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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03화 (103/261)
  • 103화

    -아, 그리고 발등에 연고 바르라고 했습니다. 바르는 거 확인도 했고요.

    -예, 형님. 이만 끊겠습니다.

    보고는 특별할 게 없었다. 어젯밤 큰 소동이 있었던 것과 달리 아진은 잘 지내는 듯했다.

    근데 희한하게도, 그게 더 불안했다. 근래에 밥을 줘도 깨작거리고, 반 공기나 먹으면 많이 먹는 거였는데. 오늘은 한 공기를 다 비웠단다. 대부분 시간을 그림을 보며 멍하니 있거나, 잠을 자거나 하더니. 오늘은 또 책을 읽는다고.

    반가운 소식인데, 얼떨떨하고, 겁도 났다. 아무래도 기헌이 엄포를 놓은 게 있어서.

    “그리고 일본에서 약 양을 더 늘릴 수 있겠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요즘 잘 팔린다고 아주 싱글벙글입-”

    “덕재야.”

    석주가 바쁘게 말하는 덕재의 말허리를 잘랐다.

    “예, 형님.”

    덕재가 얼른 석주 쪽으로 돌아섰다. 어딘가 초조한 기색의 석주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입을 뗐다.

    “명진이 병실 옮겼지?”

    “예. 아무렴요. 어제부터 반나절에 한 번씩 옮기고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한테 안 좋다면서 툴툴거리긴 하는데, 뭐 우짜겠습니까. 금태는 이제 혼자 잘 싸돌아다녀서 지가 알아서 피하겠다고 신경 쓰지 말라 카더라고예. 그래가 총이나 하나 줬습니다.”

    “응. 잘했다. 약 공장은?”

    “잘 돌아갑니다. 아들이 딱 지키고 서 있고요. 공장 옥상에는 아예 기관총을 갖다 놨다 아입니까. 대통령이래도 거기는 못 쳐들어옵니다.”

    “……그래.”

    석주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자신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건조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덕재의 눈썹이 설핏 일그러졌다.

    “박기헌 그 새끼 말이 많이 신경 쓰이십니까?”

    “좀…… 그렇네. 또 누가 다칠까 봐.”

    뭐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메슥거렸다. 심장은 거슬릴 정도로 쿵쾅쿵쾅 세게 뛰었고, 입천장이 바짝바짝 말랐다.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건지. 깡패 짓 하면서 이 정도 협박은 질릴 정도로 들어 왔는데. 늦은 밤 제 집 문을 박차고 들이닥친 적들이 한둘도 아닌데. 죽고 사는 것에 그렇게 큰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여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석주가 볼 안쪽 살을 잘근거릴 때였다. 저 멀리서 투닥탁,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석주와 금태가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총구가 지하 계단을 겨누었다. 지하는 조직원 중에서도 허락된 이들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주 못 들어올 것도 없지만, 뛰어오는 건 분명 이상했다.

    곧 발소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익숙한 얼굴의 조직원이었다. 석주가 한숨과 함께 총을 내렸다.

    조직원은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가 큰 목소리로 석주를 부르며 달려왔다.

    “형님!”

    “…….”

    “형님!”

    “뭔데.”

    반갑지 않은 야단에 석주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가 주머니에 총을 집어넣는데. 조직원이 앞으로 바짝 다가오며 거친 숨소리와 함께 말했다.

    “꽃님이 아줌마가…… 왔습니다.”

    이상한 말이었다. 꽃님이 아줌마를 찾았다면 찾았지. 왔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제 발로 나타났단 말인가.

    석주는 위층으로 올라가면서도 고개를 연신 비틀었다. 대체 상황이 어떻길래 꽃님이 아줌마가 ‘왔다’고 표현할 수가 있나.

    근데 정말이었다. 꽃님이 아줌마가, 회사로 왔다.

    그 순간을 목격한 조직원의 말에 따르면 회사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는데, 트럭 하나가 지나갔단다. 근데 얼마 가지 않아서 후진을 하더니, 사람 하나를 내려놓고는 잡을 새도 없이 쌩-하고 사라져 버렸단다.

    꽃님은 자신의 다리로 서지 못했다. 결국 조직원들에게 짐짝처럼 들려서 회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손님들이 앉으라 만들어 둔 기다란 소파에 몸을 뉘었다. 몇 분 뒤 나타난 석주가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오랜만에 마주하는 꽃님을 가만히 바라봤다.

    “…….”

    석주는 이전에, 꽃님을 유심히 본 적이 딱히 없었다. 그래 봐야 먼 거리에서 아진과 시시덕거리는 것 정도만 봤다. 꽃님은 대부분 부엌에 있었고, 다실로 나오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도 석주는 못 본 사이 꽃님이 아주 고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꽃님은 살이 많이 빠졌다. 이전에는 아진의 두 배에 달하는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팔목도 두툼하고, 배도 푸짐하게 나와서 부루퉁한 표정을 내내 유지하고 있음에도 어쩐지 인심이 좋아 보였다.

    근데 지금은 볼이 홀쭉했다. 눈 주위는 새까맸고, 입술은 희멀겠다. 팔목도 앙상하고, 팔부 바지인 병원복 아래로 드러난 발목은 엿가락이 늘어진 것처럼 가늘었다. 병원복은 흙바닥에서 구른 듯 얼룩져 있었으며, 손등에 꽂힌 링거 없는 링거 줄은 피가 역류한 흔적이 또렷이 박혀 있었다. 쿰쿰한 땀 냄새 같은 것도 났다.

    어떻게 봐도 중호파가 ‘모셔’ 간 행색은 아니었다. 그들의 식구로서 대접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어디 곰팡내 나는 창고에 갇혀 있다가 쓰임새가 다해 버려진 꼴이었다.

    “하…….”

    석주가 짧은 웃음을 흘렸다. 이건 또 무슨 짓인가. 기헌이 주겠다던 선물이 설마 꽃님이었나. 그러고 보니 꽃을 언급하긴 했었지.

    석주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가 풀길 반복했다. 기헌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꽃님을 왜, 뭐 하러 데리고 가 놓고, 뭐 하러 돌려주었나. 그와 저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데, 이 시국에 마치 쓰레기 버리듯 꽃님을 던지고 간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학대와 방치의 흔적을 고스란히 묻힌 꽃님을 제게 보여 주는 저의가 뭐냔 말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식의 눈치 싸움은 어렵다. 차라리 목적이 뚜렷한 칼과 총이 훨씬 쉬웠다.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가 뜬 석주가 꽃님의 가슴 어귀의 환자복을 슬쩍 들쳤다. 피로 얼룩진 붕대가 보였다. 수술 이후 후처리도 안 한 것 같았다. 이렇게 뒀다간 의미 없이 죽을 게 뻔했다.

    “일단…… 병원에 데리고 가.”

    석주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꽃님이 중호파이든, 중호파의 프락치였다가 배신을 당했든, 답은 그녀 본인이 알고 있을 터였다.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제가 판단할 일이겠지만, 어쨌거나 살려야 무슨 말이든 들을 수 있지 않겠나.

    “예, 형님.”

    덕재가 뒤에 서 있던 조직원들에게 손짓했다. 조직원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성 없는 손길로 꽃님을 들어 올리려는데. 꽃님의 주름진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입술도 달싹였다. “잠깐만.” 석주가 다시 꽃님에게로 다가갔다.

    “물……, 물…….”

    꽃님이 건조하게 비틀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에 조직원 하나가 눈치껏 물을 가져왔다. 석주는 꽃님의 등을 받치고 손수 물을 먹여 주었다.

    꽃님은 물을 허겁지겁 마셨다. 그러다 목에 걸려 둔탁하게 기침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물 한 잔을 다 비웠다. 그러고 나서야 힘겹게 눈을 떴다. 그녀는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듯 탁한 눈동자를 한참이나 굴려 댔다. 그러다 뒤늦게 석주를 알아보았다.

    “사장…… 님?”

    “아줌마.”

    “여기가…….”

    “회삽니다. 태회 물산 회사.”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꽃님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안심 어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석주가 그런 그녀를 유심히 지켜봤다. 의심과 경계가 적절히 섞인 눈빛이었다.

    그때, 꽃님이 눈을 부릅뜨더니 돌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이 공간에서 그녀 빼고 모든 이가 껄끄러워하는 이름을 언급했다.

    “아진, 아진이는요?”

    “…….”

    “아진이는 잘 있지요?”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진에 관해 이야기해 주고 싶지 않았다. 무슨 역할로 배달되어 왔는지 모를 꽃님에게 순순히 고할 생각도 없었다.

    아니, 사실 죄책감이 컸다. 꽃님과 아진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든 간에 두 사람은 모자와 가까운 사이이다. 그런 이에게 아진이 어떤 꼴로 제 방에 갇혀 있는지를 낱낱이 고해바치는 건 몹쓸 짓이었다.

    석주가 침묵을 유지하는데, 꽃님이 방정맞게 야단을 떨었다.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인지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아진이 좀 봅시다. 아, 집에, 집에 있겠구나. 일단 전화, 응, 전화 한 통화 합시다. 아진이도 알지요? 내가 없어졌던 거? 세상에, 세상에. 그 여린 게 얼마나 걱정을 했을까. 얼른 알려 줘야 해. 분명 눈이 터지라 울었을 거야. 무식하게 종일 울었겠지, 또. 으이구, 반푼이 같은 게…….”

    “…….”

    “뭐 해요. 얼른 전화 안 걸고. 걸어서 나 찾았다고, 바꿔, 아니 목소리가 영 엉망이라…… 전화하면 또 울겠네. 사내새끼가 울음이 어찌나 많은지…….”

    “…….”

    “그냥 사장님이 전해 줘요. 나 찾았는데 멀쩡하다고. 중호파 그놈들이 아무 짓 안 했다고. 걱정하지 말고 밥이나 푸지게 먹으라고. 내가 금방 간다고.”

    “…….”

    석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꽃님이 우뚝 굳었다. 그녀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마치 꾸짖듯 물었다.

    “……뭘 가만히 섰어?”

    “…….”

    그녀의 채근에도 석주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에 꽃님이 석주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입으로 휘우우, 하며 괴상한 바람 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깊어졌다.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석주는 그 눈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꼭 아득하고 고요한 구덩이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뒷덜미가 선득해지는 기분에 석주가 상체를 뒤로 당기는데. 꽃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못 볼 걸 본 듯한 낯이었다.

    “뭐가, 이렇게…… 새까매…….”

    꽃님이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석주의 팔뚝이나 목덜미, 허벅지, 귓바퀴 같은 곳을 유심히 쳐다봤다.

    석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저 시선일 뿐인데, 옷도 멀쩡히 다 입고 있는데 묘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치부가 드러나는 듯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이 까발려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눈빛에 꿰뚫리면 꿰뚫릴수록 몸이 차게 식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추위가 반갑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때, 꽃님이 눈을 세모꼴로 치켜떴다. 노기가 득실거리는 눈이었다.

    “왜 사장님한테 아진이 혼이 이렇게 묻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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