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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02화 (102/261)

102화

석주는 금세 이부자리를 만들었다. 눈꺼풀이 뻑뻑한 게 짙은 피곤이 올라왔다. 그러잖아도 일이 많은데, 오늘은 기헌의 방문까지 있었던 터라 그 피곤이 곱절이었다. 아진을 껴안고 늦은 아침까지 자고 싶었다.

“아진아.”

석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진을 불렀다. 아진이 느리게 그를 쳐다봤다. 석주가 이부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이리 와. 자게.”

“싫어요.”

아진이 조용히 부정을 내놓았다. 석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약에서 깨지 않았나?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재차 입을 뗐다.

“이리 와.”

“싫어. 안 가.”

아진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스르륵,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완연한 거절이었다.

석주가 이를 꽉 물었다가 놨다. 객기고, 반항이고 이젠 신물이 날 정도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잖아도 바닥을 기던 기분이 지하까지 뚫고 들어갔다.

석주가 성큼성큼 아진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특유의 저음으로 아진을 협박했다.

“아진. 너 이러면 꽃님이 아줌마 평생 못 봐.”

“괜찮아요.”

“……뭐?”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에 석주의 눈가에 당황이 스쳤다. 그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올라가는데. 아진이 파도치는 그림을 응시하며 쉰 목소리로 읊조렸다.

“안 알려 주셔도 돼요.”

“…….”

“이제…… 다 괜찮아요. 아무것도 몰라도 돼.”

“…….”

“궁금하지 않아요…….”

가늘게 이어지던 아진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침잠했다.

“…….”

석주가 그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아진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전혀 가늠이 안 됐다. 꽃님의 이름만 나오면 펄쩍 뛰더니. 이제는 다 상관없단다.

왜. 어째서. 그 이름이 먹히지 않으면,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아진을 잡아 둘 수 있는데?

혼란에 빠진 석주의 검은 눈동자가 경련하는데. 아진이 석주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더니 바스러질 듯 옅게 웃으며 속삭였다. 바람기가 많이 섞인 음성으로, 소곤소곤.

“왜냐면…… 저는 저 파도 보러 갈 거거든요.”

“…….”

이상한 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진이 어떻게 파도를 보러 가나.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었는데.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여기 서울에서 바다를 보러 가려면 차로 몇 시간은 나가야 하는데. 차도 못 타면서 어떻게.

석주가 다급하게 아진의 발목을 확인했다. 혹 아진이 족쇄에 무슨 짓을 했나 싶어서. 그러나 두툼한 족쇄는 여전히 아진의 발목을 아프게 깨물고 있었다.

발등과 발목은 멍이 들다 못해 짓무른 상태였고, 거친 정사에 살갗이 쓸리면서 피도 찔끔찔끔 배어 나오고 있었다. 마른 발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게, 이것을 푼다 하더라도 아진은 제대로 걷지 못할 터였다.

석주가 다시 아진을 바라봤다. 이런 다리로 네가 어떻게 파도를 보러 가.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까지 생각하던 그의 낯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진.”

석주가 그를 불렀다.

“…….”

하지만 아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초점 없는 눈동자로 그림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진. 대답해.”

석주가 채자 그를 불렀다. 허나 이번에도 아진은 침묵을 택했다. 석주가 자신의 머리칼을 연거푸 쓸어 넘겼다. 그러다 아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큼지막한 그림이 시야에 가득 담겨 왔다.

석주가 좋아하던 그림이었다. 파도가 모인다는 뜻을 가진 태회파의 이름을 따 유명 그림쟁이에게 직접 부탁해서 그린 그림. 시간도 오래 걸렸고, 돈도 많이 들였다.

근데 이상하지. 지금은 너무나도 꼴 보기가 싫었다. 넘실거리는 파도 무늬가 저를 희롱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석주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아진은 그런 석주를 멀뚱히 보고 있었다. 석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가늠하지 못한 터라.

근데 석주가 팔을 넓게 벌려 그림을 떼어 냈다. 그 움직임에 그림 속의 파도가 덩달아 출렁거렸다.

“어, 어어…….”

아진이 뒤늦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왜, 왜 그래요. 왜 그래요. 입을 벙긋거렸으나 너무 놀라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석주는 떼어 낸 그림을 들고 창호지 문을 열었다. 마당으로 내던지기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기겁한 아진이 튕기듯 일어났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해 쿠당탕 넘어졌다. 족쇄에 후들거리는 다리에, 뒤틀린 무릎에, 얼얼한 가랑이에. 지금의 아진은 걷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장님, 사장님…….”

“…….”

“사장님, 그러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지 마세요. 네?”

아진이 다급하게 석주에게 팔을 뻗었다. 허나 석주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끝내 그의 손에서 그림이 날아갔다. 넓적하고 커다랗고 무거운 그림은 쿠당탕, 세상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마당에 처박혔다.

경악한 아진이 입을 뻐끔 벌렸다.

이 공허하고 삭막한 방에서, 유일하게 시선을 붙이던 그림이다. 희멀건 벽을 보고 있다간 미쳐 버릴 것 같아서. 벽이 저를 잡아먹을 것 같아서. 부득부득 눈을 맞추고 있던 그림이었다.

아진은 저 파란 그림을 보며 하늘을 떠올렸고, 바다를 상상했고, 파도를 가늠했고, 바람을 느꼈으며, 자유를 만끽했다.

근데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석주는 그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맨발로 성큼성큼 마루를 딛고, 댓돌로 내려가, 마당을 가로지른 그가 그림 앞에 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안, 안 돼…… 안 돼…….”

아진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불이 붙은 라이터는 그대로 아래로 낙하했다. 온통 종이로 이루어진 그림이 순식간에 불탔다. 지척에 있던 석주의 얼굴 역시 새빨간 화염에 물들었다.

아진은 불타는 그림을, 우그러들고 쪼그라드는 자유를 허망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마치 파도가 눈물을 떨구는 것 같았다. 붉은 화염 탓에 피를 흘리는 것 같기도 했다.

불이 세상을 집어삼킬 듯 거칠게 넘실거렸다. 그러나 찰나였다. 그림은 오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재가 됐다. 청량하게 넘실거리던 파도는 검게 타 버렸고, 멋들어지게 쓰여 있던 태회라는 글자 위로는 구멍이 생겼다.

남은 건 매캐한 연기뿐이었다. 그러다 이내 그 연기마저 새까만 밤 사이로 사라지고야 말았다.

“…….”

아랫입술을 겹쳐 문 아진이 눈물을 툭툭 떨구었다. 부릅뜨인 눈에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석주가 대체 절 어디까지 망가트리고 싶은지 가늠이 안 됐다.

아진이 모멸감에 부르르 몸을 떠는데. 석주가 방으로 되돌아왔다. 기다란 다리로 단숨에 마루를 밟고, 방으로 올라와서는 아진을 지나쳤다.

“개새끼…….”

아진이 욕을 짓씹었다. 석주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아진이 그를 팩 노려봤다. 붉게 달아오른 눈에 원망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사장님이 미워요.”

“…….”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

“끔찍하게 싫어. 저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사장님을 미워할 거예요. 계속 미워할 거야.”

아진이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했다. 허나 그래 봐야 말이었다. 저주를 퍼부은 것도 아니고, 칼을 들고 덤빈 것도 아니고,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나약한 몸으로, 창백한 얼굴로 읊조리는 하찮은 분노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석주는 송곳 같은 것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진이 두툼하고 날카로운 송곳으로 제 몸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옆구리와 가슴과 허벅지와 목과 이마와 관자놀이에서 뜨거운 피가 콸콸 쏟아졌다. 발바닥이 축축해지면서 체온이 식었다. 진짜 과다 출혈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머리가 차가워졌고, 볼에는 소름이 돋아났다.

석주는 불현듯 깨달았다.

제가 아무리 거짓된 아진을 만들어도, 그 거짓된 아진을 부여잡고 있어도, 움켜쥐고 있어도.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하던 그날의 시간에서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것을. 이젠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진짜…… 너무…… 싫어…….”

아진이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고는 엉엉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두루마기가 흐트러지며 아진의 마른 등이 나타났다. 보랏빛 멍과, 붉은 손자국과, 빨간 잇자국들이 어지러이 찍힌 등에 석주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가 아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 마른 몸을 추슬러 안았다. 아진이 싫다며 몸부림을 쳤다. 석주의 뺨을 내리치고, 주먹을 휘두르고, 몸을 뒤틀었다. 석주는 고집스레 그를 안고 버텼다.

“아진아. 이만 자자.”

“놔, 놔!”

“자자, 응? 자자…….”

자자, 제발. 오늘을 끝내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오늘은 그냥…….

석주가 두서없이 말을 던졌다. 한동안 가멸차게 반항하던 아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축 늘어트렸다. 기절한 거였다.

석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안심의 한숨인지, 후회의 한숨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오늘 밤은 이렇게 아진을 안고 있을 수 있겠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한, 오만한 안도였다.

* * *

석주는 회사 지하에서 약을 살피고 있었다. 이번 달 동안 필요한 양을 점검하는 거였다. 한쪽에는 필로폰 가루가 소분되어 쌓여 있었고, 또 한쪽에는 풍속점에서 인기가 좋은 하얀 알약들이 갈색 병에 가득 차 있었다.

서류철을 든 덕재가 그의 옆에서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어디로, 이거는 어디로, 라며 설명을 이었다. 석주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아진의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어서 그랬다.

삼십 분 전쯤, 집에서 전화가 왔다. 아진의 상태를 보고하는 조직원의 전화였다.

-예, 형님. 집입니다.

-딱히 보고드릴 건 없습니다. 오전에는 씻는 소리가 났고, 점심은 웬일로 밥도 한 공기를 다 비았습니다. 잘 먹는 것 같아서 밥을 더 줄까, 했더니 됐다고 카더라고요.

-그리고 지금은 형님 책장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아들이 보는 설화 책 같은 거 꺼내가 보고 있습니다.

-뭐, 울지도 않고, 넋 놓은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잘 있습니다. 아가 엔간히 잘 적응한 것 같더라고요.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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