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그, 그래서? 사장님이 아줌마한테 해코지 안 했어? 때리거나, 가두거나 그랬어? 맞았어? 어? 맞은 거야?”
아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가 뒤늦게 꽃님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뺨이나 입가를 들여다보고, 병원복 팔을 걷어 어디 다치진 않았나, 멍이 들진 않았나 확인했다. 그 부산스러움에 꽃님이 귀찮다는 듯 팔을 털어 냈다.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피 질질 흘리는 옆구리 잡고 갈 곳 있다면서 사라졌어. 나중에 듣기로는 중호파 깨부수러 갔다더라.”
“…….”
“근데 일이 어떻게 됐는지, 며칠 내내 안 보이더라고. 중호파 놈들한테 뒤졌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야. 저렇게 멀쩡하게 나다니는 거 보면.”
꽃님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아진이 긴장으로 올리고 있던 어깨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침대에 풀썩 누워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줌마가 나보다 낫네.”
“내가 뭐든 멍청한 너보다 못한 게 있겠냐.”
꽃님이 침대 위로 흩어진 아진의 머리칼을 연신 빗어 넘기며 대답했다. 아진이 “그렇지, 그렇지. 우리 아줌마 똑똑하지.” 하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 석주에게 받은 물건 하나가 떠올랐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침대 옆 협탁 서랍에 처박아 둔 것.
아진이 팔을 길게 뻗어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 든 것을 꺼냈다. 검고 반질반질한 총이 하얀 침대 위에 놓였다.
“이게 뭐야.”
기겁한 꽃님이 얼른 총을 집어 들었다. 아진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장님이 이거 줬어. 이걸로 자기 쏘래.”
“그래? 옳다구나 하며 쏴 버리지.”
“그러게. 쏴 버렸어야 했는데. 좀…… 무섭더라고.”
“뭐가? 사람 죽이는 게?”
“몰라. 그냥 다 무서웠어.”
아진이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짙은 한기가 느껴졌다. 그가 뭉쳐져 있던 이불을 대충 펴서 몸을 덮었다. 협탁 위에 총을 내려놓은 꽃님이 이불을 당겨 아진의 발까지 가려 주었다.
“그래. 네 손에 피 묻힐 거 뭐 있냐. 사람 피, 그거 다 업보로 남는다. 다음 생까지 갖고 가야 해.”
“정말? 나 내가 내 손목 그었는데? 피 엄청 많이 났어. 그것도 업보야? 나 다음 생에도 다리 병신으로 태어나는 거 아니야?”
아진이 불안한 낯으로 와다다 말을 쐈다. 그에 꽃님이 철썩 아진의 엉덩이 한쪽을 후려쳤다.
“그거는 다르지, 이놈아!”
“아! 왜 때려.”
“그거는 염라대왕도 이해해.”
“이해한다고? 아줌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는 사람이야? 염라대왕?”
금세 멀쩡해진 아진이 키득거렸다. “이놈이…….” 꽃님이 그의 말랑한 볼을 잡아 비틀었다. 그러다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홀쭉해진 아진의 얼굴이 영 밉고 아쉬웠다. 아진의 얼굴은 살이 피둥피둥 오르고, 윤기가 흐를 때 훨씬 빛나는지라.
“아무튼 그건 괜찮아. 남의 피만 안 묻히면 돼. 그러니 강 사장이 또 총이나 칼 같은 거, 응? 그런 거 주면서 너한테 자기 죽이라 하거든, ‘내가 왜요. 그냥 어디 가서 알아서 뒤지세요.’ 그래라. 알았지?”
“흐흐……. 그럴게.”
아진이 푼수처럼 웃었다. 참 반가운 조언이 아닐 수 없었다. 자꾸 미안하다며 다가오는 석주가 부담스럽고 싫었는데. 이제 ‘알아서 뒤져 버려요! 내가 그것까지 정해 줘야 해요!’라고 소리치면 되지 않나. 그럼 염라대왕에게 밉보일 일도 없을 것이다. 딱 좋은 대답이었다.
어깨까지 이불을 당긴 아진이 꽃님을 빤히 올려다봤다. 꽃님은 제가 다치고 살이 빠진 게 몹시 걱정된다고 했지만, 사실 진짜 걱정해야 할 사람은 꽃님이었다.
꽃님은 그저 살만 내린 게 아니라, 쇠약해졌다. 분명 사지도 멀쩡해 보이고 상처도 없는데 길 가다 풀썩 쓰러질 것 같은 행색이었다.
아진이 자신의 볼을 쓰다듬던 꽃님의 손을 채 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이불 속으로 가져가 조물조물 주물렀다.
“아줌마는? 괜찮아?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병원에 있어 봐라. 가만히 있어도 살이 줄줄 내린다.”
“그래도……. 너무 빠졌는데…….”
“괜찮아. 유난 떨지 마. 너 퇴원할 때 같이 퇴원할 거니까.”
“아줌마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잖아.”
“병원 밥 별로야.”
“맛만 좋던데, 무슨……. 물론 아줌마가 해 준 밥보다는 못하지. 그래도 뭘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아아, 커피 타 올까? 사카린 많이 넣어서?”
아진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움직이려는 듯 침대 아래로 발을 떨어트렸다. 어젯밤에는 영 못 걷겠더니.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낮에는 의사가 주는 약까지 먹고 나니 움직일 만했다.
의사가 준 약은 새끼손톱보다 작았는데, 먹으니 정신도 몽롱하고 잠도 오기에 낮잠을 푸지게 잤다. 그렇게 잘 쉬었더니 이제 느리긴 하나 걸을 수 있었다.
그에 꽃님이 급하게 그를 만류했다.
“그냥 있어. 내가 다녀오마.”
“아니야. 내가 타 올게!”
“그 다리로 어딜 가. 됐어.”
“아줌마도 아프잖아. 쉬어, 쉬어.”
아진이 꽃님의 어깨를 눌러 내렸다. 그리고 병원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얇은 병원복 위로 외투도 걸쳤다. 꽃님의 걱정 어린 시선이 뒤통수로 닿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금방 다녀올게.”
쟁반에 유리잔 두 개를 올린 아진이 꽃님을 보며 빙긋 웃었다. 꽃님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에서 나온 아진은 앞을 바라보지 않고, 곧장 복도 벽에 붙어섰다. 그리고 어깨가 벽에 닿을 듯 말 듯 한 위치를 유지하며 절뚝절뚝 걷기 시작했다. 때때로 그의 손에 들린 유리잔이 위태로이 흔들렸다. 그럼 아진은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걷길 반복했다.
손목을 그은 손이 아직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 손으로 쟁반을 지탱해야 했는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여기서 잔을 깨 버리면 일이 많아진다.
아진은 유리잔에 정신을 집중하며 걸었다. 그런 그의 뒤로 커다란 인영 하나가 붙어 섰다.
“어디 가려고?”
석주였다. 늦은 밤인데 집에도 가지 않고 계속 병실 앞에서 죽치고 있던 석주.
“…….”
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석주의 존재를 모른다는 듯 행동했다. 무례한 무시에 화를 낼 법도 하거늘, 석주는 그저 애타게 아진만 불러 댔다.
“아진아.”
낮은 목소리가 부르는 제 이름에 아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아마 대꾸해 주지 않으면 커피를 타서 돌아오는 내내 제 이름을 불러 댈 것이다.
“커피 타러요. 저기 복도 끝에 작은 부엌이 있어서…….”
아진이 대충 이유를 둘러댔다. 그에 석주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다녀올게.”
아진이 휙 쟁반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석주를 한껏 노려봤다.
“싫어요.”
“다리도 불편하면서……. 내가 금방-”
“다리 병신이니까 나다니지 말고 처박혀 있으라는 거예요? 아니면 내가 또 도망갈까 봐 그러는 거예요?”
“……아니야. 그런 거.”
“…….”
“미안해.”
석주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시금 그를 노려본 아진이 절뚝절뚝 복도를 걸었다. 석주는 어느 정도 그와 거리를 유지하며 그를 뒤따랐다. 아진은 그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침묵을 택했다. 그와 대화하는 게 더 불편한지라.
아진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간이 부엌에 다다를 수 있었다. 부엌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것이, 수도꼭지 하나와 작은 화로, 그리고 서너 가지의 싸구려 커피와 차 종류가 있는 게 다였다.
아진은 작은 주전자에 수돗물을 따랐다. 그 후 성냥불로 불을 피운 화로에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유리잔에 커피와 사카린을 퍼 넣으며 시간을 끌었다.
화롯불은 약했다. 한참 기다려도 물이 끓지 않았다.
아진이 든 티스푼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휘저었다. 불편해 죽을 것 같았다. 석주가 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는데, 숨이 다 막혔다.
제가 여기서 무슨 짓을 한다고. 손바닥만 한 창문에 몸을 비집고 도망치겠나, 수돗물에 코를 박고 죽겠나, 생각하다 문득 유리잔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 저걸 이용하면 죽을 순 있겠구나. 깨서 손목이든 목이든 찔러 버리면 될 테니.
석주를 쫓아낼 명분을 상실한 아진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벽에 기대어 섰다. 뭐 얼마나 서 있었다고 다리가 지끈거렸다. 그가 허공에다 발을 슬슬 터는데, 주전자에서 하얀 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진은 더 기다리지 않고 주전자를 들었다. 그리고 급하게 물을 따랐다. 갑작스레 콸콸 쏟아지는 물에 유리잔이 기우뚱, 한다 싶더니 철퍼덕 옆으로 넘어졌다. 뜨거운 물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것이 아진의 손가락과 손등을 사납게 할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앗, 뜨…….”
아진이 손을 접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주전자를 떨어트리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아 그건 또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러나 자신의 몸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발목이 꺾인다 싶더니 몸이 쑥 옆으로 넘어갔다. 뺨에 열기가 느껴졌다. 불이 시뻘겋게 올라온 화로가 아진의 머리를 삼키겠다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아진이 반사적으로 석주를 쳐다봤다. 이런 상황에 저를 구해 줄 이라곤 그뿐이어서. 제 평생 도움을 받았던 이라고는 그 하나여서.
근데 석주는 이미 제 앞에 와 있었다. 허리가 들린다 싶더니 기울어졌던 몸이 석주의 품으로 확 넘어갔다.
“조심해야지.”
석주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고는 뜨겁지도 않은지, 넘어진 유리컵을 맨손으로 세웠다. 그곳에서 흘러내린 물이 아진의 발치로 스멀스멀 세력을 뻗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석주가 아진을 바르게 세워 놓았다.
“하아…….”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아진이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손을 살폈다.
뜨거운 물에 덴 손이 벌써 붉게 변하고 있었다. 석주의 눈썹이 고통스레 일그러졌다. 더 일찍 움직였어야 했는데. 조금만 더 가까이 있을걸. 아무리 하찮은 상처라도 다친 건 아진이 아니라 저였어야 했는데.
석주가 하릴없는 후회를 반복하며 수도꼭지를 돌렸다. 찬물이 콸콸 쏟아졌다. 수압을 적당히 부드럽게 맞춘 그가 아진의 손을 물 안으로 집어넣었다.
“미안해. 내가 막을 수 있었는데. 부득부득 따라와 놓고 아무것도 못 했네.”
석주는 본인이 잘못하지 않은 일로 사과했다. 그 사죄에 한 치의 거짓도 없었으며, 망설임도 없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쌍피 124화
베스트 댓글
전체 댓글 보기
BEST
'제 평생 도움을 받았던 이라고는 그 하나여서.'
하...아진이가 이런 생각하는게 너무 슬퍼ㅠㅠ
평생 도움준 사람이 석주 하나고,
여태 살아온날중 자신을 가장 아프게 한 사람도 석주하나고...
아진이 인생에 석주놈은 '희로애락'을 전부 느끼게 해준 사람이구나..
eun***
2022. 11. 14. 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