 골라 온 약과와 도넛이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우유가 들어 있던 병은 파삭 깨졌다. 하얀 우유가 흙바닥을 적시며 검게 물들었다.

때마침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빛이 훤해졌다. 엉망진창이 된 주전부리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석주가 자신의 구두코에 부딪혀 으스러진 약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

석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짜증을 내지도, 어디 귀한 음식을 함부로 대하냐, 윗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냐, 꾸짖지도 않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닥을 나뒹구는 자신의 정성을, 버려진 자신의 노력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진이 그런 석주를 노려보며 으르댔다.

“사장님은 변한 게 하나도 없어.”

“…….”

“뭐가 이렇게 쉬워요.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그 말에 석주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가 풀었다. 마른침을 두 번 연달아 삼킨 그가 마루 위에 서 있는 아진을 올려다보며 사과했다.

“미안.”

“…….”

“네 앞에 나타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몇 없어서, 내 딴에는 고민한 건데. 이렇게나마 뭘 해 보려고 한 건데. 쉬워 보였을 수도 있겠네. 미안해.”

“…….”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려 주면, 그리하마.”

“제가요? 제가 왜, 왜 그걸 알려 줘야 해요?”

아진이 뒤꿈치를 들썩이며 소리쳤다. 사과하는 방법까지 알려 달라니. 이렇게 염치가 없을 수 있나. 억세게 말린 아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유순한 모양새의 눈썹이 어색하게 오르막을 그리고 있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아진이 가득 담겼다. 그 집요한 시선에 부담을 느낀 아진이 뒤로 물러서려는데. 무언가를 깨달은 석주가 쓸데없이 감미롭게 말했다.

“그저 성질을 부리고 싶은 거라면 매일 차도 된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갖고 올 테니까 다 차 버려.”

“…….”

아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불그스름하던 광대가 더욱 붉어졌다. 단번에 꿰뚫린 심보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꽃님도 석주도 참 쉽게 제 속을 꿰뚫어 본다. 그게 너무 민망하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아진은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우물거리다, 귓바퀴가 시뻘게져서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갔다. 창호지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에 석주가 바보 같은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그가 떫은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아진이 우는 것보다야 화를 내는 게 마음이 편했다.

석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진과 하는 대화는 어렵고 힘겹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마음도 억눌러야 하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불순한 욕망도 모른 체해야 하고, 그런 와중에도 그를 눈에 담고 싶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어떻게든 그의 숨결과 스치고 싶으니…….

석주가 바닥에 엎어진 소쿠리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흙을 툭툭 털어 냈다.

“그래. 네가 나한테 성질부리길 바라는 것도 너무 염치가 없긴 하다.”

그가 아진이 닫고 들어간 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네.”

네 얼굴을 봤으니.

* * *

아진의 약이 줄었다. 병원에서 받아 온 약 봉투에는 날짜가 쓰여 있었는데, 이틀 전부터 알약의 개수가 줄었다. 동그란 알약을 반으로 부순 것이 없어졌다. 꽃님의 약은 그대로였는데, 아진의 것만 줄었다.

처음엔 그저 좋았다. 약 먹는 건 몹시 번거롭고 힘든 일이라. 하나 준 것만으로도 그 부담감이 훨씬 덜했다.

근데 딱 이틀. 이틀만 좋았다.

몸이 추웠다 더웠다 난리였다. 오한이 드는데 식은땀이 계속 났다. 그러다 참을 수 없이 더워지고, 옷을 벗으면 또 추워졌다. 아랫목에 납작 엎드려 이불을 뒤집어쓰면 다시 더워지길 반복했다.

여름의 더위. 겨울의 추위. 그런 것과는 달랐다. 피부 안쪽에서부터 얼음이 어는 듯하다가, 지글지글 끓는데 딱 미치기 직전이었다.

아진이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뒤틀자, 그와 데면데면하던 꽃님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져 색색 거칠게 호흡하는 아진을 추슬러 안았다.

“아진아.”

“흐…….”

“아진아. 왜 그래. 응? 어디가 아파? 어디가 아픈데? 어?”

그녀가 아진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진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멍하니 허공만 응시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꽃님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러다가도 돌연 아파 죽겠다는 듯 몸을 웅크렸다.

꽃님은 걱정을 하다못해 겁이 났다. 이렇게 아파하는 아진은 처음이라. 이번에 손목을 그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하얗게 질린 채로 잠만 잤지 아프다고 바닥을 구르진 않았다.

“아진아. 말을 좀 해 봐라. 어디가 아픈지 알아야 내가 뭘 하지. 감기야? 몸살? 어디? 배가 아파? 가슴이 아픈 거야? 아이고, 감기에 걸려도 차갑던 애가 왜 이렇게 뜨거워……. 무섭게…….”

어쩔 줄 모르고 허우적거리던 꽃님이 아진을 조심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구겨진 이불도 펴서 덮어 주고는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그녀는 복도를 내달려 곧장 석주의 방으로 향했다. 제가 죽기 전까지 제 발로 석주를 찾아갈 날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지금, 지금 당장 그가 필요했다.

꽃님은 긴 복도를 달리며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통각을 느꼈으나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두드리고 말고 할 것 없이 벌컥 문을 열었다.

허나 석주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평일 대낮. 막 점심시간이 지난 시점에 석주가 집에 있을 리 없었다.

“아이고, 어쩌나……. 이를 어쩌나…….”

꽃님이 제자리에서 동동 발을 굴렀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녀가 부엌으로 몸을 돌렸다. 누구든 사람을 찾아야 했다.

다실을 지나 부엌 샛문을 열자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보였다. 누구 하나 아는 이가 없었는데, 꽃님이 거기다 대고 빽 소리를 질렀다.

“강 사장! 강 사장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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