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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28화 (128/261)

128화

아진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맞은편 침대에 누운 꽃님은 피곤한지 이미 잠이 든 듯했다.

아진도 피곤했다. 의사에게 온갖 당부의 말을 다 들었으며, 병원에서 퇴원했고, 생전 처음 차를 타 봤고, 꽃님과 무언의 신경전을 펼쳤으며, 어색한 방에 적응하느라 진을 다 뺀 상태였다.

헌데 어째서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아진은 침대에 누워 멀거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왜 잠이 안 오지, 고민하다 그 이유를 제가 누워 있는 곳에서 찾았다. 침대 때문이었다.

일평생 침대에 누워 잠을 잔 적이 없어서 구름처럼 푹신푹신한 잠자리가 영 적응이 안 됐다.

아진은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오른쪽으로 누웠다,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 덮었다, 배꼽까지 내리며 고요히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보내어도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사장님.’

‘응.’

‘사장님은 왜 침대 안 쓰세요?’

‘천성이 천민이라 침대에선 잠이 안 오더라고.’

‘지금 이런 집에 사는데 어떻게 천성이 천민이에요.’

‘…….’

‘천성이 양반이니까 그런 거지.’

‘…….’

‘사장님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 이제 제자리를 찾아온 거예요.’

괜히 떠오르지 말아야 할 추잡스러운 기억만 떠올랐다. 아진이 이를 꾹 짓씹으며 눈을 짓이기듯 감았다. 석주의 집에 있어서 그런가. 자꾸 석주가 떠올랐다. 이 방은 아진이 한 번도 들어오지 않은 곳인데, 어디 숨어 있었는지 모를 석주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튀어나와 아진을 할퀴어 댔다.

참다못한 아진이 벌떡 일어났다.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치미는 석주를 억누르던 그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바닥에 퍼질러 누웠다. 손을 포개 베개를 만들고, 다리를 모아 접었다. 아궁이에 장작을 넉넉히 넣어 둔 덕에 뜨끈한 바닥이 느껴졌다.

그것을 가만히 느끼고 있자, 신기하게 몸이 편안해졌다. 아진이 소리 없이 웃었다. 바닥이 이토록 편하다니. 저야말로 천성이 천민인 모양이다.

아진이 코로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번에야말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은 꿈은 꾸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얼른 이 고된 하루를 끝내고 싶었다.

그렇게 까무룩 꿈속으로 빠지려는 찰나였다.

끼이익, 끼이익…….

연약하지만 날카로운 소리가 아진의 귓구멍을 꿰뚫었다. 아진이 번쩍 눈을 떴다. 잠잠하던 심장이 펄떡펄떡 널을 뛰기 시작했다.

끼이익, 끼이익…….

마루가 밟히는 소리였다. 건장한 사내의 발소리. 하지만 석주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그의 것과는 분명 달랐다. 보폭도 좁았고, 발걸음도 빨랐으며, 석주보다 무게도 덜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가슴이 서늘하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텅 비어 있던 발목에 족쇄가 채워졌다. 그 묵직한 무게감에 발등이 지끈거렸다. 말뚝과 연결된 사슬이 팽팽하게 늘어져서 누가 몸을 뒤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곧, 뜨거운 체온을 가진 누군가가 아진의 등 뒤로 몸을 뉘었다. 커다란 손이 아진의 가슴을 감싸고, 홧홧한 입김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아진아…….’

낮은 목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왔다.

아진은 도망치고 싶었다. 달빛이 스미는 창호지 문 너머로 몸을 날리고 싶었다. 허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가위에 눌린 것 같았다. 아니, 실로 그러했다. 아진은 지금 눈을 뜬 채로 악몽을 꾸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던 아진이 억지로 눈을 감았다. 뻣뻣한 팔을 접어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데도 마루가 밟히는 소리는, 석주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흐윽…….”

아진은 끝내 울음 한 자락을 토해 내고야 말았다.

제 아픔을 뒤로 제쳐 두려 했는데. 꽃님을 위해서 무시하려고 했는데.

그 무시가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

아진은 꽃님의 앞으로 간을 잘 먹인 떡갈비를 밀어 주었다. 그러나 꽃님은 그것을 본 체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치를 보며 밥을 깨작거리던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고기반찬이 접시 위로 수북이 쌓여 있고, 미역국도 숟가락만 넣으면 고기와 야들야들한 미역이 딸려 오고, 살이 쫀득한 생선구이에, 간을 잘한 나물 반찬들까지. 평생 몇 번 받아 보지 못할 만큼 귀한 밥상인데 어째 입맛이 돌지 않았다.

어젯밤 내내 잠을 설친 터라 눈 밑이 거뭇거뭇한 아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줌마. 나랑 말 안 할 거야?”

“…….”

“계속 나 미워할 거야?”

꽃님은 대답이 없었다. 한 고집 하는 그녀다웠다. 아진은 큰 미련 없이 그녀와 대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라, 뭐. 그래도 나는 아줌마 계속 좋아할 거다.”

부러 함박웃음을 지은 그가 밥을 크게 퍼먹었다. 목구멍이 꽉 막혀서 밥알이 도무지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삼켜 냈다.

아진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볍게 세수를 하고, 어질러지지도 않은 방을 청소한다. 그 후 꽃님과 아침 식사를 하고, 그녀에게 한 주먹이나 되는 약을 먹이고, 제 약도 챙겨 먹었다.

그 후엔 시간이 텅- 빈다. 답답하고 심심한 마음에 괜히 공책에다 글을 끄적거리다가, 제 팔자에 이런 거 해서 뭐 하나 싶어 연필을 던지곤 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창호지 문밖 마당이 소란스러워졌다. 조직원들이 출근하는 시간이었다. 아마 석주 역시 그 무리에 끼어 있으리라.

아진은 문 앞에 앉아 숨을 죽이고 있다가, 차 엔진 소리가 요란해졌다가 사그라지면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방 안을 환기하고, 방 앞 마루도 닦고, 댓돌 위에 올라온 나뭇잎도 털어 낸다. 그리고 행여 누가 볼까, 부리나케 방으로 되돌아온다.

그 후 아진은 절대 바깥에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다. 찰나라도 석주와 마주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이따금,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으면 슬쩍 마루에 나가 앉곤 했다. 꽃님과의 냉전에, 제 발로 들어와 있음에도 갇힌 듯한 기분에 생전 처음 찬 바람이 고팠다.

그래서 자정 전후, 마루로 나갔다. 조직원들도 모두 잠이 들어 고요해진 마당을 보며 멍하니 있다가 추위를 못 참게 되면 돌아오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꽃님의 이불을 올려 주고, 바닥에 멀거니 누워 있다가 나온 참이었다. 근데 웬 소쿠리 하나가 마루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낮에 잠깐 청소하러 나왔을 땐 없던 것인데. 누가 잘못 둔 것인가, 생각하며 소쿠리 안을 들여다보는데. 내용물이 묘하게 익숙했다.

초콜릿. 콜라 두 병. 동글동글한 매실. 정체 모를 미국 과자. 그 밖에도 이런저런 간식거리가 수북했다.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소쿠리는 누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누가 갖다 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가 어떤 이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진은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왔다.

소쿠리는 일주일 내내 마루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아진이 치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가 매일 새로 갖다 놨다. 내용물이 매번 바뀌었다.

약과. 복숭아 통조림. 초콜릿. 산딸기. 과자. 사탕. 꽈배기. 양갱. 별의별 것이 다 있었다.

수북이 쌓인 간식거리를 보고 있으면 “지랄하네…….”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진은 소쿠리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것을 가져다 둔 이의 성의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꽃님과 크게 다투었다.

밤이 되고, 아진은 꽃님에게 약을 먹이고 그녀의 잠자리를 돌봐 주었다. 꽃님은 점점 잠자는 시간이 늘었다. 예전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는데. 요즘엔 일찍 자고 아침 밥상이 올 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기다 낮잠도 잔다.

걱정이 되긴 하지만,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하는 걸 보고 있는 것보다야 자는 걸 보는 게 훨씬 나아서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아진은 꽃님을 뉘고, 방에 불을 끄고, 자신 역시 침대에 누웠다. 그 후 손을 베개 아래에 넣고 자는 척을 했다. 꽃님이 깊은 잠이 들면 바닥으로 내려가려는 심산이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자정이 다가올 무렵. 아진이 일어나기 위해 이불을 들쳤을 때였다.

“나가자. 지금이라도 안 늦었다.”

꽃님의 거친 목소리가 어둑한 정적을 뒤집었다. 아진이 흠칫 몸을 떨었다. 오랜만에 입을 떼서 하는 말이 뭔가 싶었더니. 또 그 소리다. 아진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어둠 속에 숨은 꽃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나가.”

낮게 잠긴 그의 음성은 짧고 단호했다. 보이진 않았지만, 꽃님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치켜뜨는 게 훤히 상상됐다. 그러든 말든, 아진은 밉살맞게 고집을 이어 갔다.

“나는 여기가 좋아. 제일 좋아. 침대도 있고, 바닥도 따뜻하고, 삼시 세끼 고기반찬에 밥도 줘.”

“그거 좀 없으면 어떠냐.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걸 누리고 살았다고.”

그 말에 아진이 눈을 꾹 감았다. 꽃님이 말하는 모든 문장이, 모든 단어가 짜증이 났다. 손을 꾹 말아쥐며 짜증을 삼키던 그가 끝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라도 좀 누리면 안 돼? 지금부터라도 편하게 살면 안 돼?”

“아진.”

“우리는 천것들이니까 평생 일하고, 바닥에 이불 깔고 자야 해? 남이 해 주는 밥상 같은 거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야?”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거지. 그 이유로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지.”

꽃님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단 한 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진이 절뚝절뚝 어둠을 헤치고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창호지 문으로 스미는 달빛 덕에 꽃님의 모습을 어슴푸레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팔과 다리를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힘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아진이 그녀를 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줌마. 나 되게 아팠어. 되게 슬프고, 되게 무서워서 내 손목까지 그었어. 죽겠다고.”

“…….”

“그거 보상받겠다는 게, 사장님 돈 좀 털어먹겠다는 게, 뭐 그리 아니꼬워?”

그 말에 꽃님이 팩 고개를 돌려 아진을 올려다봤다.

“사장 돈 털어먹는 기분이 좋으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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