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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97화 (97/261)

97화

“좋아요……. 아응, 좋아요, 사장님……. 으앗, 흣, 좋아요…….”

아진은 석주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그를 부르며 좋다는 말을 반복했다. 학습된 신음이었다.

“…….”

석주는 제 품으로 넘어온 아진을 가만히 방관하고 있었다. 곧 아진이 사정했다. 목이 뒤로 넘어가고, 발등이 일자로 쭉 펴졌다. 마른 몸이 파르르 떨렸다.

“흐잇…….”

이미 싸 낼 대로 싸 낸 정액은 묽었다. 그래도 약 기운 덕인지 자못 힘차게 쭉 쏘아졌는데, 그것이 석주의 뺨을 더럽혔다. 석주가 손등으로 아진의 정액을 대충 닦아 냈다.

아진이 그의 품에 축 늘어졌다. 그리고 몽롱하게 풀어진 얼굴로 석주를 올려다봤다.

그 얼굴이 몹시도…… 천박했다. 텅 빈 눈동자에, 색욕에 달아오른 광대, 뻐끔거리며 더 큰 쾌락을 갈망하는 붉은 입술.

사실 아진과 함께 밤을 보내면, 제가 살살 물고 빨아서 풀어 놓으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얼굴인데. 지금 이 순간에는 처음 본 것처럼 낯설었다.

네가 남창이긴 남창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석주가 엄지와 중지로 자신의 눈썹을 문질렀다. 눈앞이 자꾸 새까맣게 그늘졌다. 부러 눈을 빠르게 깜빡여 봐도 시야가 계속해서 죽었다. 머리는 차게 식는 반면, 목구멍은 불덩어리를 삼킨 듯이 뜨거웠다.

제가 아무리 거짓된 아진을 갖고 싶어 했더라도, 그게 티가 나면 기분이 나쁜 법이다. 부득부득 가둬 두고 연극을 시켜 놓고 무슨 모순이냐 하겠지만 실로 기분이 나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제가 바라던 건 거짓된 아진이었지 망가진 아진이 아니었는데. 이건 또 다른 방식으로 석주의 세상을 무너트리는 것과 같았다.

석주가 후우, 하고 앞머리를 불어 올리는데.

“사장님…….”

아진이 눅눅하게 젖은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그러더니 눈을 사르르 휘며 속삭였다. 타액 때문에 사탕처럼 반질반질 빛나는 입술이 느리게 달싹였다.

“사장님……, 우리 해요……. 네? 해요……. 하자, 응?”

“…….”

“사장니-임……. 여기 너무, 추워요……. 너무 추워……. 안아 주세요. 안아 줘…….”

아진이 정액이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석주의 손목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석주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기도 하고, 턱 끝에 어색하게 입술을 붙인 채 우물거리기도 했다.

“그래, 아진아. 하자. 해.”

석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입매가 시원하게 벌어지며 멋진 미소가 나타났다. 아진이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돌연 머리채가 잡혔다. 아진의 턱이 하늘을 향해 쳐들렸다.

“아흑…….”

굳은 얼굴의 석주가 시야를 꽉 메웠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웃고 있었는데. 신기하네……. 아진이 요술을 본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머리채가 잡힌 채로도 거부감일랑 없이, 무방비하게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그런 아진에 석주가 입술을 비죽 뒤틀렸다.

“아주, 씨발, 뒤가 헐 때까지 쑤셔 주마, 내가.”

아진이 주르륵 책상 밖으로 끌려 나갔다.

역류하는 파도

석주는 깡패 짓을 썩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으레 근본 없는 깡패가 그러하듯 술에 물을 타 판다든가, 시민들을 위협한다든가, 일면식일랑 없던 가게 사장들에게 앞으로 세를 내라며 난동을 부린다든가, 여자를 사고판다든가, 돈 받고 납치나 살인을 해 준다든가, 도둑질이나 소매치기를 한다든가 등의 일을 하지 않았다.

석주는 오로지 약만 만들어 팔았다. 그것도 두어 달 전에는 외국에만 갖다 팔았다. 불편한 싸움을 귀찮아했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은 중호파가 명진을 찌르면서 어그러졌고, 끝내는 석주가 ‘깡패 짓’을 하게 만들었다.

현재, 그러니까 50년대 서울에서 약은 술만큼이나 그 시장이 컸다. 물론 불법이긴 하나 한창 성장에 박차를 가하느라 정신이 없는 정부는 1g, 3g씩 팔리는 약물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딱히 관심도 없었다. 약쟁이들의 존재감이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기도 했고.

반면 시민들은 유흥거리가 필요했다. 밥 세 끼 챙겨 먹는 게 일과이자 꿈이던 수십 년 전과 달리 부유해진 한국에서, 사람들은 밥보다 커피를 찾았고, 낮보다 밤을 좋아했다.

술과 담배는 하찮은 유흥거리로 전락했고, 그만큼 약의 수요가 넘쳐 났다.

여기서 술과 약의 차이점이 있는데, 술은 공장이 따로 있다. 그러니까 만드는 주류업체가 있다는 거다. 깡패들이 가격을 아무리 높게 팔아도 결국엔 본인들도 어디서 사 와야 했고, 시장 가격엔 적정선이 있었다.

또한 술을 팔려면 술을 마실 수 있는 업장도 있어야 했고, 그럼 사람도 써야 하고, 안주도 팔아야 하고, 남자들의 지갑을 열게 하고, 덤터기 씌울 여자도 있어야 했다.

즉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돈이 꽤 있다는 거다.

반면 약은 직접 만들어 팔았다. 최저가도, 최고가도 없었다. 부르는 게 값이었고,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중독되니 매일 파는 양이 늘었다.

중호파는 자연히 업장 관리에 소홀해지고, 약을 파는 것에 흥미를 두기 시작했다. 중호파 내의 쪼개진 세력들 역시 기헌이 조금씩 나누어 주는 약 사업에 눈독을 들였다.

그래도 여태까지는 알음알음 평화로웠다. 그들이 서울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으니 자기들끼리 누가 조금 덜 벌고 더 번다 한들, 다 같이 많이 버니 괜찮았단 말이다.

하지만 석주가, 태회파가 등장했다. 대충 만들어 팔던 중호파의 약과는 격이 다른 약을 가지고.

손님들은 자연히 태회파 약으로 몰려들었다. 그로 인해 중호파의 돈줄은 직격타를 입었다.

그럼 중호파가 태회파에게 본격적으로 싸움을 걸어올 만했다. 약 공장을 옮겼다 한들, 지금쯤이면 어디 있는지 파악했을 것이고, 그 밖에 약을 어떻게 유통하는지도 알 터였다.

그러니 치고, 빼앗아 오면 되는데. 그게 깡패 짓인데. 안타깝게도 태회파는 막 덤벼서 막 빼앗고 막 짓밟을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중호파의 내부 세력이 기헌의 허락 없이, 자기들 멋대로 덤빌 수가 없단 말이다.

태회파 조직원들은 덩치도 지나치게 컸고, 손도 두꺼웠고, 끽해 봐야 각목이나 회칼만 들고 다니는 중호파와 달리 비단 두루마기를 흩날리며 옆구리에 반질반질한 권총을 하나씩 차고 다녔다.

중호파는 사람에게, 즉 말단 식구들에게 그다지 돈을 쓰는 편이 아니었다. 여태 그들을 위협하는 적이 없었고, 식구들에게 총을 주는 건 돈 낭비에 불과했으니 차라리 본인들의 곳간을 채우자는 욕심이 강했다.

그렇게 설렁설렁 살아왔는데, 이제 와 우두머리끼리 돈을 모아 조직원들에게 그 비싼 총을 하나씩 사 주자니 못내 아까운 것이다.

그런 와중에 수입까지 주니 어쩌겠나. 총은 개뿔 옆에 있던 놈의 밥그릇이라도 빼앗아 배를 채워야지.

그렇게 석주가 서울에 약을 풀기 시작한 지 딱 한 달. 중호파 안에서 내분이 일기 시작했다. 하루빨리 태회파를 쳐야 한다며 농성을 부리면서도 뒷발로는 옆 식구의 밥그릇을 슬슬 자신 쪽으로 당겨 왔다.

그러다 결국엔 싸움이 났다. 중호파 내에서 4순위 5순위를 다투던 파들끼리 싸움이 붙었고, 세력이 비등비등했던 만큼 둘 다 크게 다치고 죽었단다. 업장 하나는 당분간 영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박살이 났댔다.

석주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기다리던 소식이기도 했다. 슬슬 명진과 다치고 죽은 식구들의 복수를 할 때가 온 것이다.

“누가 더 많이 다쳤다고?”

“5순위였던 용마파랍니다, 형님.”

“용마파 우두머리는?”

“죽었습니다.”

“죽어? 우두머리가?”

“예. 원래도 사람이 화도 많고 성질도 자주 부렸답니다. 괜히 낄 필요도 없는 싸움에 앞장서다 목에 칼을 맞아가 뒤졌다데요. 지금은 장례식 중이고요.”

“그럼 둘째가 남아 있겠네. 걔랑 좀 만나야겠다.”

“……예?”

“용마파 둘째랑, 만나야겠다고.”

석주의 말에 덕재가 바보 같은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이내 “준비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며칠 뒤. 석주는 용마파의 둘째인 두혁과 얼굴을 마주 보고 앉을 수 있었다.

상복을 입은 두혁이 잔을 가득 채운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맞은편에 앉은 석주가 느리게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더 마셔도 되오?”

두혁이 물었다. 석주가 얼마든지,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혁이 묵직한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콸콸 따랐다. 석주가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조사한 바로, 두혁은 형님을 지극히 존경하고 사랑하던 아우였다. 으레 둘째가 그러하듯, 아무것도 없던 시절 형님에게 도움을 받았고 생명의 은인처럼 모시고 살았단다. 형님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여겼다. 근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저 마음속에 분명 커다란 분노의 구덩이가 생겼을 터였다.

“음식 가져와.”

석주가 문 앞에 서 있던 덕재에게 말했다. 덕재가 고개를 까닥이며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은 서울에서 가장 비싼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다. 10층이라는 고층 건물에 창밖으로 서울 시내가 전부 내려다보였고, 머리 위로는 샹들리에가 출렁거렸으며, 테이블보도 비단처럼 보드라웠다.

석주가 신경 써서 고른 장소였다. 살아남은 게 우두머리였다면 대충 아무 술집에서 만났겠지만 둘째는 아니다. 둘째에게는 특히나 대우를 더 잘해 주어야 한다. 아무래도 마음속에 사무친 게 많을 테니까.

금세 두 번째 잔도 비운 두혁이 탕, 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음식은 됐습니다. 왜 만나자고 했는지나 말하쇼. 피차 얼굴 보고 있기 껄끄러운 사이 아니오?”

“이야기가 길어질 텐데. 그냥 드시죠. 여기 음식 괜찮아.”

석주가 설핏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러자 두혁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룩 곤두섰다.

“……내가 지금 밥 처먹을 꼴로 보입니까? 누구 때문에-”

“수락파 때문이지. 수락파가 용마파 밥그릇에 주둥이를 들이밀어서.”

“…….”

두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석주가 그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미국에서도 귀해서 찾기 힘들다는 비싼 술이 아낌없이 콸콸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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