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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25화 (125/261)

쌍피 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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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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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

아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장님이 뭘 잘못했는데요,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하면서 친절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저도 제가 하지 않은 일로 석주에게 울며 사과하고 빌었었는데, 뭐.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하는 심술에서였다.

“차가워도 조금만 참아. 열 좀 식히고, 의사한테 가 보자.”

석주가 아진의 손가락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부엌은 어둡고, 빛이라곤 좁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다여서 손이 얼마나 다친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플 터다. 뜨거운 물방울 하나만 튀어도 종일 신경 쓰이지 않나. 더군다나 손가락이니 덧나기도 쉬울 터였다.

아진의 고통을 곱절에 곱절로 부풀려 가늠하는 석주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는데. 아진이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뭐 이런 거로 의사를 봐요.”

“그래도. 가 보자.”

“그거 다 돈이잖아요.”

“너한테 내라고 안 해.”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100만 원 갚으라고 그렇게 저를 괴롭힐 땐 언제고. 지금은 또 이렇게 말한다. 오해 때문에 비롯된 일임을 알지만, 그래도 짜증은 났다.

아진의 숨소리에 신경질이 섞이는 걸 알아차린 석주가 그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조곤조곤 말했다.

“다시는, 안 그래. 안 그럴 거야. 네가 내 집을 홀라당 태워도 물어내라는 소리 안 할 거다.”

“…….”

“그러니 돈 걱정하지 말고 의사한테 가 보자. 흉 지면 어째.”

아진이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석주와 말씨름을 하는 게 피곤했다. 그가 물러나 줄 이가 아님을 알았다. 그냥 제가 먼저 물러나는 게 편했다.

석주는 아진의 손을 조심히 헹궈 냈다. 손톱을 쓰다듬고, 손바닥과 손등을 매만지고, 마디마디를 쓸어내리는 손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차가운 물에 아진이 손끝만 꿈틀거려도 “아파?” 하고 걱정스레 물었다. 아진이 한껏 집중한 석주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뭘 그렇게 조심히 다뤄요. 그냥 손인데.”

그에 석주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낯으로 대답했다.

“네가…… 깨질까 봐 겁나.”

아진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다 한쪽 입꼬리를 당기며 연하게 웃었다. 조소였다.

“사장님.”

“어?”

“저는 이미 깨졌어요.”

“…….”

석주가 우뚝 굳었다. 규칙적으로 이어지던 그의 숨소리 역시 뚝 끊겼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흩어질 듯 산란했다.

아진이 그런 석주를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깨질 대로 깨지고, 부서질 대로 부서져서, 당신의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못해. 당신의 사과가 불편해. 당신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게 지독히도 괴롭고, 당신이 주는 마음이 짐처럼 무겁기만 해.

산산이 조각난 나는 모든 파편이 날카롭고 모나서, 끊임없이 당신을 찔러 댈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날카롭게 벼려진 부분들이 마모될 수도 있겠지.

허나 그렇다고 한들, 세상에서 당신의 품이 가장 편안하던 그때로, 우리가 마주 보고 웃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던 그때로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깨진 모습 그대로 세상을 나뒹굴 것이다.

근데 또 모르지. 다시 태어나면 온전한 모습이 될 수도. 옥황상제가 내 피를 뒤집어쓴 나를 불쌍히 여겨 잘 빚어 줄지도. 그래서 당신의 진심을, 마음을 그저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번 생에는 아니다.

“갈래요.”

아진이 석주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리고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손을 바지춤에 슥슥 대충 문질러 닦았다. 허벅지가 차가워지는 기분이 참…… 별로였다.

아진은 커피를 타서 병실로 돌아왔다. 석주가 이번에야말로 쟁반을 본인이 들겠다고 울다시피 요청하기에, 못 이기는 척 건네주었다. 괜히 제가 고집스레 들고 가다가 엎으면 또 석주가 야단을 떨 것 같아서.

절뚝절뚝 힘겹게 병실로 돌아온 아진이 문을 열었다.

“아줌마, 나 왔어.”

그리 말하고는 뒤를 돌아 석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만 쟁반을 달라는 뜻이었다. 근데 어째서인지 석주가 꿈쩍도 않았다. 아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채근했다.

“줘요.”

“…….”

석주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아진의 어깨 너머 어딘가에 박혀 있었다. 아진이 무심코 그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꽃님이 있었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꽃님이.

“……아줌마?”

아진이 붕 뜬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 *

“위독합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거예요.”

의사가 검지로 무테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지나치게 표백된 그의 하얀 의사 가운이 눈을 따끔하게 찔렀다.

그래서 아진은 연신 눈살을 찌푸렸다가 떠야 했다. 의사의 말도 짜증이 났다. 가뜩이나 무식해서 뭐라고 하는 건지 못 알아듣겠는데, 빙빙 둘러 말하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곧 세상을 뜨실 거란 뜻입니다.”

“왜요? 수술하면 되잖아요? 여기 병원인데. 수술하고 약 먹고 그럼 되잖아요. 요즘은 어떤 큰 병도 고칠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근데 왜 죽는다고 말해요. 우리 아줌마가 양반이 아니라서 안 고쳐 주는 거예요?”

아진이 의사를 대차게 노려보며 말을 쐈다. 흥분한 그의 광대에 불그스름하니 분노가 채였다. 의사가 두 손을 흔들었다.

“아니요, 아니요. 보호자분. 흥분하지 마시고, 이게 재수술을 할 순 있는데……. 수술 후에도 나을 거라는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허리를 꼿꼿이 편 그가 의사를 직시하며 말했다.

“수술할 거예요.”

그 말에 의사의 입매가 께름칙하게 뒤틀렸다. 꽃님의 수술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가 재차 안경을 올렸다.

“수술하는 데 돈도 한두 푼 드는 게 아니거든요. 정확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최소 3만 원에서 5만 원까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돈 타령에 아진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엔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석주가 앉아 있었다.

“사장님이 돈 내주세요.”

아진은 몹시 당당하고, 몹시 뻔뻔하게 요구했다. 5만 원이면 매우 큰 돈이다. 아진이 일해서 버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그러나 석주에겐 푼돈일 터였다. 또한 석주는 그 돈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한 잘못을 아진에게 저질렀고.

아진은 이 정도 돈은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석주가 싫다고 하면 제가 그에게 강제로 팔았던 몸값을 하나하나 세어 배로 부풀려 받아 낼 생각이었다. 드문드문 기억이 끊겨 확실하진 않지만, 가랑이가 헐 정도로 그를 받아 냈으니 5만 원은 되겠지.

석주가 아진의 굳센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진이 보란 듯이 턱을 올리며 의사를 쳐다봤다. 봤지? 됐지? 우리 돈 많아.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책상 위로 두 손을 깍지 낀 그가 아진과 달리 차분한 음성으로 조곤조곤 말했다.

“그래도 저는 수술을 추천해 드리지는 않습니다.”

“왜요?”

“환자분 나이도 있고, 상태도 좋지 않아서 수술하다가 사망할 수도 있어요.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이걸 쉽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게, 차가운 수술방에서, 가슴을 칼로 째서 벌린 채로 죽는 거예요. 그렇게 죽고 싶어 하는 사람,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적나라한 말에 아진이 흠칫 굳었다. 그의 큼지막한 눈동자가 비바람에 휘청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나풀거렸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석주가 그런 아진을 불안하게 쳐다봤다. 아진의 심신도 온전치 못한데. 제가 갈가리 찢어 놓아서 이미 넝마 짝인데. 그 와중에 충격적인 소식까지 연달아 듣고 있으니……. 지금 보통 괴로운 게 아닐 터였다.

아진의 손이 꿈지럭꿈지럭 움직였다. 석주는 그의 손을 잡아 주고 싶었지만, 기댈 곳이 되고 싶었지만, 그럴 자격이 되지 않아 잠자코 있는 중이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아진의 입매에 아집이 스몄다. 주먹을 꽉 움켜쥔 그가 단호히 일갈했다.

“그래도 할래요.”

의사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보호자의 고집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환자분 눈 뜨면, 그때 다시 이야기 나눠 보죠.”

“돈 있고, 수술할 수 있으면 하는 거지. 아줌마 의사가 왜 중요해요?”

아진이 부리나케 따지고 들었다. 꽃님은 거부할 것이다. 아픈 게 싫다고, 돈이 많이 든다고, 병원이 답답하다고, 온갖 이유를 만들며 싫다고 할 게 분명했다. 아진은 한 똥고집 하는 그녀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강제로라도 수술실로 보내야 했다.

그래야 꽃님이 사니까. 그녀를 이렇게 보낼 순 없으니까.

눈을 홉뜬 아진이 의사를 태워 죽일 듯 노려보는데. 이미 수없이 많은 죽음을 접해 어느 경지에 오른 의사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특유의 잔잔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아진을 타이를 뿐이었다.

“보호자라도, 환자분이 눈을 감을 장소까지 정해 줄 권리는 없어요. 그건 환자 본인이 선택할 일이지요.”

진료실을 나온 아진이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뇌에 쥐가 나는 것 같았다. 목구멍은 답답하고, 달리기 출발선 앞에 선 것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런 아진의 뒤로 석주가 따라붙었다. 병실 밖에서 기다리던 조직원들이 꽃님의 소식을 궁금해하며 다가왔지만, “나중에.”라는 말로 가볍게 밀어냈다.

아진은 꽃님의 병실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무릎과 발목이 지끈거렸으나 그런 것 따위 지금은 하등 중요치 않았다.

“우리 아줌마 언제부터 몸이 이렇게 안 좋았어요?”

아진이 앞을 응시한 채 물었다. 석주에게 향한 질문이었다.

“……처음부터.”

석주가 순순히 진실을 말했다. 아진이 그를 휙 뒤돌아봤다.

“처음? 처음이요? 그 처음이 언젠데요?”

“병원에 처음 왔을 때부터. 심장이 많이 안 좋았어. 의사가 지금이랑 비슷한 말을 했었고. 근데 꽃님이 아줌마가, 네가 몰랐으면 한다고 부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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