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18화 (118/261)
  • 118화. 앙상한 봄

    아진은 아주 긴- 꿈을 꾸었다. 이렇게 긴 꿈을 꾸는 건 평생 처음이었다. 아니, 꿈이 아닌가. 언젠가 실로 있었던 나날들이니 꿈이라기보다는 회상에 가까웠다.

    첫 장면은 석주가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었다. 석주는 보통 일할 때 담배를 많이 태운다. 뭘 마신다 하더라도 차가운 물이거나, 또는 차가운 술이다.

    근데 이따금 커피를 마시곤 했다. 서양 어디에서 사 왔다는 커피콩을 손바닥보다 작은 서랍에 넣고 갈아, 그것을 또 세모난 기계에 넣고 뜨거운 물을 넣었다. 그럼 콜라만큼이나 새까만 물이 내려오는데, 그걸 홀짝홀짝 마셨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글공부를 하던 아진은 코를 스치는 고소한 커피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석주를 구경했다.

    그 시선을 눈치챈 석주가 커피잔을 들어 보였다.

    “왜. 너도 마셔 볼래?”

    “네.”

    아진이 냉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재로 다가가, 당연하게 석주의 허벅지 위로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석주가 그를 바짝 끌어당겨 편히 앉게 도왔다. 그 후 커피잔을 아진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커피 마셔 봤어?”

    “그럼요. 꽃님이 아줌마랑 주방 누나들이 맨날 마셔요. 우유랑 사카린 잔뜩 넣어서.”

    “그거랑은 다른 맛일 텐데.”

    “달라 봐야 커피가 커피죠.”

    아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커피를 홀짝였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손잡이를 조심히 쥐고, 입술로 호록 마시는 꼴이 꽤 귀여웠다. 석주가 그 귀여움을 참지 못하고 아진의 뺨에 입술을 비볐다. 목덜미에다 본인의 높은 코를 긁어 대기도 했다.

    “어때?”

    아진이 찹찹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단조로이 감상평을 내놓았다.

    “누가 구정물에다 담배꽁초를 왕창 버려놨는데, 그 물을 떠서 마시는 기분이에요.”

    “뭐? 구정물?”

    “왜 이렇게 맛없는 걸 드시는 거예요. 사카린 갖다 드릴까요?”

    금방 다녀올게요. 아진이 석주를 뒤돌아보며 물었다.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 엉덩이를 들썩이기도 했다. 그에 석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진을 껴안았다.

    “아니. 난 이게 좋아.”

    “……이게 좋다고요?”

    아진의 입매가 해괴하게 뒤틀렸다. 그가 새카맣게 찰랑거리는 커피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뺨을 긁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석주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방금 머릿속으로 그 생각했지. 사장님은 잠 병신에, 눈 병신에 혀도 병신이구나. 어쩌나. 이래서 사람 구실은 하고 살겠나. 나중엔 사약을 갖다 줘도 좋다고 마시겠네. 쯧쯧.”

    누군가의 말투를 흉내 내는 석주에 아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가 볼을 긁던 손을 얌전하게 내려놓았다.

    “……아닌데요.”

    뻔뻔하지 못한 거짓에 석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아진의 목덜미와 볼에 마구 입을 맞췄다. 한동안 아진을 주물럭거리던 그가 의자를 뒤로 끌어 찬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콜라 한 병을 내려놓았다.

    “넌 콜라나 마셔. 그게 어울려.”

    석주는 콜라의 뚜껑까지 친히 따서 아진의 손에 들려 주었다. 아진이 커피로 더럽힌 입을 헹구듯 허겁지겁 콜라를 들이켰다. 꼴깍꼴깍 넘어가는 목젖이 어찌나 깜찍한지. 석주가 그것을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아진은 심장이 너무 뛴다며 도통 잠이 들지 못했다. 그래서 석주는 아진을 데리고 마당을 산책했다. 우유를 데워 주기도 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글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둘만의 시간을 보내다, 책을 읽는 석주의 가슴팍에 기대어 있던 아진이 스르륵 잠이 들면서 그날은 마침표를 찍었다.

    곧장 다음 꿈이 시작되었다.

    아진은 거울을 보고 있었다. 손에는 검은 넥타이와 커다란 와이셔츠가 들려 있었다. 귓가에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석주가 욕실에 서 씻는 소리였다. 덥다며 퇴근하자마자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간 참이었다.

    아진은 그가 벗어 놓은 옷을 정리하다 문득, 정장을 입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제 옷차림은 요즘 ‘유행’과는 몹시 동떨어진 상태라. 낡은 저고리에 펑퍼짐한 바지라니. 못 봐 줄 꼴이었다. 근데 천이 반질반질한 옷을 들고 있으니 갑자기 욕심이 생겼다. 제 주제에 이런 옷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터라.

    아진은 그 욕심을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곧장 실행에 옮겼다. 어디 종 주제에 윗사람의 옷에 손을 대냐, 싶지만 석주는 그런 것에 화를 낼 좀생이가 아니었다. 아진이 웬만큼 예의 없이 굴어도 꾸지람 한번 하지 않기도 했고.

    아진은 서툴게 옷을 입었다. 셔츠부터 입었더니 팔이 어찌나 긴지. 도통 손이 나오지 않아서 단추를 잠그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자꾸 내려오는 소매에 짜증이 나서 발로 바닥을 쿵쿵 내리찍기도 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끝내 셔츠 입기를 성공했다. 아진은 석주가 그러는 것처럼, 셔츠 칼라를 올리고 넥타이를 둘렀다. 근데 그 후가 문제였다.

    “…….”

    넥타이 매는 법을 제가 알 리가 있나.

    아진은 운동화 끈을 묶듯 넥타이를 맸다가, 목이 졸려 컥컥거리며 그것을 풀어냈다.

    그 후엔 어쭙잖은 실력으로 리본을 묶었다가, 양반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꼴이 되어서 신경질적으로 풀어냈다.

    아진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준 채 넥타이와 씨름하는데. 겨드랑이 아래로 손이 슥 파고들어 왔다.

    “내가 해 주마.”

    석주였다.

    맨몸에 바지만 걸치고, 머리칼에 물기를 한가득 머금은 석주가 아진의 뒤에 서 있었다. 아진이 거울 속으로 멍하니 석주를 쳐다봤다.

    “이게 해 보고 싶었어?”

    “네.”

    석주는 피식 웃으며 능숙하게 넥타이를 맸다. 커다란 손가락 사이로 보드라운 넥타이 천이 휘휘 감겼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아진은 그 손짓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발가락이 안으로 곱았다.

    석주는 금세 넥타이 매듭을 완성했다. 그리고 셔츠 칼라까지 정리해 주었다. 아진이 거울 속 자신을 빤히 쳐다봤다. 마른 몸 위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기다란 넥타이까지 한 꼴이 참…….

    “바보 같아요.”

    “왜 귀여운데.”

    “귀여운 게 뭐가 좋아요. 사장님처럼 멋지고 사내다운 게 좋지.”

    아진이 어깨를 위로 올리고 팔을 엉거주춤하게 펼치며 덩치가 큰 척을 해 보였다. 석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뒤에서 아진을 안은 그가 살랑거리며 흔들리는 넥타이를 돌돌 말았다.

    “옷이 너무 커서 그래. 다음에 옷 사러 갈까.”

    “옷 사러요? 제 옷요?”

    “응. 양복점에 가 보자. 너는 품이 작아서 직접 가서 맞춰야 입을 만할 거다.”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언갈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왜. 자동차 때문에 나가기 무서워? 그럼 재단사를 집으로 불러 주마. 품만 재면-”

    “정말 괜찮아요. 이런 건 제 옷이 아니니까. 그냥 한번 입어 보고 싶었던 거지, 갖고 싶던 건 아니에요.”

    “…….”

    아진이 바쁘게 옷을 벗었다. 넥타이를 푸는 게 어려워 대충 매듭을 헐겁게 만든 후 얼굴만 빼냈다. 와이셔츠 단추도 끌어 곱게 접었다. 빨랫감으로 누나들에게 갖다 줘야 했다.

    그 밖에 석주가 벗어 둔 바지와 두루마기까지 한 아름 챙긴 아진이 빙긋 미소 지었다.

    “배고프시죠? 곧 저녁 다 될 거예요. 저 부엌일 도우러 가 볼게요.”

    꾸벅 허리를 숙인 그가 방을 나가려 했다. 석주가 다급히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진아.”

    “네?”

    “갖고 싶어 해도 된다.”

    “……네?”

    “그래도 돼. 왕이 입던 곤룡포든, 양반들이 입는 비단 도포든, 신사 정장이든, 뭐든 갖고 싶으면 말만 해라. 내가 다 구해 주마.”

    석주가 다정히 말했다. 방금 찬물로 씻어 놓고, 그새 뜨거워진 손바닥으로 아진의 볼을 문지르기도 했다. 아진이 그런 석주를 빤히 올려다봤다.

    왕이 입던 것도 구해 주겠다고. 그 비싼 비단 도포를 사 주겠다고.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었다. 말만 하면 구해다 주겠다는 것도 좋았다. 제가 그 귀한 것들을 쉽게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아진이 석주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저…….”

    “응, 뭐.”

    “약과요.”

    “……뭐?”

    석주가 어이없다는 듯 턱을 떨어트렸다. 약과. 약과를 사 달라고. 고작 그걸 바란다고. 석주가 떫은 입맛을 다시는데. 아진이 샐쭉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오실 때 약과 사다 주세요. 많이요. 사람들이랑 나눠 먹게.”

    “하…….”

    “왜요? 싫으세요?”

    “아니. 그래, 사다 주마.”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진이 헤실헤실 웃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진실로 신이 난다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가 껴안은 옷들 사이로 비죽 나온 넥타이가 팔랑팔랑 강아지 꼬리처럼 흔들렸다.

    문틀에 기댄 석주가 복도를 가로질러 가는 아진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것으로 두 번째 꿈이 끝났다. 그 후로도 아주 많은 꿈이 이어졌다.

    한 꿈은 한여름 밤이 배경이었다. 그날은 석주가 퇴근길에 복숭아를 상자 가득 사 왔다. 그리고 아진과 마루에 걸터앉아 몇 개나 까먹었다. 대충 껍질만 까고 베어 먹었는데, 그게 황홀할 정도로 맛있었다.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게 혀 위에서 녹는 것 같았다.

    아진은 너무 맛있다는 말을 반복하며 입가에 과즙을 잔뜩 묻혔다. 끈적한 손을 쪽쪽 빨아 먹기도 했다. 그러자 석주가 그 손가락을 채 가 자신이 빨아 먹었다. 아진은 사장님이 또 미친 짓 한다며 몸을 뒤틀었으나 결국엔 그에게 손가락은 물론 입가와 입 속까지 온통 빨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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