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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90화 (90/261)
  • 90화

    눈에 불을 켜고 집 안을 헤집으면서 어쩌면 제가 제 손으로 아진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죽이기 싫어서 데리고 있는 거면서. 부득부득 제 방에 가둬 두고 독점하는 거면서. 오늘은 진짜 제가 아진을 어떻게 해 버릴 것 같았다. 그만큼 사고와 신경이 헤진 상태였다.

    석주가 아진의 어깨에 푹 얼굴을 묻었다. 아진이 흠칫 떠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그러든 말든, 석주는 그를 부여잡고 한탄 같은 협박을 해 댔다.

    “아진아. 아진아…….”

    “…….”

    “너 아니라도 충분히 좆같으니까 그냥 닥치고 좀, 응? 가만히 있어.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도망치려고 하지 말고. 같잖은 수 쓰지 말고.”

    “저는 도망치려던 게…….”

    “그러다 내가 너 죽여 버리면 어쩌려고 이러니.”

    “…….”

    “뒤지면 꽃님이 아줌마 못 보잖아. 그래도 괜찮아?”

    꽃님. 그 이름에 아진은 숨이 멎다 못해 심장까지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수리 위로 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척추가 꽁꽁 얼어서 그대로 부서져 버릴 것 같기도 했다. 귀가 먹먹해지고 눈앞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아진이 입을 벙긋거렸다. 허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차마 무서워서 묻지 못한 꽃님의 안부였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석주가 아줌마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제가 그녀의 삶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봐. 그러면서도 은근히 바랐다. 석주가 지나가듯 꽃님에 대해 말해 주기를. 그녀가 잘 있다고, 회복했다고, 퇴원할 거라고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지면 못 보잖아.’

    이따위 말을 기다린 게 아니란 말이다. 아진이 고개를 세차게 털어 석주의 손을 떼어 냈다.

    “아, 아줌마는…… 아줌마는 어디 있어요? 아줌마한테 무슨 짓 했어요? 나, 나 때문에?”

    “글쎄.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

    석주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계속 이런 순환이다. 아진이 애걸복걸해서 말하면, 석주가 무시하고. 아진이 간절하게 물으면, 그 역시 석주가 무시한다. 아진은 벽과 이야기하는 듯한 이 답답함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진의 눈가가 시뻘게졌다. 그가 겁도 없이 석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희고, 마른 데다가 작기까지 한 손이면서 그 힘이 제법 옴팡졌다. 목이 졸리는 느낌에 석주가 어렴풋이 미간을 좁혔다.

    “대답해요!”

    “…….”

    “씨발, 무슨 말이냐고! 내가 뭘 아는데! 아줌마 어쨌는데!”

    “…….”

    “개새끼! 아줌마한테 이상한 짓이라도 했어 봐! 진짜 개새끼!”

    석주의 멱살을 놓은 아진이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이성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아줌마가 뭘 잘못했다고! 그냥 아픈 사람인데! 불쌍한 사람인데!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날 걱정해 주는 사람인데! 그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건데! 나만 괴롭히면 됐잖아! 왜 아줌마까지! 사람이 못된 것도 정도가 있지!

    아진의 주먹이 석주의 광대와 이마, 턱, 목, 어깨, 가슴 등을 마구 후려쳤다. 평생 누구를 때려 본 적이 없는지라 그 폭력이 하찮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맞고 있는 석주의 기분이 개운할 리도 없었다.

    석주가 아진의 머리채를 잡아채 뒤로 휙 당겼다. 아진의 목이 그대로 뒤로 꺾였다.

    “아악!”

    목이 부러지는 듯한 힘에 아진이 팔을 허우적거렸다. 손끝에 석주가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그때, 석주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서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거 놔! 놔, 이 씨발 놈아! 개새끼! 아악!”

    아진은 다리를 퍼덕거리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오히려 머리 가죽이 떨어지는 듯한 고통만 일었다. 나중에는 알아서 석주의 걸음에 맞춰 움직이게 됐다.

    서재에 도착한 석주는 책상 서랍장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무언가를 찾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아진이 곁눈질로 그것을 쳐다봤다.

    갈색 유리병이었다.

    크기는 크지 않았다. 석주의 손바닥에는 한참 모자랐고, 아진의 손바닥과 얼추 비슷한 크기였다. 코르크 뚜껑으로 닫힌 병의 겉면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석주가 한 손으로 뚜껑을 땄다. 그리고 유리병을 거꾸로 엎었다. 책상 위로 하얗고 동그란 것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것은 약이었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생김새의, 새끼손톱 크기의 알약.

    아진이 그것을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무슨 약이지. 몸에 좋은 약일 리도 없고. 쥐약 같은 건가. 석주가 드디어 저를 죽이려는 걸까.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약을 먹여 죽이려는 거냔 말이다.

    “사, 사장님. 싫어요……. 싫어요. 잘못, 잘못했어요…….”

    아진이 대번에 태세를 바꾸었다. 석주의 방에서 보낸 며칠 내내 공포와 두려움, 고통 등에는 숱하게 시달렸지만, 죽음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죽으면 안 된다. 그의 말마따나 꽃님을 못 보지 않나. 그건 싫었다. 아무리 미련도 없고 볼품도 없는 삶이라지만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

    그러나 석주는 애원하는 아진에게 찰나의 시선도 허비하지 않았다. 그가 책상 위로 널브러진 알약 하나를 집었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굴리다, 한 알을 더 집었다.

    아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것을 먹고 게거품을 물며 고꾸라져 죽어 있는 제 모습이 상상됐다.

    석주가 죽은 저를 발로 툭툭 두드려 보다 인상을 쓰며 조직원을 부르고, 얼굴 모를 조직원이 저를 산 아무 곳에나 파묻는 것까지 상상됐다. 제 얼굴 위로 내려앉는 차갑고 꿉꿉한 흙이 지나치게 생생히 느껴졌다.

    아진이 덜덜 떨며 큼지막한 눈 가득 눈물을 채우는데. 석주가 그의 앞으로 알약 두 개를 내밀었다.

    “이거. 며칠 전에 새로 만든 약이야. 먹기 쉽게.”

    “흐으, 사장님…….”

    “흥분제라고, 떡 칠 때 좋으라고 만든 건데, 아직 내가 직접 써 보진 않았어. 근데 파는 사람으로서 안 써 볼 수가 없지. 안 그래?”

    “…….”

    “뿌린 업장들 말로는 효과가 죽인대. 이건 쾌락을 12배나 더 느끼게 해 주거든. 어때? 아진이 너도 먹어 볼래?”

    “그게, 무슨…….”

    석주가 빙긋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러더니 쥐고 있던 아진의 머리채를 놓고, 가녀린 선을 가진 턱을 잡아챘다. 아진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싫어. 싫어요, 사장님. 싫- 우웁…….”

    석주가 아진의 입 속으로 알약 두 개를 쑤셔 넣었다. 아진이 뒤늦게 턱에 힘을 주고 석주의 손을 깨물었으나, 그는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아진의 혀뿌리까지 약을 넣은 석주가 손을 빼냈다. 아진은 입을 우물거려 약을 뱉어 내려 했다. 그러나 입술 위로 곧장 술병이 다가왔다. 아진이 입을 꾹 다물자 석주가 엄지와 검지로 코를 꼬집듯 움켜쥐었다. 아진의 얼굴이 질식으로 하얗게 질렸다.

    패배는 늘 그랬듯, 아진의 몫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뇌가 굳는 고통을 참지 못한 아진이 허업-하며 입을 벌렸다. 그와 동시에 차갑고 쓴 술이 목구멍으로 콸콸 쏟아졌다. 혀 위에 걸쳐져 있던 알약 역시 목구멍으로 숭덩 넘어갔다.

    석주는 아진의 입에 손을 넣어 약의 행방을 확인한 후에야 그를 놓아주었다.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아진이 콜록콜록 기침했다. 목구멍에 뭐가 걸린 느낌에 낯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슴도 욱신거렸다.

    아진이 바닥을 긁으며 약을 토해 내려는 부질 없는 짓을 하는 동안, 석주는 알약 두 개를 집어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단번에 삼켰다.

    석주는 빈 술병을 내려놓고, 느릿하게 손목시계를 풀었다. 그 후 와이셔츠 단추도 풀어 헤쳤다. 곧 근육이 두툼하게 잡힌 커다랗고 두꺼운 상박이 드러났다.

    아진이 타액으로 범벅된 입술을 뻐끔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술을 진탕 마신 것처럼 뺨과 몸이 얼얼했다. 아니, 술을 마시긴 마셨지. 근데 이렇게 즉각적으로 술기운이 올라오다니. 이상하다 못해 신기했다.

    억지로 구역질을 하던 아진이 천천히 바닥에 몸을 뉘었다.

    눈밭에서 굴러 차게 식었던 몸이 찌릿찌릿하며 열을 내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매우 무거워서 금방 잠들 것 같은데, 동시에 또 몹시 가벼웠다. 신나는 일을 하는 것처럼 기분이 좋기도 했다.

    마룻바닥이 사선으로 기울었다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 움직임의 잔상이 눈앞에서 춤을 췄다. 아진이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마루를 쓰다듬었다. 근데 제 손가락이 세 개였다. 아니, 일곱 개였다.

    아진이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풍금을 치듯 손가락을 움직여 보기도 했다. 그럼 손가락이 허공에 금빛 잔상을 남겼다. 마치 공기가 저들끼리 부딪치며 전기를 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아진의 눈 앞을 가렸다. 석주였다. 그가 아진의 터진 볼을 쓰다듬었다. 뜨끈한 손바닥이 참 좋았다. 아진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곧 낮은 목소리가 안개처럼 잔잔히 아진을 불렀다.

    “아진아.”

    “…….”

    “더럽다, 너.”

    “…….”

    아진이 물끄러미 석주를 올려다봤다. 더럽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째 기분이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제 볼을 쓰다듬어 주는 손은 거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같이 씻을까?”

    그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웅웅 탁하게 울렸다. 꼭 물속에서 석주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입을 헤, 벌린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욕조를 가득 채운 물이 찰방찰방 휘몰아쳤다. 아진은 어깨를 욕조 벽에 기대고, 욕조 턱을 움켜쥔 채 석주의 움직임에 휩쓸려 들썩이고 있었다. 물에 푹 젖은 머리칼이 둔탁하게 흔들렸다.

    “아……, 흐으……, 윽, 흐우응…….”

    물과 열기에 담뿍 젖은 아진의 얼굴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도박장에서 일하며 약을 하는 사람은 많이 봤다. 그러나 직접 해 본 적은 없었다. 담배도 돈이 없어 못 했는데, 그 비싼 약을 해 봤을까.

    아무튼, 약을 하는 건 처음인데 그 느낌이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뼈를 으슬으슬하게 하던 냉기가 사라진 것도 신기했는데, 고통을 못 느끼는 건 더욱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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