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
“그래. 미쳤다. 단단히 미쳤어.”
“…….”
“그러니 미친놈이 개짓거리를 하는구나, 생각해. 이 미친 새끼가 또 때리면 쏴 버려야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겨야지, 머리를 터트려 버려야지, 어차피 미친놈이니까 그렇게 뒤져도 상관없지. 그리 생각해.”
석주가 올라간 아진의 바짓단을 꾹꾹 눌러 내렸다. 그리고 찬 발을 크게 한 번 쓰다듬은 후, 아진이 들고 있던 총을 그의 바지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 후 뒤를 돌아 쪼그려 앉았다. 그의 널찍한 등이 아진의 앞에 놓였다. 비단 두루마기 위로 푸르른 달빛이 내려앉았다.
아진은 멀뚱멀뚱 그 등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에 석주가 뒤로 손을 까딱거렸다.
“업혀. 바깥에 나가자.”
“…….”
“낮에는 못 나가. 사람도 많고 차도 많아서. 나가고 싶으면 지금 나가야 해.”
“…….”
“얼른, 아진아.”
아진아. 그리 부르는 목소리가 몹시도 친절하고 감미로웠다. 아진은 순간, 정체 모를 아지랑이가 정수리를 통해 흘러 나가는 걸 느꼈다.
정신이 멍해졌다. 난데없이 꿈이 떠올랐다. 석주와 마주 보고 웃던 꿈들이. 그의 품에 안겨 그가 불러 주는 제 이름을 듣던 꿈들이.
아진은 초점 없는 눈동자로 석주의 등에 몸을 얹었다.
석주가 소리 없이 빙긋 웃었다. 아진 특유의 서늘한 체온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어색하게 제 어깨를 더듬거리거나, 목을 감싸는 팔도 좋았다. 그의 가벼운 체중은 영 못마땅했는데, 제가 그리 만든 것이라 감히 불평할 수가 없었다.
아진의 하반신을 단단히 받친 석주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병실을 나섰다.
정원은 꽤 그럴싸했다. 아직 겨울 티를 벗지 못해 나무들이 앙상하고, 잔디도 황토색이었지만 작은 개울도 있고, 성질 급하게 벌써 핀 꽃도 있고, 고즈넉하니 정자도 있었다.
석주는 여기저기를 나돌며 앉을 만한 곳을 찾았다. 그러다 정자로 목적지를 정했다. 높아서 야경도 잘 보이고, 바람도 막아 줄 것 같아서.
헌데, 여기까지 오는 내내 아무런 말이 없던 아진이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사장님.”
“응?”
“술 냄새 나요.”
그 말에 석주의 발이 우뚝 멎었다. 그가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다시 뒤로 디뎠다가, 왼발부터 앞으로 내밀며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걸음을 이어 갔다.
“아, 미안……. 씻고 올까 했는데 그럼 너무 늦을 것 같아서. 냄새 많이 나? 두루마기라도 갈아입을 걸 그랬다.”
“…….”
“오늘 오랜만에 식구들이랑 저녁을 먹었거든. 명진이가…… 퇴원해서.”
그 말에 축 늘어져 있던 아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석주의 어깨를 잡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요? 퇴원하셨어요?”
“그래. 숨도 잘 쉬고, 잘 걸어 다녀. 성격도 여전하고. 손가락 없는 건 신경도 안 쓰더라.”
아진이 가는 웃음을 흘렸다.
“잘됐네요.”
“그래, 잘됐지. 말 나온 김에 아진이 너도…….”
“…….”
“얼른 퇴원해야지. 집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잠도 푹 자고 그러자. 너 좋아하는 떡갈비랑 불고기랑 매일 먹게 해 주마. 약과도 매일 사 주마.”
석주가 신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진을 제 앞에 앉혀 두고 팔도 산해진미를 다 먹일 것이다. 살이 피둥피둥 오르는 그를 구경해야지. 통통해진 볼살을 보고 있으면 세상 걱정이 죄 사라질 터였다.
“…….”
허나 아진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석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어서.
곧 석주가 정자 앞에 도착했다. 그는 바닥에 자신의 두루마기를 깔고 그 위에 아진을 내려놓았다.
“춥진 않아?”
석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외투와 담요를 두껍게 둘러 주긴 했으나 추위를 워낙 많이 타는 아진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진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석주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러다 아진이 불편해할 것 같아 한 뼘 정도 떨어져 앉았다.
“…….”
아진이 눈 앞에 펼쳐진 전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창을 통해 볼 때와 달리 훨씬 가깝고 생동감 넘치는 도시가 신기했다. 사람도, 차도 없어 고요한 게 좋았다. 그러면서도 깡촌처럼 어둡지 않고, 네온사인만 조용하게 번뜩이는 것도 좋았고, 가로등이 줄지어 가지런히 서서 길을 밝히는 것도 좋았다.
아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
석주는 그런 아진을 곁눈질로 구경하고 있었다. 데리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죄를 짓지만 않았으면 그를 제 다리 사이에 앉혀 두고 같은 시선을 공유할 수 있을 텐데, 싶어서 아쉽기도 했다.
석주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마구 쓸어 넘기는데. 아진이 전방을 응시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사장님.”
“어, 어?”
“왜 화 안 내세요?”
“……뭐?”
“죽음으로도 도망치지 못할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 말에 석주가 우뚝 굳었다.
‘아진아. 세상에 나 엿 먹이고 멀쩡히 도망친 새끼는 하나도 없어. 너도 그래. 너도 도망 못 가. 어디로든, 그게 설사 죽음이라 할지라도. 못 간다고.’
‘사장님, 아파요…….’
‘죽고 싶어도 못 죽어, 넌.’
언젠가 제가 아진에게 한 말이었다. 단 한 문장도, 한 음절도 잊지 않았다. 제가 매일같이 되뇌고 상기하고 반성해야 할 죄들이었다.
석주가 입을 뻐끔거렸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목구멍이 꽉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진이 모든 말을 강탈해 가서 그랬다.
여전히 앞을 보고 있던 아진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결 좋은 머리칼이 차르르 같은 방향으로 떨어졌다.
“저 죽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화를 안 내시네…….”
“아진아. 내가-”
“죽는 것에 실패해서 그런가…….”
아진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 시도한 도망이다. 여태 석주가 도망치려는 거냐며 화를 낸 적은 많지만, 모두 오해였다. 실로 아진이 도망치겠다고 결심하고 실행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근데 이렇게 보란 듯이 실패할 줄이야. 이제는 어쩌나. 어떤 방법으로 도망가야 하나.
아진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는데. 돌연 주머니를 묵직하게 채운 총이 느껴졌다. 그가 주머니 위로 총을 쓰다듬었다.
“혹시 지금이라도 죽어 보라고 총 주신 거예요? 사장님 머리 쏴 버리라고 했지만, 사실은 제 머리 쏘라고?”
순진한 질문에 석주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상상하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총을 주면서 아진이 본인의 머리를 겨눌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물론 제 잘못이다. 그것까지 예상했어야 했는데. 멍청하긴.
얼마 전 기헌이 절 비웃으며 한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근데 또 제대로 죽지도 못했다며? 강 사장이 살려서?’
‘지금 병원에 있다고 들었는데. 일어나면 뭐가 달라질까? 칼만 보면 냅다 자기 손목을 그으려고, 자기 목을 따려고 들지 않겠어?’
‘어디 그뿐일까. 차만 보면 달려들고, 높은 곳에 가면 뛰어내리려 하고, 물 보면 얼굴부터 처박겠지.’
‘강 사장 앞으로가 참, 힘들어지겠네.’
‘사람 죽이는 건 쉽지만, 사람 살리는 건 어렵지 않나.’
그걸 잊고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인데. 제가 어떻게 죄를 빌고 속죄하든, 아진이 죽어 버리면 다 쓸모없어지는 것인데. 아진을 살려 두는 것. 그것을 최우선으로 뒀어야 했는데.
석주가 볼 안쪽 살을 세게 깨물었다가 놨다. 그가 느리게, 허나 진심을 다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런 거. 그냥…… 네가 걱정하는 것 같아서. 네가 날 무서워할까 봐. 네가 언제든 날 죽일 수 있다는 믿음을 주려고 그래서 총을 준 거야. 그걸로 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러지 않았으면 해.”
줄줄이 이어지는 등신 같은 말에 석주가 눈을 꾹 감으며 벅벅 얼굴을 문댔다.
“…….”
팩 고개를 돌린 아진이 석주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에 석주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아진의 군청색 눈동자가 석주를 깊게 응시했다. 그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죄인의 모습으로 구겨져 있는 석주의 모습이 남김없이 들어찼다.
아진이 천천히 입을 뗐다.
“……알았어요?”
짧은 물음이었다. 주어가 생략되어 무엇에 대해 묻는 것인지 모를 질문. 근데 석주는 그가 묻는 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눈동자가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알았구나.”
숨소리가 많이 섞인 아진의 목소리가 몹시 공허하고 허탈했다. 그게 어찌나 아프고 서러운지. 석주는 주제도 모르고 눈물을 흘릴 뻔했다.
“내가 한 짓 아니라는 거, 알았구나. 내가 도둑질한 거 아니라는 거, 명진이 형님 그렇게 만든 거 아니라는 거. 알았구나. 그렇죠?”
대답 없는 석주에 아진이 재차 물었다. 질문이었으나 확인이었다.
“…….”
석주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아진이 하하, 하고 건조하게 웃었다.
제 의도와는 하등 상관없이 죄인이 됐었다가, 또 제 의도와는 하등 상관없이 죄인에서 벗어났다.
무엇 하나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 네 팔자는 결국 그 모양 그 꼴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고 우울했다.
정면으로 고개를 바로 한 아진이 붕대가 칭칭 감긴 손으로 자신의 눈두덩을 비볐다.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럼 저 이제…… 돈 안 갚아도 돼요?”
“그래.”
“저 이제 안 때리실 거예요?”
“그래.”
석주가 꼬박꼬박 고개를 끄덕였다. 단호함 넘치는 대답에 아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거짓말.”
조소처럼 나온 단어에 석주가 버석하니 굳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여 있던 그의 손끝이 꿈틀거리며 경련했다. 어떻게 해야 아진에게 믿음을 줄 수 있나, 고심하는데. 아진이 정자 기둥에 어깨를 기대며 읊조렸다. 혼잣말처럼, 독백처럼, 고저 없는 음성으로, 바람에 단어를 흘려보내듯이.
“그럼 이제 사과하시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