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그쯤,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핏기만 가신 스테이크와 이름 모를 양식들이 큰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두혁이 부르튼 입술을 꽉 짓씹었다. 그의 눈가에 모멸감이 스쳤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뗐을 때였다.
석주가 고기 한 덩어리를 두혁의 앞접시에 옮기며 말했다.
“수락파에게 복수하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미친……. 내가 그걸 좋다고 물 줄 알고 만나자고 한 거요? 나도 중호파 사람이야. 내 식구 등에 칼 꽂는 짓은, 적 좋은 짓은 안 하지. 날 얼마나 병신으로 보는지 모르겠는데, 나도 대굴빡이 달려 있어서 생각이라는 걸 하오.”
“근데 수락파는 식구 등에 칼 꽂았잖아? 그것도 너희 형님 등에?”
“…….”
“아니, 목이던가.”
석주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냐는 듯 눈썹을 구기며 턱을 안으로 당겼다. 쿵, 하고 테이블을 가볍게 내리치기도 했다.
“…….”
두혁의 머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이를 꽉꽉 깨물 때마다 빡빡 민 두피가 꿈틀거렸다. 화가 많이 난 듯했다.
허나 석주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제게 향해 있던 분노를 옮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원래 불은 여기저기 잘 옮겨붙으니까. 설사 그 불을 제가 질렀다 하더라도 말이다.
“수락파가 박기헌을 찾아갔던데.”
“……뭐?”
“자기들이 용마파를 쳐서 이겼으니 당신네 업장을 본인들이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요구했다네. 참, 개-새끼들이야.”
“…….”
“그리고 되게 선심 쓰듯 남은 용마파 식구들을 자기들이 품어 주겠다고 한 모양이야. 그 말에 박기헌이 뭐라고 대답했을까?”
“뭐라고 했는데?”
“음, 박기헌은 그러잖아도 두목도 뒤지고, 사람도 몇 남지 않은 용마파가 영 껄끄러웠을 거야. 식구들끼리 싸운 거라서 바깥에 내보이기도 부끄럽고.”
“…….”
“근데 수락파가 싹 먹어 주고 처리도 해 준다니 뭐, 나쁘지 않지. 괜히 당신들이 자기 찾아와서 질질 짜면 귀찮잖아.”
“귀찮다니, 뭐가-”
“당신 박기헌 찾아가서 복수해 달라, 수락파에게 벌을 내려 달라, 우리를 받아 달라, 그런 거 말할 생각 아니었어? 그것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
“근데 박기헌이 그걸 받아 줄까? 어차피 용마파가 갖고 있던 건 수익도 별로 안 되는 끄나풀 업장들이었고, 패잔병을 받아 봐야 자기 식구랑은 어울리지도 못할 게 뻔한데. 그냥 버리듯 넘기는 게 낫지.”
“…….”
“그리고. 박기헌이랑 수락파가 훨씬 오래됐다며? 당신 쪽은 중호파에 들어간 지 5년도 안 됐다던데. 그게 그렇게 오랜 시간인가?”
“…….”
“아니겠지. 아니니까 박기헌이 용마파를 그리 쉽게 버리는 거겠지.”
두혁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다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석주는 다시금 그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먹어, 먹어, 라며 친근하게 음식 접시를 그에게 밀어 주기도 했다.
“복수하겠다면, 우리 태회파가 도와주고 싶은데.”
두혁이 포크로 푹 고깃덩이를 집어 이로 물어뜯었다. 연한 고기가 주르륵 찢겨서 두혁의 입으로 들어갔다. 그가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입가에 묻은 육즙을 손등으로 대충 벅벅 닦아 냈다.
“……나보고 기헌이 형님을 치라고?”
“아니. 거기까진 안 바라. 수락파. 수락파 우두머리랑 그 아래 몇 놈까지 줄줄이 죽이게 해 주지. 당신 형님 목을 썬 놈들까지 전부.”
“…….”
“우리 애 중에서도 실력 좋은 애들로 보낼 거야. 물론, 총도 제공해 주지.”
“그러다 지면-”
“지는 건 불가능해.”
석주는 마치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는 것처럼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수락파는 이미 큰 피해를 입었다. 듣기론 3분의 1은 죽고, 또 3분의 1은 병원에서 오늘 죽네 내일 죽네 하고 있고, 또 나머지는 사람이 없어 업장 관리에도 허덕거리고 있댔다.
태회파가 그 잔챙이들에 질 리 없었다.
두혁이 꿀꺽 고기를 삼켰다. 그러고는 술로 입을 헹궜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가 석주를 빤히 쳐다봤다.
“그럼 우리는 기헌이 형님한테 모두 뒤진 목숨이오. 가뜩이나 식구들끼리 싸웠다고 눈초리가 장난이 아니란 말이야.”
“…….”
“뭐, 나야 형님 복수하다 뒤지면 속이 다 시원하겠지만, 우리 애들은 아니오. 아직 젊은 애도 있고, 갓난쟁이가 있는 애도 있고…… 개죽음당하기는 불쌍해.”
“그럼 중호파를 나오면 되겠네.”
“……나보고 태회파로 들어오란 말이오?”
그 말에 석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가 느린 동작으로 담배를 꺼냈다.
“아니. 우리는 새 식구 안 받아.”
“……그럼?”
“일이 잘 끝나면 평양이나 두만강 쪽에 따로 업장 내는 데 도움을 주지. 중호파 간섭도, 태회파 간섭도 없는 오로지 용마파 업장. 약도 우리 것과 계약할 수 있도록 해 줄게. 특히 두만강 쪽은 중국과 가까이 붙어 있으니 쏠쏠할 거야. 어때.”
“…….”
“매번 손발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 머리가 되어 봐야지 않나?”
예상치 못한 제안에 두혁의 눈썹이 위로 슬쩍 올라갔다. 그가 술잔의 주둥이를 엄지로 슬슬 문질렀다. 까무잡잡한 낯에 망설임과 불안, 그리고 은근한 기대가 엉망으로 섞여 있었다.
담배를 문 석주가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새빨간 화염이 그의 안면을 환하게 스쳤다가 단숨에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도 약쟁이 한 명 소개받았으면 하는데.”
석주가 느슨히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에 두혁이 고개를 앞으로 쭉 뺐다. 그 역시 예상치 못한 요구라. 대가 없는 도움은 없으니 뭔가 요구할 거라 예상은 했다만, 그게 약쟁이 따위일 줄은 몰랐다.
“……업장 뒤지면 널린 게 약쟁인데 굳이 우리한테?”
“그 약쟁이가 갈 만한 곳을 당신이 알고 있을 것 같아서.”
“…….”
“그리고 그 약쟁이를 당신이 보낸 거로 쳐 줬으면, 해서.”
“……그게 그렇게 만든다고 그 일에 태회파가 껴 있다는 걸 기헌이 형님이 모를 리 없어.”
“괜찮아. 태회파 짓이라는 게 은근히 알려지는 건 상관없어. 대외적으로만 우리가 중호파를 친 게 아니면 돼. 나는 박기헌이 원하는 대로, 거나하게 중호파를 쳐 줄 생각이 없거든.”
“…….”
두혁이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덜덜 떨었다. 그의 손톱이 테이블보를 꼬집었다가 놓길 반복했다. 개소리다. 믿을 수 없다. 한 번 본 놈을, 그것도 여태 적이던 놈의 말을 어찌 믿나.
헌데 믿고 싶었다. 석주는 이상할 정도로 믿음이 갔다.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에 거짓부렁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갖고 놀 정도로 양아치 같지도 않았다.
제가 너무 절박해서 헛것을 보는 건지, 아니면 석주가 실로 그런 이상한 능력이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생각을, 생각을 좀 해 봐야…….”
두혁의 다리가 점점 더 세게 떨리는데, 석주가 양쪽 팔꿈치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그리고 상체를 두혁 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담배 연기를 자욱이 내뿜었다.
“중호파는 몰락하는 난파선이야. 너무 크고 낡아서, 가라앉는 속도가 빠르지.”
“…….”
“얼른얼른 내려야 안 죽어.”
석주는 두혁과의 만남을 끝낸 후, 회사에 잠시 들렀다가, 공장에 갔다가, 병원에 들러 명진을 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땐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난 늦은 밤이었다.
식구와 종들의 인사를 받으며 마당을 가로지른 석주가 구두를 벗었다. 덕재가 한 걸음 뒤에서 자신의 구두를 벗었다. 뒤따라오던 조직원이 두 사람의 구두를 곱게 집어 신발장에 올렸다.
석주가 넥타이를 끌며 덕재에게 말했다.
“사흘 후에 일이 있을 거야. 그전에 명진이랑 금태 병실 옮겨라.”
“예, 형님.”
“약 공장도 단단히 점검하고. 드나드는 놈, 재료 실어 오는 놈, 실어 가는 놈, 잘 살펴.”
“예. 더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아니. 가 봐라. 오늘도 수고했다.”
석주가 툭툭 덕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고는 그들과 헤어져 복도로 접어들었다. 덕재를 비롯한 조직원들이 석주의 등 뒤로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쉬십시오, 형님!”
석주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 방문이 가까워진 시점에서부터 속도를 늦췄다. 문득, 몇 시간 전 두혁과 함께 있던 순간이 떠올랐다. 모든 대화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머뭇거리던 석주가 입을 뗐었다.
‘그리고…….’
‘그리고?’
두혁이 휙 뒤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그의 표정은 제법 인자했다. 동맹 아닌 동맹을 맺게 됐으니 달리 부탁할 게 있거나, 물어볼 게 있다면 얼마든지 대답해 주겠다는 낯이었다.
그러나 석주는,
‘……아니, 아니야.’
라며 입천장을 긁던 질문을 삼키고야 말았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아진에 관해 묻고 싶었다. 그를 아냐. 언제부터 알았냐. 그가 한 짓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이냐. 지금 제가 데리고 있다는 건 아냐. 찾으러 올 것이냐, 아니면 버릴 것이냐. 등등, 궁금한 게 한둘이 아녔는데 그 진실을 들여다볼 용기가 안 났다.
맞다고 하면, 자신들이 심은 프락치가 맞다고 하면 어쩔 것인가. 아진을 죽이기라도 할 것인가. 또 중호파가 그를 버렸다면, 찾을 생각이 없다고 하면, 옳다구나 하며 그를 평생 움켜쥐고 살 것인가.
석주는 아진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단호하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모양 이 꼴로, 아무 득도 실도 없이 아진을 부득부득 잡아 두는 것이다.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석주가 문에 걸린 잠금쇠를 풀었다. 그리고 끼이익, 문을 열었다.
널찍한 방. 소파조차 사라져서 더욱 넓고 황량해 보이는 방. 그 한가운데에 두루마기를 헐겁게 걸친 아진이 등을 보이고 누워 있었다. 호흡할 때마다 얕게 들썩이는 등이 참 매가리 없었다. 축 늘어진 팔이나 종아리에는 남세스러운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
그런 그의 발목에는, 두껍고 넙데데한 족쇄가 엉켜 있었다. 사슬은 방을 가로질러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욕실 앞 구석에 묵직하게 박힌 쇠말뚝과 이어져 있었다.
“…….”
석주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