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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27화 (127/261)
  • 127화

    아진은 현관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있는 방 중 가장 첫 번째 방을 쓰게 되었다. 현관으로 들어와 모퉁이만 꺾으면 바로 있는 방이었다.

    집 왼쪽에 있는 석주의 방과는 제법 거리가 됐으나, 직선상에 놓여 있어서 복도 사이나 기둥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그래도 석주가 으레 돌아다니는 다실이나 중정과는 전혀 닿지 않는 위치에 있어서 의도하지 않는 이상 그와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방은 별것 없었지만, 필요한 건 다 있었다. 둘이 쓰기엔 충분할 정도로 컸고, 새것으로 보이는 침대 두 개가 있었으며 작은 책장과 책상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뾰족하게 잘 깎인 연필이 통에 한가득 들어 있었으며, 책장에는 설화집이나 중학교 교과서 따위가 가지런히 꽂힌 채였다.

    농은 나무에 기름을 잘 들여 반질반질하게 빛났고, 그 곁엔 방울꽃 모양의 조명등도 있었다.

    아진이 꽃님을 부축해 침대에 앉히는 동안 명진은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일은 안 해도 돼. 밥은 때맞춰 알아서 무러 가도 되고, 달라고 캐도 되고. 이 집에 있는 누구든 간에 아진이 니 부탁을 귀찮아하지 않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라, 알겠재?”

    “네.”

    “니도 알 것 같긴 한데, 아궁이는 요 방 바로 아래에 있다. 불 때는 사람이 있긴 한데, 아진이 니는 추위를 많이 타니까, 필요하면 니가 직접 장작 넣어라. 장작은 다 패다가 옆에 쌓아 놨으니까.”

    “네.”

    “그리고 뭐……. 니도 이 집 어디에 뭐가 있는지 속속들이 아니까 따로 설명해 줄 건 없네. 궁금한 거 없재?”

    “네, 없어요.”

    아진이 꼬박꼬박 고개를 끄덕였다. 명진의 말마따나 이 집 구조는 훤히 꿰고 있었다. 부엌에 있는 숟가락 개수는 물론, 지붕을 받치고 선 기둥 개수까지 알았다. 설명은 불필요했다.

    “그래…….”

    명진이 엄지와 새끼만 남은 손 중, 엄지로 자신의 턱 아래 흉터를 벅벅 긁었다. 여기저기로 나다니는 눈동자가 어색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본인은 아진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겸연쩍은 모양이었다.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은 그가 손을 등 뒤로 보내 뒷짐을 졌다.

    “점심 무야지? 바깥에서 묵는 건 불편하겠재? 방으로 밥상 들라 할게.”

    “……감사합니다.”

    아진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의 검은 머리칼이 앞으로 사라락 넘어갔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이, 우리 사이에 감사는 무슨. 푹 쉬라.”

    명진은 아진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고는 방을 나왔다. 방문을 닫기 전, 씨익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진이 옅게 입꼬리를 당기며 그 웃음에 화답했다.

    방문을 꼼꼼히 닫은 명진이 땅이 꺼지라 푹 한숨을 내쉬었다. 비쩍 마른 아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그가 재차 턱을 긁으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석주의 방으로 향하는 거였다. 안절부절못한 채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해서.

    헌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석주가 떡-하니 서 있는 게 보였다. 이리저리 서성거리는 꼴이 아내의 출산을 기다리는 서방 같은 모습이었다.

    명진을 발견한 그가 냉큼 다가왔다.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쓸데없이 저돌적이었다.

    “아진이는?”

    그가 다급하게 물었다. 명진이 그를 지나쳐 걸었다. 아진의 방과 조금 거리를 두기 위함이었다. 그가 걸으며 대답했다.

    “잘 들어갔지요. 뭐 마당에서 방까지 들어가는 길에 괴한이라도 만났을까 봐요.”

    “잘 들어갔다는 게 무슨 말이야? 더 자세히 말해 봐.”

    “아니, 형님. 저 아진이 방에 3분 있었습니다. 자세히 말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그냥 밥 언제 물래,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라, 그카고 나왔다니까요.”

    “그래서? 아진이가 뭐래?”

    “네, 네, 하고 감사합니다, 하던데요.”

    “기분은 어때 보이던?”

    “개-좆같아 보이던데요.”

    “…….”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잘생긴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솟구쳤다. 명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이었다. 거듭 한숨을 내쉬던 명진이 대청마루 앞에 멈춰 섰다.

    “그라면 아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고. 우울해 보이고, 슬퍼 보이고, 버거워 보이고, 그렇습니다. 꽃님이 아지매도 여기 온 게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닌지 입을 꾹 다물고 있고예.”

    “……그래.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지. 석주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그가 기둥 사이로 언뜻 보이는 아진의 방문을 흘끔거렸다. 그러다 그렇게 보는 것도 죄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명진이 그런 석주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멋진 얼굴이 많이 상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고, 신체적으로는 물론 마음고생도 보통 한 게 아니어서 매우 피곤해 보였다. 피부도 거칠고, 흰자위도 붉었다.

    “아진이는 괜찮을 겁니다. 그러니 형님도 좀 쉬셔야지요. 경찰서에서 나오신 이후로 제대로 눈 붙이시는 걸 못 봤습니다. 내내 병실 앞에 계시고…….”

    “응, 그래야지.”

    석주가 자신의 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명진이 그와 발을 맞춰 걸었다. 헌데 어째, 석주의 입가에 드문드문 미소가 스몄다가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는 마음이 미어진다는 듯 슬픈 얼굴이더니. 금세 또 웃는 게 이상했다.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명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좋다. 파렴치하게도, 좋아.”

    석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아진이 때문에요?”

    “그래. 아진이가 내 집에 있어서. 우울한 아진이든, 슬픈 아진이든, 어쨌든 내 집에 있어서 좋아. 좋으면 안 되는 걸 아는데.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당장은 내 곁에서 떠나보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우연히라도 그와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듯해 좋다. 석주가 엄지와 중지로 자꾸 솟구쳐 오르는 입꼬리를 꾹 아래로 눌러 내렸다. 그런데도 고집 강한 입술은 계속해서 호선을 그려 댔다.

    그 천치 같으면서도 양아치 같은 모습에 명진이 쯧쯧 혀를 찼다.

    “하이고, 아진이가 알면 기겁하고 뒤집어지겠네요.”

    “그렇겠지. 사장님 미친놈이에요? 그러겠지.”

    석주가 욕만 하면 유달리 카랑카랑해지는 목소리를 상기하며 웃었다. 이전에는 그렇게 욕을 잘하더니. 요즘엔 통 해 주지 않는다. 온전히 무시만 가득해서, 그게 염치없게도 아쉬웠다. 욕을 들어 먹더라도 그의 목소리가 그립고, 그와 대화하던 순간이 그리운데.

    석주가 어깨로 명진의 팔뚝을 툭 쳤다.

    “괜찮아. 너만 입 다물면 아진이가 아는 일은 없을 거니까.”

    “예, 제가 뭐 아진이한테 쪼르르 가서 형님 욕이라도 하겠습니까.”

    “응, 알아. 안 그럴 거.”

    “아진이가…… 그리 좋으세요?”

    “응.”

    석주가 찰나의 주춤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자신의 방문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후회와 한탄, 자괴감, 죄책감, 반성, 뉘우침 따위가 마구 점철된 독백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야, 난 아진이를 오해하고 있을 때도 그 아이를 좋아했어.”

    “…….”

    “그래서 도둑질이나 배신을 운운하면서도 팔을 자르거나, 죽이거나, 쫓아내지 않고 부득부득 곁에 잡아 뒀지.”

    “…….”

    “걔가 자는 것도, 우는 것도 다 내가 직접 봐야 했어. 그래서 큰일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매일같이 집에 일찍 들어왔다. 내가 집에 없는 동안 허튼짓을 하는 게 아닌가, 도망치면 어쩌나, 불안해서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나는 그냥 그 아이가 보고 싶었던 거야.”

    석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젠가 이순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진이만 사랑했다면 속일 필요도, 속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아진이가 무얼 하든 그게 정의고 이치가 될 테니까.’

    곱씹을수록 맞는 말이었다. 제가 그를 이토록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석주가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이어 갔다.

    “그냥 용서해 줄 걸 그랬어. 아진이 너니까 다 없던 일로 해 주마. 네가 무슨 짓을 했대도 나는 여전히 네가 좋다.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

    “그럼 쉬웠을 텐데. 아진이가 아파할 일도, 울 일도, 죽음을 갈망할 일도 없었을 텐데.”

    “…….”

    “내가 오해했다는 게 밝혀졌어도, 사과하기가 훨씬 쉬웠을 텐데. 널 의심한 건 미안했다. 그래도 널 사랑했어. 너도 알지? 그렇게 뻔뻔하게 밀고 나가기라도 했을 텐데 말이야.”

    석주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의 상박이 두툼하게 부풀었다. 후회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무너지고 깨진 아진에게는 특히. 석주가 만들어 가야 하는 건 앞으로의 미래였다.

    방문 앞에 다다른 석주가 돌연 휙 몸을 돌렸다.

    “부엌에 가 봐야겠다.”

    “배고프십니까? 그럼 제가 얼른 가서-”

    그를 배웅하려던 명진이 흠칫 어깨를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석주가 턱을 가로저으며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아니. 나 말고, 아진이 밥상 좀 보러. 의사가 잘 먹어야 한다고 했어. 고기 많이 먹이라더라.”

    “…….”

    “내일 회사 다녀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야겠다. 고기를 좀 넉넉히 사야겠어. 의사가 미역도 좋다던데. 고기를 잔뜩 넣어서 미역국을 끓이면 아진이가 잘 먹을 거야. 건더기 많은 국을 좋아하거든. 아, 사골. 사골도 사고. 가마솥에 밤새도록 푹 달여 먹여야지.”

    명진의 입매가 해괴하게 뒤틀렸다. 매분마다 기분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석주가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뭐 돼지 키우십니까? 아니면 씨름 선수라도?”

    “아진이가 돼지처럼 피둥피둥해지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돼지 키우시는 게 맞구나.”

    명진이 쯧쯧 혀를 찼다. 비아냥이 분명한데, 어째 그의 입가에도 은근한 웃음이 스며 있었다.

    석주가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게 좋았다. 평생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외로워도 외롭지 않은 척 살아온 이라서. 근데 아진 덕에 그 감정들이 만개했다.

    아마 지금 저 상태도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거겠지만. 그러다 가끔 마음이 폭발해서 비죽비죽 고개를 들이미는 거겠지만. 어쨌거나 반가운 변화였다.

    “근데 저도 고기 억수로 좋아하는데요, 형님.”

    저는 돼지 말고 씨름 선수로 키워 주십쇼. 예? 형님? 아, 형님! 명진이 바쁘게 석주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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