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22화 (122/261)

122화

“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하실 거잖아요?”

“……아진아.”

“그리고 또 돈 주실 거예요?”

“…….”

“5천 원? 아니, 이번에는…… 100만 원? 그 정도 주시려나.”

“…….”

“그러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친절하게 제 이름을 부르실 거죠? 아진아, 아진아- 이렇게?”

“…….”

“사과도 사 주시겠네요.”

그 언젠가 소쿠리에 담겨 있던 사과를 떠올린 아진이 입꼬리를 실쭉거렸다.

“지금 사과는 전에 주셨던 여름 사과보다는 맛있겠어요. 저는 또 그걸 등신같이 맛있게 먹으면 될까요?”

적나라한 비아냥이었다. 몰염치한 인간이라면 그래도 내가 사과한답시고 준 건데 말을 너무 되바라지게 하는 거 아니냐며 화를 냈을 수도 있으나, 석주는 침묵을 택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과한다고 사과를 주며 시시덕거릴 만큼 하찮은 사안이 아니었다. 저도 멋모를 적이라 그런 거지. 다시 돌아간다면 그리 가볍게 굴지 않을 것이다.

석주가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쓴 침만 삼키는데. 건조하던 아진의 숨소리에 습기가 묻어났다. 석주가 얼른 그를 쳐다봤다. 눈가가 붉어진 아진이 눈동자 가득 눈물을 채운 채 저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흐…… 오해할 거리가 생기면…… 다시 제 뺨을 후려치실 거죠? 남창 취급하면서…… 흡, 손님이니 뭐니 하실 거죠?”

“아진아.”

울지 마. 그리 말하고 싶었는데, 울 일을 만든 장본인으로서 내놓기엔 너무 이기적인 말이었다. 석주가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안 그래. 다시 그럴 일 없어.”

“제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 아니, 왜 믿어야 해요! 흐……, 내일 되면 또 다를 줄 어떻게 알아요?”

“내가…… 믿어 달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떳떳하지 못하다는 거 알아. 그래도…….”

“그래도 뭐요!”

“울지 마…….”

석주는 참지 못하고 그 말을 내놓고야 말았다. 아진을 오해할 땐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보던 그의 눈물인데. 오늘은 유달리 아프고 쓰라렸다. 그땐 오해에 갇혀 아진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지금은 온전한 두 눈으로 그를 보고 있어서 그랬다.

아진이 우는 게 괴로웠다. 그의 슬픔이 제게 곱절로 스며 들어와 숨이 다 턱턱 막혔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말. 평생 단 한 순간도 체감한 적이 없는데. 지금 그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

울지 말라는 말에 아진이 눈을 부릅떴다. 입도 악물었다. 그런데도 눈물은 후두둑 후두둑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볼을 가로질러 그의 마른 손등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몹시도 무겁고 아팠다.

석주가 정자 아래로 내려갔다. 아진의 앞에 선 그는 거친 돌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진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아진아. 미안하다, 내가.”

고작 말뿐이지만, 반드시 해야 할 말이었으며 동시에 제 속죄의 시작이 되는 말이었다.

“잘못했어. 미안해.”

“으윽, 흐…….”

“당장 할 수 있는 게 말뿐이라 더 미안하다.”

아진이 석주를 내려다봤다. 짙은 밤임에도 일그러진 그의 만면이 참으로 잘 보였다. 그래서 지금 그가 하는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 진심이면 뭐.

아진은 진실된 사과라고 그것을 받아 줄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됐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동그랗게 말린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앙다물린 잇새로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갔다.

석주가 그 얼굴을 올려다보며 괴롭게 눈가를 찌푸렸다. 그의 마른 입술이 본인의 죄를 줄줄이 나열했다.

“널 믿었어야 했는데. 네 말을 들어 주었어야 했는데. 귀 닫고, 눈 감고 살아서 미안하다. 내가 감당해야 할 아픔을 다 네게 떠밀어서 미안해.”

“흐으…….”

“못된 말 한 것도 미안하고, 널 함부로 대한 것도 미안하고, 남창 취급한 것도 미안하다. 꽃님이 아줌마 못 보게 한 것도, 널 방에 가둬 둔 것도, 먹기 싫다는 약을 억지로 먹인 것도, 다 미안해.”

“……흑, 흐으으…….”

“그냥 그 모든 순간이 미안하다. 죄스럽고, 송구해.”

석주가 아진의 손을 조심히 거머쥐었다. 그리고 말린 손을 펴서 자신의 양 뺨을 쥐게 했다. 아진의 서늘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 순간에도 그 체온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석주는 아진에게 자신의 목을 바치는 것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그의 작은 손에 머리를 올려놓고 말을 이어 갔다.

“때려도 된다. 죽여도 되고. 네가 내리는 벌이면 뭐든지 받으마.”

그 말에 아진이 눈을 홉떴다. 커진 눈 아래로 눈물이 후두둑 낙하했다. 그가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가, 제가 사장님을 어떻게 죽여요!”

힘 차이가 이렇게 큰데. 제가 삼박 사일 석주를 두들겨 패도 그가 제 손에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제가 먼저 까무러쳐 죽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제 손목이 부러지겠지.

아진이 지그시 어금니를 씹었다. 석주가 저를 놀리는 건가, 싶었다. 서럽던 감정이 분노로 탈바꿈했다.

점점 또렷해지는 아진의 눈동자에 석주가 고개를 느슨히 옆으로 기울였다. 아진의 분노가 기꺼웠다. 그가 슬퍼하지 말고, 화를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흘리는 눈물은 제가 받아 줄 수 없지만, 그가 내는 화는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어서.

석주가 아진을 달래듯, 잔잔히 말했다.

“뭐든 해. 아무거나 해. 총 쏘기가 힘들면 칼로 쑤시고, 그게 어려우면 돌멩이라도 던져. 그럼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쉽게 죽어 줄 테니까.”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도 하고, 석주를 노려봤다가, 먼 도시로 시선을 돌렸다가,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무언가를 고민했다.

석주는 잠자코 그가 내릴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진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철썩, 석주의 뺨을 후려쳤다. 나약한 힘이었으나, 그 타격감은 제법이었다. 석주의 턱이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

그게 다였다. 석주는 아파하지도, 피를 흘리지도 않았다. 아진이 신경질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석주는 단 한 번의 손찌검으로 제 입술을 터트리고, 코피를 쏟게 하고, 넘어지게 했었는데. 나약한 저는 석주에게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아진은 오기가 생겼다. 이를 악문 그가 다시금 석주의 뺨을 내리쳤다. 철썩. 이번에는 전보다 소리가 컸다.

“…….”

석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몄다. 그래도 한 번 때려 봤다고 전보다 나아진 게 기특했다. 다음은 조금 더 잘 때릴 수 있을 듯했다.

석주가 이어질 체벌을 기대하며 눈썹을 위로 올리는데. 아진이 자신의 손을 감싸 쥐며 작게 신음했다.

“아…….”

맞은 건 석주인데 신음은 아진이 흘리는 게 이상했다. 허나 그럴 만도 했다. 석주는 싸움을 업으로 삼은 깡패였고, 아진은 기껏 해 봐야 비질이나 하고 그릇이나 닦던 인생이라. 거기다 며칠 내내 누워 있으면서 식사도 못 했다. 나약해진 몸뚱이는 맞은 것도 아니고 때린 것인데도 고통을 느꼈다.

“아파?”

맞은 석주가 되레 걱정스레 물었다. 아진의 손을 쥐고 손바닥을 살피기도 했다. 아진이 짜증스레 그의 손을 쳐 냈다. 그러자 석주가 또 속 뒤집는 소리를 해 댔다.

“그럼 발로 차.”

그 말에 아진이 하, 하고 실소했다. 그 반응에 석주가 눈알을 굴리다, 뒤늦게 붕대가 둘둘 감긴 발목을 발견했다. 걷는 것도 힘겨워하는 왼쪽 다리, 족쇄 때문에 상처가 그득한 오른쪽 다리. 아진은 발로조차 석주를 때릴 수 없었다.

석주가 본인도 답답하다는 듯 긴 한숨을 쏟아 냈다. 그러다 난데없이 큼지막한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화단과 길을 나누는 돌무더기에 있던 것인데, 석주의 손바닥에 가득 찰 정도로 커다란 크기였다. 제가 아프려면 뾰족하게 모난 것이 좋은데, 그것이 아진의 손을 아프게 만들 것 같아 적당히 동그스름한 것으로 골랐다.

석주가 그것을 아진에게 내밀었다.

“때려.”

“…….”

아진이 그 돌을 빤히 쳐다봤다. 저의 가녀린 손이나 불완전한 다리보다는 훨씬 좋은 무기였다. 이것으로 석주를 두들겨 패면, 저 멀끔하고 잘생긴 이마를 깨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피도 많이 나고, 흉도 남을 것이다.

근데 이상하지. 선뜻 그것을 받아 들 수가 없었다.

폭력을 기피하는 원초적인 성향인지, 아니면 피가 싫은 건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아진은 본인의 심정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반응 없는 그에 석주가 돌멩이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리고 꿇어앉은 무릎으로 아진의 앞에 더욱 바짝 다가갔다. 그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안 내켜? 저게 싫으면 뭘 해 줄까. 어떻게 해 줄까.”

석주는 답답해서, 안달이 나 한 말이었지만, 아진에게는 독촉이었고 채근이었다. 아진이 잠깐 멈추었던 눈물을 다시 쏟아 내기 시작했다.

“흐우으, 큽, 흑, 흐어어…….”

전보다 거칠고 통렬한 울음이었다.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오죽 서럽게 우는지, 뒤엉킨 호흡에 끅끅거리며 딸꾹질까지 해 댔다. 불규칙하게 튕기는 마른 어깨와 가슴에 석주는 제 심장과 폐가 찌그러지는 듯한 통각을 느꼈다.

“아진아……. 울지 마라…….”

“허어엉, 윽, 흐어어엉…….”

“제발. 아진아. 울지 마…….”

석주가 아진의 앙상한 무릎에 이마를 묻었다. 그가 눈을 질끈, 짓이기듯 감았다. 울 자격이 없는데, 저도 왈칵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그리고 앞으로를 생각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러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모르겠다, 나도.

정말 파렴치하고 무책임하게도.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어가 있는지 전혀 떠오르질 않는다.

기껏 해 봐야 네 손에 죽는 것인데. 고작 그것으로 네 서러움이, 네 분이 풀릴지 모르겠다. 죽는 건 내게만 좋은 일이어서. 결국은 내가 다시 널 버리는 꼴이라.

근데 네가 날 죽여서 분이 조금이나마 풀린다면, 얼마든지 죽고 또 죽을 수 있었다.

차라리 네가 내가 죽음을 명하면 좋으랴만.

답 없는 고뇌에 석주가 눈을 꾹 내리감았다. 그런 그의 뒤통수 위로 아진의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밀려왔다. 그 울음소리는 늦은 새벽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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