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아직, 아직 궁금한 게 있어. 그럼 혹시-”
석주는 궁금증을 이어 가지 못했다. 이순이 돌연 벌떡 일어나서는 쾅! 하고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기 때문이었다. 고급 테이블이 파르르 흔들리며 찻잔들도 덩달아 경련했다. 그녀는 갑자기 화가 난 것 같았다. 무엇에 크게 분노한 듯 흰자위 위로 핏줄이 곤두섰다.
“아니-이……. 아니, 아니! 왜 자꾸 캐물어요! 씨팔, 다 내가 했다니까!”
“확인은 해야지.”
석주가 담배를 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테이블 위로 손을 짚은 이순이 상체를 쑥 들이밀었다.
“뭘 확인하고 싶은 건데요? 아진이의 결백? 아니면…….”
“아니면?”
석주가 지포 라이터의 뚜껑을 열며 되물었다.
“당신의 결백?”
“…….”
라이터 휠을 돌리던 석주의 엄지가 우뚝 멈췄다. 이순이 고개를 옆으로 한껏 꺾으며 석주와 강제로 시선을 얽었다. 광기가 번들거리는 눈에 석주는 전신의 근육이 움츠러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궁금하고 애타는 거잖아요.”
“…….”
“뭐 하나는 아진이가 한 게 있지 않을까. 아진이의 잘못이 있지 않을까. 그래야 내가 아진이를 프락치 취급한 게 정당화될 수 있는데, 싶어서. 그래서 묻는 거잖아요.”
“…….”
“당신 진짜 치사하네.”
이순이 쯧쯧 혀를 찼다. 방자하고 겁 없는 행동이었으나 석주는 그녀를 꾸짖지 못했다. 이순의 말이 직격타였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걸 알게 된 제가 왜 부득부득 이 테이블에 앉아 있나 했더니. 그녀의 말마따나 정당성을 부여받고 싶었나 보다.
석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 꼴이 너무 역겨워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을 붙이지 못한 담배를 반으로 뚝 부러트렸다. 두 동강 난 담배를 테이블 위에 하나씩 올려 둔 그가 이순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그쪽이 한 일은 그게 단가? 명진이를 찌르고, 뒷집에 불을 지르고, 약을 훔친 거? 그 복수에 만족하나?”
“그럼요.”
이순이 본인의 의자에 털썩 앉으며 긍정했다. 석주가 두 손을 펼치며 되물었다.
“어째서? 정작 금 사장을 죽인 나는 이렇게 멀쩡히, 상처 하나 없이 있는데.”
“…….”
“금 사장에게 약을 준 것도 나고, 금 사장 목에 칼을 쑤신 것도 난데. 어떻게 만족할 수 있느냔 말이야.”
계속 언급되는 금 사장의 죽음에 이순이 못마땅한 눈으로 석주를 노려봤다. 손톱으로 테이블을 긁던 그녀가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냐는 듯, 넌 어쩜 그것도 모르는 병신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진이 걔가 망가졌잖아요.”
“……뭐?”
“당신 손으로 상처 냈고, 당신이 짓밟았고, 당신이 무너트렸고.”
“…….”
“당신도 나처럼 사람을 잃었으니까 됐어요.”
그 말에 이번에는 석주가 이순을 노려봤다.
잃었다고. 내가. 아진이를.
그럴 리가.
그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그가 지금 내 방에 어떤 꼴로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의 발목을 움켜쥐고 있는데.
석주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는 아진이를 잃지 않았어.”
“그래요?”
“그래.”
그 아이는 여전히 내 집에, 내 방에, 내 품에 있어.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그것을 위해 온갖 파렴치한 짓을 해 왔으니까.
석주가 이순을 또렷이 직시하는데, 이순이 심드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근데 아진이는 당신을 잃었을걸요.”
그 순간, 석주는 세상이 고요해지는 걸 경험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제 숨소리도, 이순이 닥닥 긁어 대는 테이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석주는 딱딱하게 굳은 채로 잠깐 죽었다. 숨을 쉬지도 않았고, 말을 하지도 않았다. 검은 눈동자만이 크게 휘청거렸을 뿐이었다. 움켜쥐고 있던 주먹이 느슨하게 풀렸다. 발바닥으로 전신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사장님, 진짜 제가 안 그랬어요. 저 아무것도 안 훔쳤어요. 저게 뭔지도 몰라요. 저는 그냥,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이러지 마세요. 제발요. 네?’
아득할 정도로 먼 어느 곳에서 아진의 음성이 들려왔다. 발랄하고 활기차게 종알거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힘없고 상처 많은 목소리였다. 드문드문 울음이 끼어 있기도 했고, 고통과 원망이 넘실거리기도 했다.
‘제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어 주실 거죠?’
‘사장님……, 흐으, 제가, 제가 안 그랬어요……. 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아파요, 사장님……. 우흐윽, 아파요…….’
‘사장님 저 빚…… 어, 얼마나…… 남았어요? 마, 많이, 많이 남았어요? 50만 원? 아니면…… 80만 원? 빚 다 갚으면…… 꽃님이 아줌마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실 거예요?’
점점 단조로워지던 아진의 목소리는 이내 감정을 상실했다. 그러다 어제, 그 상실의 끝을 점찍었다.
‘사장님이 미워요.’
‘사장님은 거짓말쟁이야.’
‘당신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끔찍하게 싫어. 저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사장님을 미워할 거예요. 계속 미워할 거야.’
그 말까지 상기한 석주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속이 먹먹했다. 그렇게나 애타게, 간절하게 말했는데. 단 한 문장도 들어주지 못했다. 들어주지 않았다. 무시하고, 외면했다.
석주의 눈동자가 점점 텅 비어 가는데. 이순이 놀리듯 말했다.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다시 알려 줄까요?”
“…….”
이순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립스틱이 진하게 칠해진 입술을 달싹이며 또박또박 말을 나열했다.
“아진이는.”
“…….”
“아무것도.”
“…….”
“안 했어.”
석주의 어깨가 흠칫흠칫 떨렸다. 그녀가 한 음절 음절 말할 때마다 미간에 도끼질을 당하는 것 같았다.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이대로 총을 맞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비겁한 도피까지 바랄 정도였다.
시시각각 창백해지는 석주의 낯에 신난 이순은 계속해서 말을, 진실을 읊어 갔다.
“걔가 한 일이라곤 열심히 설거지하고, 양파 까고, 마루에 기름칠하고, 비질한 것뿐이야. 그러다 당신이 초콜릿 같은 거 갖다 주면 좋아했고, 이제 자기 이름 쓸 줄 안다고 자랑하고. 그런 게 다라고.”
“…….”
“아진이는 무고하고, 무해해.”
“…….”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
“걔는 그냥…… 당신을 좋아하는. 멍청하고, 추위 많이 타는. 절름발이 병신이었어.”
그 말까지 들은 석주가 다급하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꼴사납게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항상 단단하고 넓던 석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입을 틀어막은 손이 움찔움찔 떨렸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제가 너무 역겨웠다.
‘사장님은 거짓말쟁이야.’
그리 말하던 아진의 기분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얼마나 원망스럽고 슬펐을지 감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제가 먼저 약조했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 줄 거라고. 함께하자고.
‘네 부모처럼 널 잃어버리지도 않을 거야. 행여 잃어버린다 해도, 반드시 찾아낼 거다.’
‘외롭게 하지 않으마. 항상 네 곁에 있으마.’
‘그러니 나랑 이렇게 살자.’
그렇게 그 아이를 꾀어내 놓고는, 처참하게 버렸다. 단 한마디도 들어 주지 않았고, 믿어 주지 않았고, 괴롭혔고, 짓밟았고, 손찌검까지 했다.
나는 너를 부득부득 움켜쥐고 있었는데, 네가 날 잡는 손은 매몰차게 쳐 내기만 했구나.
나는 너를 가졌는데, 너는 나를 가지지 못했구나.
대체…… 나는 여태까지 무엇을…… 어쩌다 이렇게…….
석주의 손이 파르르 경련했다. 이순이 그의 거무튀튀한 시야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성공한 복수에 의한 통쾌함이 가득했다. 빨간 입꼬리가 시시때때로 히죽히죽 올라갔다.
“왜 이렇게 됐는지 궁금하죠? 내가 어쩌다 속았나, 싶고?”
“…….”
“강 사장님은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뭐?”
“아진이도, 황명진이도, 식구들도, 회사도, 조직도 다 너무 사랑해서,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서. 그래서 아진이를 손에서 놔 버린 거예요.”
“…….”
“아진이만 사랑했다면 속일 필요도, 속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아진이가 무얼 하든 그게 정의고 이치가 될 테니까.”
“…….”
“나는 이 세상에서, 금 사장님만 연모하거든요. 그래서 모든 게 명확하고 쉬웠어요. 의심할 필요도 망설일 필요도 없었죠.”
“…….”
“사장님도 다음 생에는 아진이만 연모해 보도록 하세요. 그럼 적어도 아진이가 사장님을 잃는 일은 없지 않겠어요?”
흐흥, 이순이 콧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미적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술처럼 꿀꺽꿀꺽 들이켜더니 하,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검은 물이 엉겨 붙은 이순의 빈 찻잔을 보던 석주가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야겠어.”
대화는 끝났다. 진실을 알았다. 아진을 보러 가야 했다. 가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러 가야 했다.
다이닝 룸을 뚜벅뚜벅 가로지르던 석주가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 이순을 뒤돌아봤다. 이순은 테이블에 턱을 괸 채 꼰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심드렁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요? 절 죽이고 가는 걸 깜빡하셨어요?”
“…….”
석주의 입매가 한일자로 다물렸다. 이전이었으면 죽였을 것이다. 이순은 명진을 비롯해 제게, 제 사업에 아주 큰 피해를 끼쳤으니까. 근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저 아진이 보고 싶다는 갈망뿐이었다.
석주는 이렇다 할 말 없이 등을 돌렸다. 그의 어깨에 걸쳐진 두루마기가 크게 펄럭였다. 그가 바쁜 걸음으로 다이닝 룸을 나서는데, 이순이 뒤에서 “아, 사장님!” 하고 석주를 불렀다.
“사장님이 아니라 제가 뭘 깜빡했네요.”
“뭐?”
“박기헌 사장님이 선물 주겠다고 하셨다면서요. 그 선물, 칼이에요.”
“……칼?”
“네. 근데 강 사장님한테 드리는 건 아니고, 다른 사람한테 줬대요.”
석주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칼을 줬다고? 누구한테? 까지 생각하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모든 패를 깐 기헌은 최후의 수단을 쓸 것이다. 제 목숨을 노리거나, 제 목숨과 같은 것을 노리거나.
헌데 전 이리 멀쩡히 있으니,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아진이. 아진이가 위험했다.
석주가 다급하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
홀로 남은 이순이 멀어지는 석주를 바라봤다. 이윽고 그가 사라졌을 때,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응시하는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