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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05화 (105/261)

105화

자멸[自滅]

바쁘게 달리던 석주의 차가 멈추었을 때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아직 오후 3시밖에 안 됐는데 밤이 도래한 것처럼 사위가 어두웠다. 빗소리와 흙냄새, 풀냄새, 물비린내 같은 것들이 온 사방을 가득 메웠다.

석주가 차에서 내렸다. 다른 차에 타고 있던 조직원이 얼른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대령했다. 곧게 선 석주가 전방을 올려다보았다.

2층짜리 양옥 주택이 우뚝 서 있었다. 주택은 돌과 나무가 적절히 섞여 지어졌고, 그 생김새가 제법 호화로웠다.

금 사장의 집이었다. 금 사장이 죽고, 그의 가족이나 먼 친척이나, 욕심 많은 동업자 등이 알아서 처리했을 거라 생각했던 그 집. 애당초 석주가 그에게 받기로 한 건 골드 호텔이 다였던 터라 여기까지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

석주가 크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집 앞에 있는 작은 화단은 겨울이라 꽃이 없었지만, 마른 낙엽도 없었다. 쓰레기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관리를 한다는 뜻이었다.

석주가 다시 집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2층 창문에 처져 있던 커튼이 찰랑거리며 움직였다. 석주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누군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찾던 이면 좋으랴만.

그가 허리춤을 슬쩍 매만졌다. 옆구리에 찬 총이 느껴졌다. 그 존재를 확인한 석주가 이윽고 문 앞에 섰다. 그 후 초인종으로 손을 뻗는데. 문 너머에서 어렴풋이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대뜸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익숙한 얼굴에 낯선 차림의 여자가 나타났다. 이순이었다.

그녀는 원피스와 드레스의 경계에 있는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목에는 무거워 보일 정도로 큰 보석 목걸이를 하고 있었고, 귀에는 목걸이와 썩 어울리지 않는 진주 귀걸이를 차고 있었다.

하얀 면장갑을 낀 손가락에는 반지를 그득히 채운 채였는데, 반지가 헐거워서 그녀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움직거렸다. 그래서 이순은 반지가 빠지지 않도록 손가락의 마지막 마디를 부러 안으로 말고 있었다. 마치 짐승이 발톱을 세운 것처럼 말이다.

“어서 오세요.”

이순이 빙긋 웃으며 석주를 반겼다. 꼭 이 집의 안주인쯤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석주가 입매를 삐뚜름히 뒤틀었다.

“……온다는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박 사장님이 강 사장님이 찾아올 거라고 알려 주셨거든요.”

이순이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고, 단조로웠다. 꼭 연극하는 배우 같았다. 양반집 마님 역을 맡은 배우 말이다.

“근데도…… 도망을 안 갔네.”

석주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에 이순이 까르르, 웃었다.

“도망이요? 제가요? 제가 왜요? 전 여기서 안 나가요. 우리 집 두고 어딜 가요. 남편 흔적도 다- 여기 있는데.”

“…….”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순의 뒤로 보이는 집 안을 살폈을 뿐이다. 지나치게 당당한 이순이 이상해서. 혹 집 안에 중호파의 조직원들이 진을 치고 있을까 봐. 들어가자마자 총알에 난도질당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러나 육안으로 보는 집 안은 고요했다. 어디서 고풍스러운 음악도 들려왔다. 전축 같은 걸 틀어 놓은 모양이었다.

석주가 경계 어린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쳐다보는데, 이순이 문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석주를 안으로 안내했다.

“비가 많이 오네요. 장대비가 내릴 건가 봐요. 들어오세요.”

“…….”

“얼른요. 찾을 게 있어서 오신 거잖아요?”

석주가 어금니를 꾹 물었다가 놨다. 그러다 천천히 발을 뗐다. 이순은 척 보기에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약쟁이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미혼인 금 사장을 남편으로 칭하는 것을 보아 꽃님이 말한 ‘병’이 아주 심각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연극에 응해 주지 않으면 원하는 대답을 절대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석주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다른 조직원들이 그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자 이순이 팔을 쭉 내밀어 석주의 등 뒤로 이어진 줄을 끊어 냈다.

“강 사장님만 들어오시면 좋겠는데.”

“뭐라카노, 이 미친년이. 겁대가리 없이…….”

조직원이 눈을 부라리며 이순을 위협했다. 그에 석주가 그의 가슴팍을 슬쩍 뒤로 밀어 내며 달랬다.

“됐어.”

“형님.”

“괜찮아. 바깥에 있어.”

“…….”

조직원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석주가 그를 달래듯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 뒤로 덕재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그와 잠깐 눈을 맞춘 석주가 집으로 들어섰다.

이순이 남은 조직원들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이더니 묵직한 문을 쾅 닫았다.

석주와 이순은 창문이 크게 나 있는 다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순의 말로는 다이닝 룸이란다. 이순은 정말 석주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찻잔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녀는 묘하게 어색한 손길로 석주에게 커피를 내주었다. 넘칠 듯 따라서 잔이 무거울 정도였다. 검은 커피 위로 석주의 얼굴이 비쳤다.

“…….”

넘실거리는 커피를 내려다보던 석주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이순은 쿠키를 오독오독 깨물어 먹고 있었다. 쿠키 끝에 검푸른 곰팡이가 슬어 있는데, 전혀 괘념치 않는 듯했다. 입술에는 립스틱을 입술선 바깥까지 크게 바른 채였는데 그게 쿠키와 찻잔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석주는 이순을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앞으로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하는 데 쓰기 위한 관찰이었다.

커피로 목을 축인 이순이 잔을 내려놓았다. 짝이 맞지 않는 차와 찻잔이 달칵거리며 맞물렸다.

“아진이 관해서 물으러 오셨죠?”

“…….”

단도직입적인 말에 석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얼굴이 우스웠는지 이순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다시 말했다.

“아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안 했어요.”

“…….”

“다 내가 했어요.”

“그 ‘다’에 포함된 일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지.”

“사장님이 아진이가 했다고 생각하는 일 전부, 다요.”

“그 전부, 다가 뭔지 나는 알아야겠어.”

석주가 단호히 말했다. 그에 이순이 귀찮다는 듯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테이블 위로 턱을 괬다. 그리고 빗방울이 타닥타닥 떨어지는 창밖을 보며 혀를 끌었다.

“쓰읍……. 너무 많아서 기억이 다 나진 않는데, 대충 읊자면, 진걸이한테 열쇠를 줬어요. 집 열쇠 꾸러미요. 사장님 서재 책상 둘째 서랍에 있던 거 말이에요. 그게 있어야 여기저기 드나들기 쉬우니까.”

“…….”

“그리고 뒷집에서 약을 빼다 담벼락 아래에 묻었고, 창고에 불도 질렀어요. 꽃님이 아줌마가 금방 발견해서 불이 예상한 것보다 작게 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소란 덕에 내가 뒷집에 드나드는 걸 아무도 못 봤으니 됐어요.”

“…….”

“또 뭐가 있더라……. 아, 황명진이, 그놈 생일에 미역국에 약도 탔어요. 일부러 아진이 불러서 미역국 옮기자고 했지요.”

“…….”

“음…… 또 창녀들도 집으로 불렀고, 황명진이 옆구리에 붙어서 방으로 가는 도은이한테 칼도 줬어요.”

이순이 몹시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저지른 짓을 나열하면서도 하등 죄책감도,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떳떳했고 자신감이 넘쳤다. 마치 대의에 앞장선 사람처럼.

이순은 자신이 한 짓을 열거하는 데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오죽하면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자신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시시각각 무너지는 석주의 만면을 구경하며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도 복수의 연장선인 모양이었다.

석주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그리고 머릿속을 가득 메운 의문을 하나씩 하나씩 던지기 시작했다.

“도은. 그 여자를 죽인 것도 당신이 한 짓인가?”

“그렇지요. 도은…… 참 불쌍한 애예요. 나도 걔를 죽이고 싶진 않았는데…….”

“왜 그 여자였지? 그리고 죽이고 싶지 않았다면서 왜 죽였어.”

“황명진이 그놈이 쓰러져야 당신 눈깔이 돌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왜 도은이었냐면, 처음부터 여자를 찾긴 했어요. 원래 사내새끼들이 여자한테는 경계심을 사르르 풀잖아요.”

“…….”

“근데 박기헌 사장님이 도은이를 추천해 주더라고요. 걔네 부모를 데리고 있어서 다루기 쉽다고. 약도 꽤 먹였고 말이에요. 그리고 그년이 전부터 우리 금 사장님한테 오빠 오빠 하면서, 아니, 이건 됐어요.”

“…….”

“아무튼 일 끝나면 나중에 빼 주기로 했는데, 그년이 그새 아진이랑 시시덕거리고 있더라고요.”

“…….”

“아진이 걔가 원래 창녀들이랑 친했어요. 야밤에 물이랑 초콜릿이랑 바리바리 싸 들고 가서 치료도 해 주고, 뭐라고 속닥거리고 있길래 이거 일 나겠다 싶어서 미리 죽였지요.”

나도 사람 죽여 보는 건 처음인데, 찌르고 나니까 또 그렇게 못 할 짓은 아니다, 싶더라고요. 이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다 난데없이 입을 가리며 호호, 하고 웃었다. 도은이 죽던 순간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런 이순을 보던 석주가 눈두덩을 꾹 짓눌렀다. 가감 없이 쏟아지는 진실에 목구멍이 턱턱 막혔다. 그 와중에도 이순이 “커피 왜 안 드세요? 드세요. 얼른.”이라며 재촉해서 찻잔에 입을 붙였다가 떼기도 했다.

행여 이순이 커피에 무언가를 탔을 수도 있지만, 금세 의심을 지워 냈다. 이미 제가 진 상대다. 제집에 있던 이고, 제 밥상을 준비하던 이고, 제 잠자리를 봐 주던 이다. 죽일 마음이었으면 진즉 죽였을 터였다.

혀 위를 맴도는 씁쓸한 커피 맛에 미간을 설핏 구겼다가 푼 석주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새까만 눈동자로 이순을 응시했다.

“그 짓을 다 그쪽이 했다면, 그럼 최진걸이 한 짓은 뭐지?”

“진걸이요? 진걸이는 그냥…… 하찮고 부질없고 쓸모없는, 그런 작은 일들밖에 안 했어요. 걔는 처음부터 당신 눈속임용으로 들인 거라서.”

“고작 그런 일을 하자고 나 대신 칼까지 맞으면서 내게 접근했다? 그걸 믿으라는 건가?”

“아……. 사장님은 너무 이성적이고, 너무 철두철미해요. 그래서 다른 변수를 생각하질 못해.”

“무슨 말이지.”

석주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이순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괬다.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진걸이는…… 금 사장님 양아들이었어요.”

“…….”

“몰랐죠? 상상도 못 했죠? 왜냐하면 사장님이 조사한 바로는 그런 걸 추론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금 사장은 감히 사장님 적수가 못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사람은 죽었고, 진즉 잊어버린 사람이니까.”

“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석주가 헛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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