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17화 (117/261)

117화

지속되는 무시에 석주가 자신의 눈썹을 쓰다듬었다. 그의 미간에 옅은 짜증이 스몄다.

“나를 내치고 쫓아내려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나는 매일 올 거예요. 아진이가 눈을 뜰 때까지. 그리고 다 나으면 집으로 데려갈 겁니다. 내 집으로.”

그 말에 꽃님이 팩 고개를 돌렸다. 눈을 세모꼴로 치켜뜬 그녀가 석주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 이 뻔뻔한 놈이, 억…….”

분노를 토하던 그녀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가슴을 열고, 심장을 주물럭거리는 수술을 두 번이나 했으니, 그 후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니 움직이기 버거운 게 당연했다.

석주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 다시 의자에 앉혀 놓았다. 꽃님이 허억, 허억, 힘겹게 호흡하며 침대 이불을 틀어쥐었다. 석주가 그런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고저 없이 말을 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아진이를 곁에 둘 겁니다.”

“하…….”

“곁에 두고 보살피고, 지켜 줄 겁니다.”

“…….”

“그리고 아진이가 본인 입으로 나가겠다고 하면. 그때 놔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먼저 그를 놓는 일은 다시 없을 거란 말입니다.”

“…….”

“그러니까 괜히 없는 힘 짜내서 쫓아내려 하지 마세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아진이지, 아줌마가 아니니까. 악귀 같은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렇게 긁어 댑니까.”

제 세상의 중심에 아진이 선 지금. 꽃님은 아진을 지탱해 주는 한 가닥의 줄에 불과했다. 그녀가 없으면 아진이 휘청할 테니까, 슬퍼할 테니까 곁에 두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

꽃님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석주가 그녀를 쫓아내겠다 하면, 바깥에 득실거리는 장정들이 개떼처럼 몰려와 그녀를 끌어낼 걸 아는 모양이었다.

가볍게 호흡한 석주가 뒤늦게 아진을 눈에 담았다. 은은한 햇빛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있는 그가 너무 반갑고, 너무 슬퍼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병실에서 나온 석주가 넥타이를 헐겁게 풀어 내렸다. 그저 잠든 아진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기력이 쭉 빠졌다. 행여 그가 눈을 뜨는 건 아닐까,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어깨와 쇄골 언저리가 저릿저릿했다.

석주가 목을 뒤트는데, 그를 기다리던 조직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석주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형님. 저녁 무러 가시죠.”

“쩌기 사거리에 돼지국밥집이 새로 생깄는데, 국물 맛이 제법 부산이랑 비슷합니다.”

“수육도 야들야들하니 쥑입니다. 소주 까면 그냥 마, 순식간에 다섯 병입니다.”

“형님. 오랜만에 아들이랑 바깥에서 한잔하시죠.”

덕재가 슬쩍 웃으며 석주를 타일렀다. 석주가 피식 웃으며 식구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다 덕재의 어깨를 툭 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됐다. 너네끼리 먹어라.”

“아이, 형님 빵에서 나온 기념인데. 빠지시면 안 됩니다. 아들도 이래저래 고생 마이 했다 아입니까. 좀 돌봐주셔야지예.”

덕재가 대번에 목소리를 높였다. 구겨진 눈썹에 서러움이 가득했다. 석주가 난감하다는 듯 볼 안쪽 살을 지그시 씹는데. 명진이 덕재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얼굴을 내밀었다.

“저도 갑니다. 의사가 인제 술 무도 된다 캤다 아입니까. 이런 날에는 목구멍 좀 적셔야지요, 형님. 오랜만에 형님이랑 잔 부딪치고 싶은데. 빠지실라고요?”

헤죽헤죽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짧고 뭉툭한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게 다 같이 모인 지금 이 순간이 매우 좋은 모양이었다.

그런 명진의 뒤로 조직원들이 이런저런 말을 종알거려 댔다.

“두부김치도 시켜 묵지요. 형님 출소 기념으로.”

“출소는 씨발, 뭔 출소. 누가 보면 형님이 진짜 빵 들어갔다 나온 줄 알겠네.”

“아이, 창살 달려 있고, 갇혀 있고, 그럼 빵이지 뭐.”

“그람 두부를 사 오든가. 두부김치는 또 뭐고.”

“두부는 밍밍하잖아. 그리고 우리 형님 체신이 있는데, 경찰서 앞에서 두부를 손으로 무야 쓰나.”

“그……거는 맞는 말이지. 아무튼 형님, 가실 거지요? 예? 같이 가실 거지요?”

솜사탕 장수에게 달려드는 아이들 같은 모습에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까지 애원하니 더는 거절하기도 미안했다. 명진이 다친 이후로 다 같이 밥 한 번 제대로 먹은 적이 없으니, 그 회포를 풀어 줄 필요가 있었다.

제가 술 먹고 놀 군번 이느냐마는. 식구들을 내칠 수도 없었다. 몇 시간 앉아 있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래, 가자. 가.”

석주가 명진과 덕재의 등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조직원들이 왁, 고함을 쳤다가 병원임을 상기하고는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다 저들끼리 눈을 맞추며 키득키득 웃어 댔다.

* * *

석주는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아진의 병실로 돌아왔다. 조직원들의 조름에 못 이겨 1차 국밥집을 지나 2차인 전집에서까지 앉아 있다가 오는 참이었다. 명진과 덕재를 비롯한 조직원들은 오늘 아주 죽어 보자며 3차로 다시 국밥집을 갔다.

도대체가 부산 놈들은 왜 그렇게까지 국밥에 목숨을 거는 건지. 석주도 부산 놈이지만 가끔은 이골이 났다.

문 앞에 선 석주가 후우, 하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술 냄새가 담뿍 올라왔다.

오늘 석주는 간만에 과음을 했다. 하나같이 눈에 불을 켜고 석주가 술을 마시는지 안 마시는지 지켜보는 탓에 술잔을 뺄 수가 없었다. 염증에는 알코올이 좋다는 개소리를 하며 소주를 가득 따르는데, 다들 얼굴이 시뻘게져서 키들키들 웃는 게 귀여웠다.

석주가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술기운을 흩트렸다. 술 냄새를 빼기 위해 집에 가서 씻고 올까, 하다가 그럼 해가 뜰 때나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말았다.

오늘 밤은 석주가 직접 아진의 병실을 지킬 생각이었다. 조직원들은 마음껏 놀도록 두고.

석주가 고요한 병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꽃님은 벽 쪽에 있는 간이침대에 모로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석주의 등장에도 별다른 변화 없이, 잔잔하게 들썩이는 등을 보아 깊은 잠이 든 것 같았다.

석주가 침대맡 의자에 조용히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아진을 눈에 담았다.

아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곱게 감긴 눈이 평화로웠다. 무슨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도 띠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 위로 파란 달빛이 스몄는데, 그게 참 예뻤다. 동시에 추워 보이기도 했다. 아진은 추위를 많이 타니까.

“…….”

잠시 머뭇거리던 석주가 느리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진의 얼굴 위로 손을 가져갔다. 검은 그림자가 아진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허나 그 손은 금세 치워졌다. 아진의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석주는 커튼을 쳤다. 그리고 협탁 위의 작은 조명등을 켰다. 주광색 빛이 병실을 은은히 밝혔다. 아진의 얼굴 위에도 따뜻한 주홍색이 스몄다.

석주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석주는 아진이 이미 가슴팍까지 꼭꼭 덮고 있는 이불을 올렸다가 내리며 분주하게 굴었다. 아진을 만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아진의 몸에 제 손이 닿으면 흉한 흉터 같은 게 생길 것 같아 두려웠다.

석주는 침대 위로 턱을 괸 채 본격적으로 아진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제가 경찰서에 있던 일주일 동안 아진은 상처를 꾸준히 회복했다. 찢어진 입가도, 터진 입술도, 짓물렀던 눈가도 새살이 착실히 돋아난 상태였다. 목에 난자해 있던 제 잇자국과 입술 자국도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다행이지. 딱 이런 속도로 네 마음에 난 상처도 아물면 좋겠는데.

“아진아…….”

석주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진을 불렀다. 그래 놓고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진아. 내가 이렇게 염치가 없다.

그 산더미 같은 죄를 지어 놓고, 널 보고 있는 지금이 사무치게 좋다. 네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게 기쁘다. 손만 뻗으면 널 만질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

이래야 원. 눈을 뜬 네가 날 두들겨 패도 히죽거리며 웃진 않을지 모르겠다.

석주는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꼼짝 않고 아진을 보고 있었다.

“아진아……. 보고 싶었어…….”

이따금 아무도 듣지 못할 그리움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아진의 뺨을 슬쩍 쓰다듬었다. 손가락 아래로 살짝 짓눌리는 살결이 보드랍고 말랑했다. 그리고 서늘했다.

석주의 미간에 대번에 걱정이 끼었다.

“추워?”

그가 물었다.

“…….”

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석주는 아진이 춥다고 대답한 것처럼 분주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진을 따뜻하게 해 줄 만한 게 어디 없나. 병원에도 온돌을 깔면 좋을 텐데. 아쉬운 대로 이불이라도 하나 더 덮어 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아래에 비치된 여분의 이불을 들치다, 다시 내려놓았다. 질 낮은 이불은 무겁고 거칠었다. 연약한 아진이 이불 두 개에 깔려 죽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덮어 줄 수가 없었다.

뭐 다른 방법이 없나, 소리 없이 탄식하던 석주의 시선에 이불 밖으로 슬쩍 나온 아진의 발이 들어왔다.

“…….”

석주가 우뚝 굳었다. 머뭇거리던 그가 아진의 발을 조심히 쥐었다.

아진은 유독 손발이 찼다. 밤마다 제 방에 오면, 제 옆구리에 손을 비비며 춥다고 고 통통한 입술을 부루퉁히 내밀어 댔다. 그럼 저는 그를 제 품에 앉혀 놓고 저 하얀 발을 꼭꼭 주물러 주곤 했다.

아진은 제 손을 좋아했다. 크고, 단단하고, 따뜻하다고. 처음엔 발을 만져지는 것을 낯설어하고 기피했는데. 나중엔 먼저 슥 발을 내밀곤 했다. ‘추워요.’ 하며 샐쭉 웃는 얼굴이 어찌나 예쁘던지.

저는 그 행동이 매우 기꺼웠다. 아진이 제게 익숙해진 것도, 아진의 발에 제 체온에 스며 따뜻해지는 것도. 가끔 장난스레 손톱 끝으로 발바닥을 슥 긁으면 간지럽다고 키득키득 웃는 것도 좋았다.

석주가 이불 밖으로 아진의 발을 꺼냈다.

아진의 발은 다른 곳과 달리 여전히 상처가 많았다. 무거운 족쇄를 차고 있던 발목에는 붕대가 두툼하니 감겨 있었고, 짓눌린 발등은 살이 헤지다시피 해서 아무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새까맣게 죽었던 여린 살이 이제야 보랏빛으로 색을 바꾸고 있었다.

“…….”

의자에 털썩 앉은 석주가 아진의 발을 조심히 손으로 싸맸다. 작은 발은 발가락까지 남김없이 손에 가려졌다. 석주는 술기운 탓에 더욱 뜨거워진 자신의 체온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그는 발가락을 살살 주물러 주기도 하고, 툭 도드라진 복사뼈나 말랑한 종아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아진의 발등에 입을 맞추고야 말았다. 입술에 닿는 아진의 피부에 등줄기가 다 찌르르 울렸다.

석주는 한참 동안 아진의 발을 주물렀다. 하얬던 아진의 발에 혈색이 돌았다. 뒤꿈치가 분홍색으로 익어 가는 게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아진의 발을 데워 준다는 명목으로 제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근데. 아진이 눈을 뜨고 있었다. 석주는 심장이 덜컥 멈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진아.”

탄성 같은 부름에 천장을 향해 있던 큰 눈이 아래로 내려왔다. 이윽고 그의 신비로운 군청색 눈동자에 석주의 얼굴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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