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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93화 (93/261)
  • 93화

    이전에는 외국과만 거래하니 회사까지 오는 이가 몇 없었다. 끽해 봐야 물건을 옮겨 주는 배 선장들이나, 점심을 배달하는 밥집 아줌마 정도. 나머지는 전부 태회파 식구들이었고.

    근데 지금은 고객이 넘쳤다. 모두 서울에 업장을 가지고 있는 사장들이었다. 다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도박장 주인, 주점 주인, 카페라면서 여자를 파는 풍속점 주인, 호텔 주인, 노래방 주인에 하물며 종로 백화점 주인까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얼마 전에 서울에 뿌려진 석주의 마약 맛을 못 잊고, 그것이 물어다 준 손님들을 못 잊고 여기까지 계약하러 온 자들이었다.

    ‘계약.’

    으레 약을 사고파는 이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태회파는 늘 계약이라는 번거로운 일을 고수했다.

    그들은 뒷골목 약쟁이들에게 직접 약을 파는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는다. 업소에 정기적으로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을 것인지 계약하고, 약속된 날짜에 업장으로 방문하거나, 업주가 회사로 오면 약을 주고 돈을 받는다.

    대놓고 약만 주고받으면 소문도 나고 덜미 잡히기도 쉬우니 다른 것도 함께 계약한다. 해외에서 들여온 위스키, 시가, 주전부리 등 술집이나 도박장, 풍속점 등에서 필요하다 싶은 것들을 적당한 가격에 팔며 그 사이에 약을 끼워 넣는 것이다.

    그렇게 서울로 사업을 확장하고, 손님이 늘고 그 여파로 번거로운 일 역시 늘면서 직원도 늘렸다.

    그 직원들은 모두 태회파거나 그의 가족들이었다. 처음부터 서울로 함께 올라온 이들도 있고, 부산항을 통해 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는 약재료들이 있어 부산에 있다가 최근에 석주의 부름으로 올라온 조직원들도 있었다. 또 나머지는 그 조직원들의 동생, 누나, 형, 부모 등이었고.

    어떻게 칭해도 ‘식구’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사람들이었다. 배신이나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서 철저히 식구와 핏줄로만 구성한 것이다.

    석주는 담배 연기를 뿜으며 한참 동안 1층을 내려다봤다. 그런 그의 시선의 초점이 묘하게 엇나가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 그랬다.

    눈뜰 기미가 없는 명진의 걱정,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꽃님의 행방, 태회파의 약이 서울을 나도는 걸 알았을 게 분명함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중호파, 그리고…… 아진. 아진. 아진.

    석주가 엄지 뒤쪽으로 이마를 긁었다. 뭐 하나 또렷이 길이 보이는 게 없었다. 제가 열네 살에 조직에 몸담았으니 이 일을 해 온 지 어언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렇게 암흑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이후로 처음이었다.

    오죽하면 그런 생각도 한다. 명진이 눈을 뜨면, 중호파의 우두머리인 기헌의 목을 따면, 다 정리하고 식구들과 함께 시골로 내려가 농사일이나 할까, 하는.

    그리고 그 부질없는 생각의 마침표는 아진으로 끝난다.

    모든 걸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을 때. 해가 쨍쨍하고 잘 자란 벼들이 파도처럼 흔들리는 그 평화로운 그 순간에. 아진이 제 곁에 있을까, 하는…….

    석주의 까만 눈동자가 점점 더 혼탁해지고 있을 때였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책상으로 다가간 석주가 꽁초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물로 마른 입을 축이며 수화기를 들었다.

    “…….”

    석주는 전화를 받아 놓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먼저 정체를 밝히길 기다리는 거였다.

    그런 석주에게 익숙한 발신자가 얼른 입을 뗐다.

    -사장님. 집입니다.

    “……그래.”

    -두 시간 지나서 보고 드릴라고 전화했습니다.

    “응.”

    -그놈아 한 시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래가 밥을 줬는데, 별다른 말 없이 싹 비우더니 그릇까지 차곡차곡 쌓아 놨더라고요. 그리고 지금은…….

    “…….”

    -또 잡니다.

    그 말에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석주는 어제부터 두 시간에 한 번씩 집에 있는 조직원에게 아진과 관련한 보고를 받았다. 제가 집에 갔을 때, 아진이 사라진 걸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무슨 짓을 어떻게 할지 모르니 감시가 필요했다.

    -아까 아침에 인났을 때는 문이 안 열리니까 여기저기 열어도 보고 돌려 보고 하드만 그냥 자더라고요? 근데 밥 먹고 또 잡니다. 아가 많이 피곤한가…….

    “나가고 싶다고 소리치거나 문을 차거나 하진 않아?”

    -예. 전혀요. 별다른 소리도 없습니다. 너무 조용해가 몰래 문 열고 안에 있나, 확인까지 했다니까요. 근데 진짜 그냥 잡니다.

    “그래…….”

    -그래가…… 뭐 딱히 보고 드릴 게 없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럼 두 시간 뒤에 또 전화하겠습니다, 형님.

    “응.”

    석주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잠시 전화기를 내려다보던 그가 물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리고 그것을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아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처음엔 울고불고하더니. 근 며칠은 반항은커녕, 입으로도 싫다는 말을 안 한다.

    꽃님의 이름을 꺼낸 후부터였다.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처럼 얼굴이 하얘지더니 잠깐 이성을 잃었다가 그 후부터는 조용해졌다. 혹 중호파가 꽃님을 잃어버린 건 아닌가. 그래서 제가 꽃님을 데리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다행인데. 아진이 허튼수작을, 그러니까 죽음이나, 도망이나, 죽음으로 인한 도망이나 아무튼, 제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을 거란 뜻이니까.

    석주가 털썩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서랍을 드르륵 빼내 네모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여기저기에 모난 주름이 진 사진에는 아진이 가축처럼 가슴에 번호표를 달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

    석주가 사진 속 아진의 얼굴을 엄지로 슥슥 문댔다.

    사진 속 아진은 진짜 아진이다. 도박장에서 몸을 팔던 남창이고, 중호파의 프락치이고, 명진을 다치게 했고, 뒷집에 불을 지르고, 도은을 죽이고, 물건을 훔치고, 저를 속였던 진짜 아진 말이다.

    석주가 알던 아진은 거짓된 아진이었다. 웃음이 예쁘고, 순진하고, 겁도 많고, 초콜릿을 좋아하고, 쓸데없을 정도로 인사 예절이 바르고, 때로는 당차며, 저를 좋아한다, 보고 싶었다 따위의 말을 수줍게 하는 아진은…… 이제 없다.

    석주의 눈가에 우울이 내려앉았다. 매일같이 되뇌는 현실인데 아직도 아프다. 예전에는 분노가 우선이었다면, 요즘은 아픔과…… 아쉬움이 더 컸다.

    근데 어제는 괜찮았다. 어제는 우리가 그저 행복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하는 밤을 기대하며 하루를 보내는 저와, 밤마다 제 방문을 두드리고 고개를 쏙 내민 채 ‘안녕하세요, 사장님.’ 하고 인사하던 아진이 있던 그때로.

    나란히 누워서 잠들 때까지 서로를 바라보고, 같잖은 장난을 치고, 서로를 만지고, 입술을 비비던 그때로 말이다.

    그것을 오랜만에 다시 느끼니, 석주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황홀함에 사로잡혔다. 허나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엄청난 허탈함에 목이 멨다. 그리고 그 허탈함은 나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거짓된 아진이 갖고 싶은 거라면, 거짓된 아진과 진짜 아진을 바꾸어 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하는. 아주 못됐고 파렴치한 생각 말이다.

    석주가 회사 지하에 수북이 쌓인 동그란 알약을 상기하며 발을 까딱거리는데.

    탕!

    묵직한 굉음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총소리였다. 눈을 부릅뜬 석주는 생각이고 뭐고 할 겨를 없이 서랍에서 총을 들고 사장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들고 있던 아진의 사진이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총소리의 시발지는 다행히 태회파 조직원이었다. 상황이 어떻든 맞은 게 아니라, 쐈다는 것에 석주는 한결 안심했다.

    총을 쏜 조직원은 바닥에 넘어진 채였다. 자신의 옆구리를 쥐고 있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흘렀다. 그의 앞에는 웬 남자가 춤을 추고 있었는데, 바지는 어디 갖다 버린 건지, 쪼그라든 개불 같은 좆을 덜렁거리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내가 대장이다! 아하하, 내가 대장이다, 이놈들아! 내 좆을 빨아라! 내가 짱이야! 으하하하!”

    척 봐도 약쟁이였다. 하는 꼴이 인천에서 봤던 약쟁이들과 하등 다름이 없었다. 허벅지에 총구멍이 났는데 전혀 아파하지 않는 것도 그랬다.

    근데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었다. 칼을 든 약쟁이의 반대 손에 들린 수류탄이었다. 그의 검지에 걸린 핀이 달그락거리며 흔들렸다. 위력이 얼마나 될진 모르겠지만 저게 터졌다간 회사가 난장판이 됨은 물론,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게 뻔했다.

    석주가 있는 대로 미간을 구기는데. 조직원 하나가 그의 귓가로 다가와 상황을 보고했다.

    “저기 종로 끄트머리에 노래 주점 하나 있다 아입니까. 거기 사장이랑 같이 와서 들였는데, 사장은 어디로 내뺐뿟는지 없고 저 새끼만 저렇게 개지랄을 떨고 있습니다. 아우, 약쟁이 새끼…….”

    조직원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석주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권총을 춤추며 날뛰는 약쟁이의 머리를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쉽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

    저는 깡패이나, 이곳은 회사다. 대외적으로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는, 세금도 착실히 내고 세관에 신고도 꼬박꼬박 하는 물산 회사. 근데 이곳에서 총구멍이 난 시체가 문을 오가면 뒷말이 생길 게 뻔했다.

    석주가 권총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 후 성큼성큼 약쟁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뒤에서 수류탄을 든 약쟁이의 손을 통째로 움켜쥐었다. 석주는 190이 훌쩍 넘는 키만큼이나 손이 컸고, 아귀힘도 좋았다. 약쟁이가 푸드덕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면서 석주에게 칼을 마구 휘둘렀다. 석주가 콧잔등으로 달려드는 칼을 고개를 뒤로 물려 피했다. 그러고는 약쟁이의 팔을 아래로 내리며 그의 팔꿈치를 무릎으로 콱 올려쳤다. 그의 어깨에 얹힌 두루마기가 크게 펄럭거렸다.

    뿌드득, 하며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팔꿈치가 뒤틀리고, 팔꿈치에서 손목으로 이어진 부분의 뼈가 날카롭게 부러지며 피부를 뚫고 나왔다. 피가 튀어 올랐다.

    “으하하하, 더 해. 더 해 봐. 더 해!”

    그런데도 약쟁이는 몸을 흔들며 히죽히죽 웃어 댔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