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손가락이 뻐득거렸다. 마치 뼈와 뼈 사이에 시멘트가 들어가 굳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거기다 힘도 없었다. 손가락을 굽혔다 펴는 것도 힘이 들었다.
아진이 멍하니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도 아니고, 제가 제 손목을 그어 생긴 일인데 억울하다는 감정이 제일 먼저 올라왔다.
그 순간, 뒤에서 손이 슥 나오더니 아진이 올려 주려던 이불을 대신 올려 주었다. 두툼한 이불이 꽃님의 어깨를 덮었다. 아진이 휙 뒤를 돌아봤다.
“…….”
갑작스러운 시선에 석주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러더니 슬쩍 상체를 뒤로 물렸다. 꼭 쥐구멍으로 숨어드는 쥐 같았다. 그답지 않은 몸짓이었다. 그 때문에 아진은 눈짓 한 번으로 그를 이겨 먹은 듯한 기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잠시간 석주를 응시하던 아진은 자신의 손목에 감긴 붕대와, 팔을 덮은 낯선 옷가지와, 석주의 뒤로 펼쳐진 공간의 전경을 훑어보았다. 그 후, 비로소 자신이 있는 곳을 인지했다.
“여기…… 병원이에요?”
가라앉은 음성에 바람기가 많이 묻어났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감미롭고 잔잔한지. 석주는 찰나 넋을 놓았다가 간신히 정신을 다잡았다.
아진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낯선가, 했더니. 그가 울지 않고, 고함치지 않고, 화내지 않고 말하는 게 몇 달 만에 처음이라 그랬다. 아마 아진도 단조로운 제 목소리를, 옅게 떨리는 제 목소리를 낯설게 느끼고 있겠지.
석주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병원이야.”
“저 바깥에 나왔어요?”
“그래.”
“그래도 돼요?”
“……그럼.”
석주가 한 박자 늦게 긍정했다.
“…….”
아진이 그런 석주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이 매우 깊고 날카로웠다.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석주는 반사적으로 그 시선을 피했다가, 이내 다시 그를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진은 다른 걸 묻지 않았다. 원망하지도 추궁하지도 않았다. 침묵을 이어 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벽을 짚고 일어나면서도 비틀거리기에 석주가 그를 부축해 주었다.
아진은 침대로 돌아가지 않고 창가 앞에 섰다. 그리고 커튼을 걷었다. 석주가 가려 두었던 새파란 달빛이 아진의 말간 얼굴 위로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그 모습에 석주는 이만 침대로 돌아가자, 아직 덜 나았어, 쉬어야 해, 의사를 불러다 검사를 해 보자, 밥도 먹어야 해, 일단은 물부터, 따위의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싶었으나 입을 다물었다. 제 걱정도 아진에게는 불쾌한 간섭이 될 것 같았다.
아진이 창밖을 멀거니 바라봤다. 서울 야경이 창문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건물의 불은 죄 꺼져 있었지만, 줄줄이 늘어선 가로등과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달린 술집 간판으로도 충분히 멋진 야경이 됐다.
낯선 풍경이었다. 도박장에서는 바깥 풍경을 볼 수 없었고, 산 아래에 있는 석주의 집에서는 마당 가득 달빛만 차올랐으니까.
밤이라면 응당 달빛이 가장 환해야 하거늘. 도시는 달빛이 묻힐 정도로 인공적인 빛이 강하게 산란하고 있었다. 꼭 별세계에 떨어진 것 같았다.
아진이 다치지 않은 손으로 창문 손잡이를 쥐었다. 제가 보고 있는 창밖이 꿈인지, 현실인지. 아니면 그림인지, 실재하고 있는 풍경인지 알고 싶었다.
그가 창문을 당기려는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기도 전에 뒤에서 나온 손이 문을 대신 열어 주었다.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미닫이 창문이 열리고, 찬 바람과 푸른 달빛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진이 도시 냄새가 섞인 그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러다 폐가 지끈거려서 인상을 썼다. 갑작스러운 찬 공기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으…….”
아진이 어깨를 움츠리자 석주가 유난스레 물었다.
“왜 그래. 아파? 아니면 추워? 문 닫아 줄게.”
그가 다시 창문을 닫으려 했다. 아진이 다급하게 그를 만류했다.
“싫어요. 닫지 마세요.”
아진은 그리 말하면서도 석주가 제 말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안 돼.’ 그렇게 단호하게 제 청을 무시하곤 창문을 닫겠지. 그리고 제 손목을 움켜쥔 채 침대에 던지듯 눕혀 놓을 거라 예상했다. 어쩌면 주머니에서 족쇄를 꺼내 침대 다리와 제 발목을 묶어 둘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도 했다.
허나 석주는 별다른 말 없이 창문을 잡았던 손을 거두었다.
“…….”
아진은 이상하다는 듯 석주를 한 번 보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한참을 기대어 있었다. 찬 바람이 춥지도 않은지, 낯선 도시 풍경을 보고 또 봤다.
석주는 그런 아진의 곁을 지키고 있다가, 그가 이렇게 바깥에 나오는 게 제집에 들어온 이후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집 안에서만 생활하다, 근 몇 달은 방 안에 갇혀 살았지. 달빛과 바깥 공기가 그리울 만도 했다.
석주가 슬쩍 아진에게 반걸음 붙어 섰다. 그리고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진아.”
“…….”
“나가 볼래?”
그 말에 아진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것을 본 석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떴다. 아진이 바라는 것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석주는 지극히 그를 설득했다. 아진이 귀찮다는 듯, 마지못해서라도 긍정을 내놓을 수 있도록.
“병원 앞에 작은 공원이 있어. 막 봄에 접어들어서 꽃도 드문드문 피었더라.”
“…….”
“새벽이라 차도 없을 거야. 물론 사람도 없고.”
“…….”
“옷 따뜻하게 입고 나가자.”
석주가 병원 구석에 비치된 농을 열었다. 그리고 담요와 미리 가져다 둔 아진의 잠바 따위를 챙겼다. 양말도 신어야 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뒤적거리는데. 뒤통수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왔다.
“저 시험하시는 거예요?”
“뭐?”
“나가라고 해서 나가면, 도망치는 거냐며 때리시려고요?”
“…….”
“아니면, 제 머리채를 잡고 집까지 끌고 가시려고요?”
“…….”
“그도 아니면, 저 반짝이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제 옷을 벗기실 거예요?”
석주가 벙긋 입을 벌렸다. 허나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왜. 내가 어째서 그러겠니. 그리 말하고 싶었는데, 그리 말할 주제가 못 됐다. 아진이 옷을 입고 문 앞만 서성거려도, 마당만 나돌아도 도망치려는 거냐며 그의 뺨을 후려치고, 머리채를 움켜쥔 채 개처럼 방까지 끌고 갔었으니까. 그 방에서 그를 함부로 짓누르고 짓밟았으니까.
석주가 옷가지를 꾹 말아쥐었다. 아진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읊조렸다.
“안 나갈래요.”
동그란 뒤통수에 체념과 미련, 절망과 두려움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석주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주책맞게 눈알이 뜨끈해졌다. 마른침을 연거푸 마시며 마른세수를 한 석주가 아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슥 무언가를 내밀었다.
“자.”
아진이 무심코 그것을 바라봤다가, 앞을 봤다가, 다시 빠르게 석주가 내민 것을 쳐다봤다. 그의 눈썹이 아치형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게 눈앞에 있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 검고 단단한 몸체. 쭉 뻗은 주둥이.
총이었다.
아진이 그것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총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도박장에서 일할 때, 금 사장도 가지고 있었고 석주의 집에 들어간 이후로도 종종 보았다.
근데 제게 건네진 총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도무지 제 것 같지 않았다. 쥐면 안 될 것 같았다. 석주가 또 저를 시험하려는 모양이다.
아진이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데. 석주가 텁 그의 손목을 쥐었다. 그리고 총을 손수 아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왜, 왜……. 싫어요. 싫어요…….”
아진이 손목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석주는 꾸역꾸역 그의 손에 총을 들려 주었다. 손가락 하나하나 곱게 접어 총 손잡이를 쥐게 했다. 아진이 벌레라도 묻은 듯 팔을 털어 내려는데. 석주가 그의 앞에 바짝 붙어 섰다.
그리고 총을 든 아진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자신을 겨누게 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아진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진아.”
“…….”
“내가 널 또 때리려 하거든, 이걸로 쏴 버려.”
“…….”
“여기 이쪽을 내 머리에 겨두고, 여기를 당기면 된다.”
“…….”
“못 맞추면 어쩌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 얼굴을 들이밀어 줄 테니까. 네 총알이 빗나가는 일은 없을 거야.”
석주가 총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총구가 그의 미간을 꾹 짓눌렀다. 이대로 아진이 방아쇠를 당기면 저 잘생긴 얼굴이 험상궂게 깨지고 부서질 터였다. 두개골이 으스러지며 눈알이 터지고 뇌수가 솟구쳐오르겠지.
그 모습을 상상한 아진이 파리하게 질렸다. 총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석주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조금 전 기함할 소리를 해 놓고, 몹시 평온한 낯으로 아진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어깨에 담요도 둘러 주었다.
“밖이 아직 추워. 봄이라는데 영 따뜻해지지 않네. 그래도 신기하게 꽃은 피더라.”
“…….”
휙휙 바뀌는 분위기에 아진이 어쩔 줄 모르고 눈동자를 굴리는데. 석주가 그의 골반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번쩍 들어 침대에 앉혀 놓았다. 놀란 아진이 총을 떨어트렸다.
타닥, 탁. 검은 철제 덩어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
석주는 아무런 말 없이 그것을 주워 아진의 손에 들려 주었다. 아진은 손바닥을 펼친 채 총을 쥔 것도, 쥐지 않은 것도 아닌 이상한 자세로 있었다.
석주가 그의 발치에 꿇어앉았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대는 이 행위가, 아진을 올려다보고 아진이 저를 내려다보는 이 위치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미약하게나마 속죄를 하는 듯해 뿌듯하기까지 했다.
옅은 미소를 띤 그가 아진의 발목을 조심히 감쌌다. 아진이 흠칫 몸을 떨었다. 허나 다행히 발을 빼내진 않았다. 석주는 하얀 맨발에 양말을 신기기 시작했다. 도톰하고 하얀 양말이 아진의 발을 감싸는 모습에 제 기분이 다 좋아졌다.
석주가 흘끔 아진을 올려다봤다. 눈썹을 찌푸린 아진이 저를 귀신 보듯 하고 있었다. 석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장님이 미쳤나, 생각하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