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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95화 (95/261)
  • 95화

    담뱃재를 재떨이에 턴 석주가 다른 것을 물었다.

    “금태는?”

    “아, 금태는 명진이 형님 병실 바로 옆 병실에 입원시켰습니다. 아가 배때지가 두툼해가 내장은 크게 안 다쳤다 카데요? 수술 금방 끝났고, 정신도 금방 차렸습니다.”

    “다행이네.”

    “예. 개안타고 자꾸 집에 온다 카는데 지랄 말고 일주일은 박혀 있으라고, 거기서 명진이 형님 심심하지 않게 얼굴이나 자주 들이밀라고 하고 왔습니다.”

    “잘했다.”

    석주가 담배를 세게 빨았다가 놨다. 잠시 무언갈 생각하던 그가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나가 보라 손짓했다. 그에 덕재가 어깨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며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형님 팔은…… 우짭니까? 의사 부를까예?”

    “괜찮아. 별거 아냐.”

    “그럼 저녁은요? 다실까지 나오기 귀찮으시죠? 방으로 밥상 들이라 할까예?”

    “응. 그래 주면 고맙고.”

    “예, 형님. 쉬십쇼.”

    덕재가 허리를 한껏 숙이며 인사했다. 그는 아진을 슬쩍 보고는 방을 나갔다. 그 시선에 별별 감정이 다 스며 있었다. 차마 말로 하기 힘들 만큼 부정적인 감정들이었다. 아진이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덕재가 나가고, 방에는 다시 석주와 아진만이 남았다. 아진이 상처에 가루 지혈제를 쏟아붓는 석주를 곁눈질했다.

    듣고 싶어 들은 건 아니지만, 덕재와의 대화를 통해 오늘 석주에게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오늘도 꽃님에 대해 물어볼 수 없을 거라는 걸.

    석주는 온갖 약품이 든 상자를 대충 뒤적거리며 손에 잡히는 걸 아무렇게나 상처에 뿌렸다. 그리고 붕대를 꺼냈다. 팔을 감으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쉬울 리 없었다. 붕대는 석주의 팔에 한 바퀴 감길 만하면 스르륵 풀리고. 또 감길 만하면 주르륵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씨발…….”

    석주가 담배를 문 채 욕설을 흘렸다. 좁아진 미간에 짜증이 잔뜩 끼어 있었다. 종국엔 붕대를 상자에 처박기에 이르렀다.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한 등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아진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 끙 소리를 내며 불편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부산스러운 인기척도 아니었는데 석주가 휙 아진을 뒤돌아봤다. 그 시선에 경계가 가득했다. 행여 아진이 허튼짓이라도 할까 감시하는 눈빛이었다.

    아진은 그것을 뻔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몸을 세웠다. 그리고 절뚝절뚝 석주를 향해 다가갔다. 그 걸음이 몹시 느렸다. 위태롭고 나약하기도 했다.

    방 하나 가로질렀다고 숨이 가빠진 아진이 색색 숨을 몰아쉬며 석주의 옆에 섰다. 그리고 그가 던진 붕대를 주워 들었다.

    “제가…… 해 드릴게요.”

    “…….”

    석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진은 그것을 허락으로 해석했다. 아니었다면 개짓거리 하지 말라며 손부터 올라왔을 게 뻔해서.

    아진은 붕대를 감으려다, 석주의 상처를 가까이서 보고는 멈칫거렸다. 상처가 생각보다 더 깊었다. 지혈제를 두둑이 부었는데도 피가 찔끔찔끔 났다.

    아진이 수건으로 상처를 피해 피를 살살 닦아 냈다. 그러면서 석주를 살폈다. 석주는 담배를 문 채 술잔에 술만 따를 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제가 손가락으로 냅다 상처를 쑤시면 어쩌려고 저리 태평하나.

    입술을 삐죽거린 아진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꿰매야 하는데…….”

    “괜찮아. 그냥 싸매.”

    “이런 상처는 안 꿰매면 살이 안 붙어요. 그럼 썩고, 썩으면 팔 잘라야 할지도 몰라요.”

    “…….”

    “사장님 병신 된다고요. 저처럼.”

    아진이 눈을 치켜뜨며 종알거렸다. 그 말에 석주의 잇새로 뿜어지던 담배 연기가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석주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일 병원 갈게.”

    “…….”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은 아진이 붕대를 싸매기 시작했다. 붕대를 힘주어 당겨 감고, 자르고, 매듭을 묶는 손놀림이 제법 야무졌다. 석주는 간간이 술을 마시며 그런 아진을 보고 있었다.

    치료는 금세 끝났다. 고작 해 봐야 피를 닦고 붕대를 감는 게 다였던지라.

    “다…… 했어요.”

    아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할 일을 마치고 나니 뒤늦게 어색했다. 불편한 다리로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석주처럼 책상에 걸터앉자니 오만방자한 것 같고, 바닥에 퍼질러 앉을 수도 없고.

    잠시 고민하던 아진이 등을 돌렸다. 소파 아래로 돌아가려는 생각이었다. 제 자리가 아니지만, 이 큰 방에서 몸 붙이고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크게 눈에 띄지도 않고, 적당히 그늘져 있고, 값비싼 소파를 더럽히는 것도 아닌 그런 공간.

    근데 석주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슨하던 그의 눈매가 날카로운 오르막을 그리고 있었다.

    “어디 가?”

    “어……. 다리가…… 아파서…….”

    아진이 자신의 허벅지를 슥슥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멍든 다리가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그에 석주가 아, 하고 짧게 탄식하며 아진의 손목을 쥐고 있던 아귀에 힘을 풀었다. 그러더니 엄지로 아진의 하얀 손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진을 바라보는 시선이 짙었다. 그것을 알아챈 아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거리며 무언갈 고민하던 그가 석주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물었다.

    “저…… 약, 약…… 먹을까요?”

    아진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석주가 제가 약 먹은 모습을 좋아한다는 걸. 반항도 하지 않고, 아프다고 질질 짜지도 않고, 좋다고 매달리니 다루기 쉬운 거겠지.

    제가 진짜 남창이 되어 가는 것 같아 끔찍하긴 하지만, 약을 먹으면 저도 편했다. 복잡한 생각 할 것 없이, 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길 필요 없이, 그저 눈앞의 쾌락에 몸을 흔들면 눈 깜짝할 새에 아침이 됐으니까.

    예상치 못한 아진의 물음에 석주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저녁 먹고.”

    “네.”

    아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화가 여기서 끝날 줄 알았다. 근데 석주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우물거렸다. 머뭇거리는 모습이 그답지 않았다.

    아진은 석주를 빤히 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초조함에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가 또 제게 못된 말을 할까 봐, 혹은 꽃님이나 명진에 관해 좋지 않은 소식을 들려줄까 봐 겁이 났다.

    그러나 석주가 내놓은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였다.

    “그…… 저녁…… 같이 먹을까?”

    아진이 눈을 크게 떴다. 몇 초 숨을 멈췄던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제겐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고작 밥 한 끼조차도. 그게 의미가 있든 없든, 이 방에 수감 중인 저는 석주의 말을 따라야 했다.

    괜히 대들었다간 저는 물론 꽃님에게도 좋을 게 없다. 그리고 더는…… 맞고 싶지 않았다. 눈밭에 널브러져 있다 뺨을 맞은 지 이틀이나 됐는데, 아직도 아물 줄 모른다. 볼 안쪽이 터져서 입을 움직일 때마다 조금 아문 게 다시 찢어지고, 또다시 찢어지길 반복했다. 비릿한 피 맛이 계속 혀 위를 맴돌았다.

    그 피 맛은 아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마냥 슬프기만 했다. 한시도 제 처지를 잊게 두질 않아서.

    아진이 석주 몰래 볼 안쪽을 지그시 씹었다. 툭, 하고 살이 뭉개지더니 또 혀 위로 피가 넘실넘실 스몄다.

    * * *

    다음 날 점심. 오늘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석주의 방에 밥상을 놓아두고 갔다. 멍하니 벽을 바라보던 아진이 엉금엉금 밥상을 향해 기어갔다.

    식사 시간은 아진이 하루 중 가장 기대하는 시간이었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유일한 일과이기 때문이었다. 그 밖의 시간은 넋 놓고 허공만 응시하고 있는지라 좋든 싫든 해야 할 게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근데 오늘 밥상은 뭐가 많았다. 반찬 가짓수가 는 건 아니고, 하얀 봉투가 함께 있었다.

    “…….”

    아진이 검지로 봉투를 슬쩍 들쳤다. 크고 작은 약들이 그득히 들어 있었다. 연고와 밴드 등이었다. 아진이 개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玄星 화학공업사 <연고>

    버즘, 베인데, 쓸린데, 화상, 트는살결, 곤충교상, 기타외상]

    그것을 보던 아진이 부르튼 입술을 비죽 뒤틀었다. 미소도 조소도 아닌 기묘한 웃음이었다.

    바르라고 준 것인가. 누가? 밥상만 들여주는 이가 제 걱정을 할 리 없으니…… 석주인가.

    석주는 제가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알고 이것을 준 걸까. 하긴, 그가 만든 상처인데 모를 수가 없겠다. 더군다나 어제도 그 동그란 알약을 먹고 질펀하게 몸을 섞었지 않나.

    저는 석주의 몸이, 얼굴이, 입술이 어떠했는지, 하물며 제가 붕대를 감아 준 팔이 어떻게 됐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석주는 그걸 다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

    근데 이상하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가 패 놓고 약만 주면 단가’ 하며 비아냥거리지도 않았다. 마치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무감했다.

    조물조물 연고를 주무르던 아진이 뚜껑을 땄다. 약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났다. 연고를 물방울만큼 짠 아진이 그것을 입가에 살살 발랐다.

    밥상 위로 연고가 올라왔던 날 이후. 아진은 달라졌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석주가 저의 어떤 모습을 좋아하는지 안 것이다.

    석주가 여전히 밉고 원망스럽지만, 아진은 약자였다. 욕하고, 주먹질을 해 봐야 그를 이길 수 없단 말이다.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이다. 도박장에서도 항시 그렇게 살아왔다. 진걸의 동생을 죽이지 않았음에도 살인자라고 손가락질당하고, 어리다고 밟히고, 절름발이라고 온갖 멸시를 다 당하며 살았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이 불행은 그렇게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았다. 약자인 아진에게는 몹시 당연한 불행인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모든 게 쉬워졌다.

    아진은 매일 웃으며 퇴근하는 석주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하고 꾸벅 인사도 하고, 그의 시중을 들며 조용하고 차분하게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 늦은 밤이 되면, 동그랗고 하얗고 환상적인 알약을 받아먹었다. 그 후엔 두 번에서 세 번. 혹 석주가 지나치게 흥분하면 다섯 번까지도 정사를 나누었고, 그다음엔 같은 이불에 나란히 누워 잤다.

    석주는 치미는 열기를 아진에게 쏟아부었고, 아진은 멀뚱히 누운 채 차게 식은 몸으로 그 열기를 받아먹었다.

    석주는 매일 조금씩 조금씩 기분이 좋아졌다. 그만큼 아진을 대하는 태도도 부드러워졌다. 꼭 걱정일랑 없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염없이 빠졌던 것처럼 가까워졌고, 극과 극에 있는 상대방의 체온을 양껏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면서 아진의 팔자 역시 한결 평화로워졌다. 제 분에 맞지 않는 글공부를 하고, 비싸고 맛있는 외국 과자를 먹고, 따뜻한 바닥에서 자고, 넘치던 사랑을 받던 그 언젠가와 비슷했다.

    겉으로는, 그랬다.

    그리고 그 연극이 2주쯤 반복됐을 때. 겨울이 끝물에 접어들었으나 추위는 더 혹독해졌을 무렵. 아진은 부득부득 부여잡고 있던 영혼을 조금씩 놓기 시작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