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96화 (96/261)
  • 96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힘이 들었다.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아진은 교통사고 이후, 평생 자발적인 감금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도박장에서 나왔을 때 본 해가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것일 정도로 갇혀 살았다. 불편함도 몰랐다.

    그럼 여기, 석주의 방에 갇혀 있는 것도 그래야 하는데. 시시각각 정신이 허물어졌다. 석주의 방은 컸지만, 세상으로 삼기엔 좁은 모양이었다.

    그 좁은 세상에서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려니, 말 붙일 이 없이 혼자 덩그러니 있으려니 여간 외롭고 괴로운 게 아니었다.

    석주가 저를 괴롭히는 걸 그만둔 게 아니라 괴롭히는 방법을 바꾼 게 아닌가 싶었다. 앞에서는 저를 만지고, 입을 맞추고, 쓰다듬어 주지만 실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뙤약볕에 바짝 마르다 못해 바스러지는 풀이 된 기분이었다. 오죽하면 오늘은 밥 생각도 없었다. 하루 중 유일한 일과인데도 그랬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게 밥때가 되어 속이 허하다는 게 아니라 정말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듯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심장도, 배고픔을 느끼게 하는 위장도 없이 텅 빈 느낌이었다. 허기짐도 갈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아진은 밥상을 그대로 물렸다. 밥상을 거둬 가던 종이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소파 아래에 무릎을 접어 앉은 아진이 앞을 응시했다. 그림을 보는 거였다. 파란 파도가 세차게 휘몰아치는 그림. 한쪽 구석엔 <汰會>, 즉 태회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아진은 온종일 그 그림을 쳐다봤다.

    아진은 가난하고 좁게 사는 보통의 내륙 사람들이 그러하듯,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아득할 정도로 넓고 크다. 아주 새파랗다. 또는 무서울 정도로 검다. 파도가 호랑이처럼 휘몰아친다. 아니다, 내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발이 얼 정도로 차갑다. 아니, 눈이 따가울 정도로 뜨겁다. 그런 말만 들어 봤다.

    그 상반되는 말들을 추려서 결론을 내린 바, 바다는 마치 석주와 같았다.

    넓은 품에, 말이 없고 고요한데 매우 뜨거우면서 또 가끔은 매우 차가워진다. 쾌청한 봄의 푸른 하늘처럼 상냥하다가도, 검고 시린 겨울의 밤하늘처럼 모질기도 하다. 이 방으로 세상을 가져다주겠다고 할 만큼 크다가, 이 방을 세상으로 삼으라 할 만큼 작기도 하다.

    또 때로는 피부가 간질간질할 정도로 잔잔하고 보드라운 파도가 됐다가, 또 때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눈알이 짜고 코와 귀가 먹먹해질 만큼 세찬 파도가 되기도 한다.

    아진은 석주라는 파도에 휩쓸려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저 깊고 어두운 심해로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진은 어렵지 않게 자신의 말로를 예상할 수 있었다. 난파선이 되어, 이끼가 가득 쓸어, 조각조각 나 심연보다 더 깊은 아래로 가라앉겠지.

    그림 속의 파도는 끊임없이 휘몰아쳤다. 아진은 그 파도에 제가 닳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닳고 닳아서 언젠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 없는, 무서우면서도 기대가 되는, 그런 상상도 해 보았다.

    제가 억울함은 알았어도 우울함은 잘 몰랐는데. 어쩌다 이리됐나.

    자신이 죽고 죽는 상상을 반복하던 아진이 돌연 눈을 번뜩였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 석주의 서재가, 정확히는 석주의 책상이 닿았다. 검은색 책상 서랍 속, 동그랗고 하얀 무언가가 반짝이며 저를 부르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

    아진이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오늘, 석주는 평소보다 조금 서둘러 집으로 왔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아진이 오늘 점심을 먹지 않고 물렸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형님. 그놈아가 밥을 한 개도 안 먹었습니다. 숟가락에 손도 안 댔어요. 반찬이 부실한가, 싶어도 그게 아니었거든요. 형님이 식사에 신경 쓰라 하셔서 불고기도 한 바가지 주고, 호박전이랑 된장찌개에 나물 반찬도 두 개나 줬습니다.

    -근데도 안 먹고 매- 멀거니 벽만 쳐다보는데, 아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얼굴이 새하얀 게 어디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잠깐 본 거라서 뭐라 말씀은 못 드리겠고…… 직접 와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짤막한 보고에 석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아진이 제게 살가워진 이후, 바보처럼 좋다고, 아무 생각 없이 그를 껴안고 살아온 터라.

    근데 난데없이 밥을 굶었다니. 아진은 밥 먹는 걸 매우 중요하게 여기던 이였다. 제 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밥은 꼬박꼬박 먹었다.

    석주는 집으로 오는 내내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어디가 아픈가. 속이 안 좋은가. 아무래도 몇 주 내내 방에만 있으니 우울한 거겠지. 종국엔 앞뒤 사정도 다 잊고 제가 너무 심했나, 하는 자책도 했다.

    낯빛이 컴컴해진 석주가 다급하게 방문을 열었다. 그의 한쪽 손에는 하얗고 두툼한 봉투가 들려 있었다. 언젠가 아진이 맛있게 먹었던 약과가 가득 든 봉투였다. 입맛이 없더라도 군것질은 좀 하지 않을까 싶어 사 온 거였다.

    근데.

    “……아진아?”

    방이 텅 비어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소파로 시선이 향했는데, 늘 그가 앉아 있던 자리가 멀끔했다. 석주는 당황하지 않고 욕실로 향했다. 헌데 욕실도 비어 있었다. 석주의 만면이 단단하게 굳었다. 느슨하게 매고 있던 넥타이가 갑자기 목을 옥죄었다. 숨통이 갑갑했다.

    아진이 없어졌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석주의 손에서 봉투가 떨어졌다. 부러 동글동글하고 예쁘게 생긴 것만 골라 온 약과가 바닥을 나뒹굴며 으스러지고 뭉개졌다.

    석주는 곧장 문으로 향했다. 아진을 찾기 위해서였다. 밥을 안 먹었다고 보고받은 게 몇 시더라. 지금은 몇 시지. 아진이 도망쳤다면 어디로 어떻게 나갔을까. 어디에 숨어 있을까. 혹 이미 중호파가 그를 채 갔으면 어찌해야 하나.

    그가 싸하게 식은 머리를 팽팽 돌리며 문고리를 쥐는데.

    “흣…….”

    가녀린 신음 한 줄기가 석주의 귓불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석주가 팩 고개를 돌렸다. 신음의 시발지를 찾는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시선이 멈춘 곳이 서재였다.

    석주는 고민할 것 없이 서재로 발을 옮겼다. 서재는 아침에 출근할 때와 다른 게 없었다. 책상 위가 헝클어져 있지도 않았고, 값비싼 만년필이나, 중요한 서류 같은 게 사라지지도 않았다. 다만, 책상 의자가 쭉 빠져 벽에 붙어 있었다.

    “으응, 아…….”

    또 다른 신음이 들려왔다. 색색 몰아쉬는 숨소리도 들렸다. 석주가 천천히 책상을 끼고 돌았다.

    가장 먼저 보인 건 하얀 발이었다. 작고, 마른 발. 분홍색 복사뼈와 그보다 색이 조금 진한 뒤꿈치를 가진 발. 멀지 않은 곳에는 낡은 바지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꽉 움켜쥔 손도 보였다. 바닥을 얼마나 할퀴었는지 손끝이 산수유처럼 붉었다.

    또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석주는 모든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아흐……, 흣, 으응!”

    아진은 책상 아래에 들어가 있었다. 부끄러움도 없이 다리를 벌린 채, 잔뜩 발기한 자신의 아래를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얼굴은 새빨갰고, 벙긋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후끈한 신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퍽 놀라운 장면이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별일 아니었다. 자위. 그건 남자들에게 일상 같은 것이고, 죄도 아니다. 그런데도 석주의 얼굴이 서늘하게 식은 건, 바닥에 질퍽하게 흩뿌려진 아진의 정액 사이를 굴러다니는 알약 때문이었다.

    갈색 병이 엎어져서 데굴데굴 이리 굴렀다, 저리 구르고, 아진이 바르작거릴 때마다 그의 허벅지나 가슴 위에 있던 알약이 타닥타닥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꼴을 보던 석주가 자신의 앞머리를 크게 쓸어 넘기며 웃었다.

    “하……. 이 미친 새끼가…….”

    미친 새끼는 아진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건 제 불찰이다. 아진을 가둬 두겠다고 전화선도 뽑아 두고, 방문도 잠가 놓고, 창문까지 막아 놨으면서 약을 이리 허술하게 둔 건 분명 제 불찰이 맞았다.

    아진을 너무 특별하게 여긴 것도 제 불찰이다. 아진은 거의 한 달.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약을 먹었다. 필로폰에 비하면 약한 약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마약이었다. 중독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고, 실로 아진은 이렇게 망가져 버렸다.

    그런데 석주는 이 모습을 예상하지 못했다. 숱하게 봐 온 약쟁이들과 아진을 감히. 감히 동일 선상에 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진이 그들과 같을 줄 몰랐다.

    아진은 아진이니까. 그는 다르니까. 훨씬 신성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존재니까. 약 같은 것에 중독되리라곤 가늠도 못 했다.

    아니, 가늠했나. 제가 그냥 모르는 척해 버린 건가. 제가 집에 오자마자 벙긋 입을 벌리며 약을 원하던 아진을, 외면했나.

    비극적인 불찰이었다. 다 제 탓이었다. 그런데도 분노가, 아진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아진아.”

    석주가 아진을 부르며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진은 석주의 그림자가 그를 온통 뒤덮고 나서야 인기척을 인지했다. 그가 석주를 보며 헤실헤실 예쁘게도 웃었다.

    “헤헤, 사장……님…….”

    바보 같은 웃음소리가 영 아진 같지 않았다. 약에 취해서 그랬다. 꼴을 보아하니 늘 먹던 한두 알이 아니라 한 줌을 삼킨 듯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석주가 이마를 짚었다가 뗐다.

    “그렇게…… 떡 치는 게 좋아? 좆이 받고 싶어?”

    석주가 널브러진 아진의 다리를, 무릎이 은근히 뒤틀려 있으나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다리를 보며 물었다. 비아냥이었는데, 아진은 그것을 판가름할 만큼의 이성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아진이 석주의 가슴팍에 푹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더욱 빨리 자신의 성기를 흔들었다. 엉덩이가 들썩들썩 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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