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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94화 (94/261)

94화

석주는 그의 손에서 수류탄을 빼내는 데에 집중했다. 약쟁이의 칼이 팔뚝을 가로로 길게 베고 지나갔으나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석주는 약쟁이의 중지를 뒤로 꺾어 부러트리고 나서야 수류탄을 수거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두가 헛숨을 들이켜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조직원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석주에게 다가왔다. 형님, 수류탄 주십시오. 형님, 피하십시오. 다들 난리였다.

허나 석주는 그대로 약쟁이의 머리채를 잡아 옆으로 넘어트린 후, 핼쑥한 얼굴을 시원하게 발로 까 버렸다.

“억…….”

약쟁이가 코피를 흩뿌리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가 들고 있던 칼이 바닥과 충돌하며 쩔그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에 조직원들이 얼른 약쟁이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퍼부었다.

수류탄을 꼭 쥔 석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널브러진 핀을 발견했다. 그것을 얼른 주워 다시 수류탄에 끼웠다. 그제야 사람들이 안심하며 접고 있던 어깨를 폈다.

석주가 수류탄을 찬찬히 돌려 보는데, 조용히 다가온 덕재가 손을 쑥 내밀었다.

“저 주십시오, 형님.”

석주는 별말 없이 그것을 넘겨주었다. 수류탄을 두 손으로 꼭 쥔 덕재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너무 바빠가 누가 오가는지도 제대로 확인 못 했지 말입니다……. 형님 일하시는데 여까지 내려오게 만들고……. 지인-짜 죄송합니다. 수류탄 들고 댐비는 새끼는 또 처음이라가 똘추처럼 행동했습니다.”

“괜찮아. 금태 병원 보내고, 저건 경찰에 신고해서 넘겨. 그리고 저 새끼랑 같이 왔다는 노래 주점 사장. 잡아 와.”

석주가 칼을 맞은 조직원과 그새 피떡이 된 약쟁이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수류탄을 든 덕재가 “예.”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근데 형님 팔은…….”

“됐어. 별거 아냐. 집에 가서 치료하면 돼. 금태부터 챙겨라.”

“예, 형님.”

덕재가 물러났다. 석주는 정신을 잃은 채 양쪽 팔이 잡혀 질질 끌려나가는 약쟁이를 가는 눈으로 쳐다봤다. 담배를 문 그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참, 약쟁이들을 잘 다뤄…….”

기헌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석주는 약을 파는 이고, 그만큼 약쟁이들을 종종 보긴 하지만, 말 그대로 종종이다.

약을 만들어 해외로 보내기만 하고, 배달과 판매는 그 나라의 조직들이 알아서 하니 이렇게 면대면으로 약쟁이와 맞닥트릴 일은 많지 않았다. 최근 부딪혔던 약쟁이라 하면, 인천 공장에서 한 번. 그리고 죽은 도은 한 번. 그렇게 두 번이 다다.

둘 다 중호파에서 보낸 것이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약쟁이가 수류탄을 어디서 구해서, 종로 한복판에 있는 물산 회사까지 어떻게까지 물 흐르듯 들어왔겠나.

중호파는 생산부터 판매까지 모두 본인들이 하는 데다가, 업장까지 직접 굴리니 약쟁이 다루는 데에는 아주 도가 텄을 터였다. 약을 사느라 돈을 다 털어먹어서 더는 나올 게 없는 고객에게 마지막으로 약을 왕창 먹여, 칼 몇 방 맞는 거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용병으로 쓰다니. 남는 장사였다.

석주가 담배 필터를 꾹 씹었다. 쓴맛이 났다.

“하여튼 씨발 새끼. 더럽게 노네…….”

* * *

아진은 창호지로 어둠이 스며 올 때쯤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몽롱하고 멍한 게 뇌 한쪽이 고장 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진이 퍽퍽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그런데도 어딘가로 소풍 간 정신머리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불 아래로 꼬물꼬물 발을 집어넣고 온돌 특유의 뜨거움을 즐기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멍하니 있었을까. 댕, 댕, 댕, 종소리가 울렸다. 굳게 닫힌 창호지 문 너머, 사람들이 마당을 밟으며 바쁘게 이동하는 인기척도 들려왔다.

아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방에 불도 밝히고, 이불도 곱게 개켜 농에 넣었다. 술병이 흐트러진 찬장도 정리하고, 소파 쿠션도 양쪽에 하나씩 곱게 두었다.

석주에겐 제가 원수와 다름없는데, 태평하게 늘어져 자는 꼴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석주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야 기회가 올 테니까. 꽃님의 안부를 물어볼 수 있는 기회, 제 결백을 주장할 기회 말이다.

석주를 미워하고 욕하는 건 지금 상황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뻗대 봐야 뺨이나 얻어맞고, 입이 막힌 채로 엉덩이나 뚫리겠지. 아진은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아진이 입매에 힘을 꾹 주고 소파 아래에 무릎을 오므리고 앉아 있는데, 끼이익, 끼이익 하고 마루가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위로 저벅저벅 발소리도 어렴풋이 들렸다.

아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내 문고리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석주가 들어섰다.

“…….”

석주는 아진을 흘끔 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서재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옷도 벗지 않고 술잔에 술부터 따랐다. 석주는 반짝이는 크리스털 잔을 가득 채운 술을 찬물 마시듯 벌컥벌컥 마셨다.

아진은 조용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석주는 오늘 유달리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 덕에 아진은 행여 제 숨소리가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숨도 눌러 쉬어야 했다.

빈 잔을 내려놓은 석주가 두루마기를 의자에 대충 걸쳐 두었다. 그 모습을 멀뚱히 보던 아진이 눈썹을 위로 올렸다. 석주의 팔 한쪽이 피로 물든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크게 다친 건지 와이셔츠 팔이 온통 붉었다. 피가 아직도 찔끔찔끔 새어 나와서 셔츠가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정도였다.

아진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였다가 다시 앉았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석주는 피부에 엉겨 붙은 셔츠를 뜯어내듯 벗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와이셔츠가 피를 머금어 무거웠다. 쩍 벌어진 상처가 훤히 드러났다. 살이 갈라진 게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아픔을 상상한 아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미간을 구기는 반면, 석주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찬장 아래 서랍에서 약상자를 꺼낸 석주가 책상에 걸터앉았다. 아진에게 등을 보이는 위치였다. 그는 상처 위에 알코올을 왈칵 쏟아부었다. 그러고는 쓰라린 통각에 슬쩍 미간을 구겼다가 폈다. 그의 등 근육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팔과 손가락을 타고 알코올과 섞인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도 했다.

석주가 짜증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알코올 병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그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곧 하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아진은 그런 석주를 곁눈질로 보고 있었다. 혼자 팔을 치료하려는 것 같은데. 팔이 세 개도 아니고 그게 쉽게 되겠나. 연고는 어떻게 바른다 하더라도 꿰매거나 붕대를 감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아진이 그 몰래 입술을 비쭉였다.

돈도 많고, 힘도 있겠다. 의사를 부르면 될걸. 그도 아니면 집에 득실거리는 조직원을 불러 시키든가. 저번에 인천에 갔다가 등이 죄 찢어져 왔을 때도 그렇고, 석주는 항상 저렇게 손수 자신을 치료하려 했다.

아무래도 우두머리라 그런가. 아랫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걸까.

아진이 검지로 자신의 볼을 무심코 긁다 “아…….” 하고 작게 탄식하며 얼른 손을 거두었다. 석주에게 맞은 볼이 아직 아물지 않아 피부가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그 작은 소리에 석주가 휙 아진을 돌아봤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아진은 힉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고, 석주는 날카로운 눈으로 문을 응시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문 너머의 이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형님. 저 덕재입니다.”

“……들어와.”

석주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덕재가 들어왔다. 조심히 문을 닫은 그가 꼿꼿한 자세로 섰다. 두 손은 단전 아래에 모으고, 어깨를 지나치게 활짝 폈다. 판판하고 까무잡잡한 광대에 묘한 긴장감도 서려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보고는 명진이 도맡아 하다 보니 석주의 방에 드나드는 게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까 그 약쟁이 새끼 말입니다.”

“응.”

“경찰들이 끌고 갔는데…… 아니, 시발 경찰서 가는 길에 차 안에서 경찰 총을 빼앗아가 지 대갈통을 날렸답니다.”

“……뭐?”

“경찰은 범인이 자살해 뿟다고 조사고 뭐고 할 수가 없다. 법이 그렇다. 그래도 인명 피해는 없었으니 다행이지 않냐. 시체는 지들이 처리하겠다. 이카고 그냥 끝냈다니까요.”

“…….”

“근데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어느 약쟁이가 자살을 합니까. 그 새끼들은 사는 이유가 약 빠는 거. 그거 하나라 악착같이 산다 아입니까?”

“…….”

“거기다 형님이 그 새끼 팔도 완전히 작살을 내놔가 경찰들 총을 뺏긴 개뿔, 차 문도 지 손으로 못 열 낀데. 암만 생각해도 개소리지 말입니다.”

석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덕재의 말이 맞았다. 이상했다. 추정할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였다. 경찰이 그 약쟁이를 죽이고 거짓말을 했거나. 중호파에 넘겨주고 죽었다는 둥 자살했다는 둥 대충 둘러댔다거나.

“하…….”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경찰까지 기헌의 편이면 곤란한데. 제가 아무리 힘이 좋고 돈이 많아도 공권력을, 나라를 이길 순 없는지라.

경찰을 매수할 순 있지만,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아무래도 저는 신진 세력이고, 기헌은 서울에 똬리를 튼 지 한참 된 기성 세력이니 그들의 관계가 꽤 끈끈할 거란 말이다. 석주가 돈을 주렁주렁 싸 들고 간다 한들 쉽게 파고들 순 없을 터였다.

석주가 눈썹을 긁으며 한숨을 내쉬는데, 덕재가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노래 주점 사장도 찾았습니다.”

“뭐래?”

“쉽게 입 안 열 줄 알고 아들 밥까지 먹이고 데리고 갔다 아입니까. 이틀은 잡아 패야겠구나, 했는데. 몇 대 맞지도 않고 술술 불더라고요. 중호파에서 시켰다고.”

“…….”

“자기는 협박을 당했네, 중호파가 주점에 불을 지른다고 했네, 지도 그러기 싫었다면서 질질 짜는데 같잖아가 발가락 두 개 썰어 줬습니다.”

“그래…….”

석주가 잇새로 가늘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주점 사장이 어렵지 않게 실토한 건 중호파가 입단속을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는 거다. 오늘 난장의 주최가 본인들이었다는 걸 제가 알길 바랐다는 거고.

석주가 픽 웃음을 흘렸다. 서울 약 시장에 손을 댔다고 경고하는 거라 치기엔 그 협박이 조금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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