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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19화 (119/261)

119화

또 다른 꿈은 적막하고 평화로웠다. 중정 의자에 앉은 석주가 담배를 문 채 책을 읽고 있었고, 아진은 연못에 풀어 놓은 물고기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직접 밥을 주기도 했다. 입만 빼꼼 내밀고 뻐끔뻐끔 움직이는 모양새가 신기해서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석주가 이만 자러 가자고 해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방으로 돌아갔다.

또 다른 꿈은 비가 왕창 쏟아졌는데, 날이 제법 쌀쌀했다. 석주는 시원한 바람이 좋다며 마루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그의 잇새로 담배 연기와 입김이 함께 뿜어졌다.

그런 그의 곁에, 이불을 둘둘 싸맨 아진이 핫초코를 홀짝이고 있었다. 석주가 서양인들이 뜨거운 우유에 초콜릿을 넣어 먹는다며 알려 준 것인데, 어찌나 맛있는지. 며칠 내내 달고 사는 중이었다.

석주는 아진에게 추우니 들어가라고 말했으나, 아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예쁘게 웃으며 석주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석주가 무어라 욕설을 짓씹더니 태우던 담배를 비에 흠뻑 젖은 마당으로 내던졌다. 그 후 아진을 이불째로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진은 행여 핫초코를 이불에 흘릴까, 컵을 두 손으로 꽉 잡아야 했다. 그렇게 꿈이 끝났다.

그리고 마지막 꿈은, 석주가 아진의 발을 주물러 주는 꿈이었다.

한여름에도 시린 발이 괴로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석주가 그 따뜻하고 커다란 손으로 발을 주물러 주었다. 사내종 놈의 발이 뭐 그리 예쁘다고. 이따금 발등에 입도 맞추고, 복사뼈를 핥기도 했다.

그 손길이 참 좋았다. 그래서 깨고 싶지 않았다. 이 꿈에서, 이 환상 속에서 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제 인생에 몇 안 되는 이 행복을 되풀이하고 싶었다. 그러다 꿈에 갇혀 죽더라도, 환생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진은 끝내 눈을 뜨고야 말았다. 발에 닿는 뜨끈뜨끈한 열감이 환상이 아니라 실제였기 때문이다. 그 온기가 부득부득 아진을 심연 아래에서 끌어 올렸다.

“…….”

소리 없이 눈을 뜬 아진은 주홍빛이 넘실거리는 천장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정신이 멍했다. 전기라도 베어 문 듯 입 안이 떫게 진동했고, 속이 공허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석주가 주는 그 동그랗고 하얀 알약을 먹은 다음 날, 항상 이러했다.

아진이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마지막 기억이 생생하다. 제가 어떻게 손목을 그었는지, 칼이 살을 가르는 느낌이 어떠했는지, 시린 칼이 지나가고 난 자리로 솟구치는 피가 얼마나 뜨거웠고, 얼마나 질퍽거렸는지, 땅 위로 퍼져 나가는 붉은 웅덩이를 보는 기분이 어떠했는지까지.

그래서. 저는 그 행동의 결과로 무엇을 얻었나.

성난 파도에 휩쓸렸나, 아니면 파도에게서 도망쳤나.

아진은 그 의문의 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석주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진이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 시선에, 석주는 아무런 행동도,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입술을 꿰맨 것처럼 입이 딱 다물렸다. 눈썹이 어그러지고, 뺨이 경련했다.

아진은 한동안 말없이 석주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기다리는 것이다. 석주가 제게 벌을 내리길. 분명 저를 혼내고 때리고 원망할 것이다. 어디 감히 죽음으로 도망치려 하냐면서, 네가 그리 쉽게 죽을 줄 알았냐며 호통을 칠 것이다.

“…….”

“…….”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석주의 침묵은 끊길 줄 몰랐다. 아진은 자신이 죽어 있는 사이 석주가 말을 잃은 게 아닌가 의심해야 했다. 어쩌면 제 귓구멍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고.

그럼 차라리 다행이지. 석주의 모진 말에 겁을 먹지도, 상처받지도 않을 테니까.

아진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크게 휘청거렸다. 상모돌리기를 하듯 머리가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다. 눈알이 앞으로 튕겨 나올 듯했고, 머리는 띵하면서도 저릿저릿했다.

“으…….”

이마를 움켜쥔 아진이 가늘게 신음했다. 그에 석주가 얼른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손이 종착지를 찾지 못하고 허둥지둥 움직였다.

“어디가 아파? 머리? 손목은? 손목은 괜찮고? 의사, 의사를 불러야, 내가 지금 불러오마.”

석주의 손은 끝내 아진에게 닿지 못하고 거두어졌다. 그가 얼른 의사를 불러오겠다며 병실을 나가려 했다. 그 분주한 움직임에 아진은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게 됐다. 이 공간이 어디다, 인지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시선에 확 박혀 왔다.

벽을 보고 자는 뒷모습이 몹시 익숙했다. 살이 많이 내렸지만, 머리가 많이 길긴 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꽃님이었다.

아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방금 죽음에서 헤어 나와 그의 만면에 난자해 있던 불행이 단숨에 씻겨 내려갔다. 어두운 밤, 홀로 햇빛을 받은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어……. 꽃님이 아줌마…….”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곧장 몸을 움직였다. 침대 아래로 하얀 맨발이 덜렁 떨어졌다. 누군가가 열심히 데워 준 발바닥이 찬 바닥을 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아진이 크게 휘청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한쪽 다리는 원래 고장이 난 상태였고, 반대쪽은 족쇄가 씹어 놓은 터라 설 수가 없었다. 누워 있는 사이 납작해진 근육들 역시 다리를 지탱하지 못했다.

아진은 쓰러지는 자신의 몸뚱이를 방관했다.

괜찮다. 넘어지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것을 두려워할 만큼 평온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는 거고. 그게 아니면 기어가면 되는 거고. 그것도 어려우면 굴러가면 됐다.

그러나 넘어졌을 때, 바닥과 충돌하는 그 고통은 반갑지 않았다. 다리가 고장 난 이후로 수백, 수천 번을 넘어졌는데. 아픈 건 여전히 아픈 거였다.

“…….”

아진이 눈을 질끈 감는데. 따뜻한 손이 팔꿈치와 허리를 잡아채는 게 느껴졌다. 추락하던 아진이 순식간에 다시 위로 올라왔다. 아진이 반사적으로 그 손을 움켜쥐었다.

석주였다.

“천천히 일어나야 해.”

“…….”

“설 수 있겠어?”

석주가 조심히 아진을 세웠다. 아진은 몇 번 다리를 휘적거리고 무릎을 휘청거리다 간신히 두 발을 바닥에 딛고 섰다. 한쪽 뒤꿈치가 살짝 위로 떴지만 못 서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진이 자신의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발이 가벼웠다. 발목에 엉켜 있던 쇳덩이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붕대와 멍이 남아 있었지만 그 무게가 느껴지진 않았다.

아진이 다시 석주를 바라봤다. 석주는 그 시선에 응해 주지 않았다. 아진이 제대로 서는지, 걸을 수 있는지 확인하느라 바빴다. 어쩌면 부러 아진의 시선을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고.

“…….”

아진이 버팀목으로 쥐고 있던 석주를 놓았다. 그리고 온기일랑 없는 벽을 짚었다. 그 후 석주를 지나쳐 절뚝절뚝 걷기 시작했다. 꽃님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내 꽃님의 앞에 도착한 아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뭐 얼마나 움직였다고 이마에 땀이 맺혔다. 서 있는 게 버거웠다.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댄 아진이 스르륵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러면서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는데, 그것도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해서 뒤로 넘어가려 했다. 그러자 등 뒤로 커다란 손이 닿아 왔다. 뜨겁고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있었다.

아진은 그 손이 영 거슬렸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지금은 꽃님이 훨씬 더 중요했다.

아진이 어슴푸레한 빛에 비치는 꽃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가 꽃님임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진짜 아줌마네.”

“…….”

“우리 아줌마네. 아줌마가 눈앞에 있네.”

아진이 하하, 하고 재차 웃었다. 그러다 돌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콧잔등이 시큰거린다 싶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꽃님의 상태는 어두운 빛 속에서 봐도 좋지 못했다. 볼은 움푹 꺼져 있었고, 눈 아래는 검었고, 숨을 헉헉 몰아쉬는 입술은 불모지처럼 갈라진 상태였다.

아직도 아픈가. 여태 병원에 있었으면서, 왜 아직도 아픈가. 수술이 잘못됐나. 또 왜 이렇게 말랐나. 그동안 밥을 잘 못 먹은 건가. 병원 밥이 맛있다고 했었는데. 거짓말이었나.

아진은 궁금한 게 많았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아니, 실은 그것보다 눈을 뜬 꽃님을 보고 싶었다.

저를 보고 반가워하고, 저를 안아 주었으면, 했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걸, 건강하다는 걸, 우리가 전과 다름없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꽃님이 그 특별한 능력으로 앞으로 우리에게는 어떠한 아픔도, 슬픔도 없을 거라고 말해 주길 바랐다.

그럼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석주가 저를 그 좁은 지옥에 가둔대도, 신랄하게 저를 미워한대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줌마…….”

아진이 꽃님의 어깨에 슬쩍 손을 얹었다. 앙상한 어깨가 만져졌다. 아진의 눈썹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덜컥 겁이 났다. 꽃님이 매우 아픈 것 같아서, 제 곁을 떠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아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꽃님을 흔들어 깨우려는 요량이었다. 그때. 석주가 아진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한쪽 팔로는 아진의 등을 받친 그가 반대 손으로 마른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아진이 우뚝 굳었다. 그의 귓가로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깨우지 마.”

“…….”

“종일 너 간호하느라 힘들었을 거야. 곧 아침이니까, 그때 만나.”

아진의 입이 꿈틀거렸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석주의 말은 뭐가 됐든 듣고 싶지 않았다. 당장 꽃님을 만나고 싶었다.

허나 마음과 달리 손은 떨어졌다. 제 오기와 반항심으로 그녀를 깨울 순 없는지라. 그의 말마따나 분명 온종일 제 곁을 지키고 있었을 텐데. 피곤하긴 할 터였다.

아진은 두 손을 모은 채 한참 동안 꽃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손을 뻗어 그녀의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근데 어째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아진은 뒤늦게 자신의 손목에 붕대가 두껍게 감겨 있음을 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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