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89화 (89/261)
  • 89화

    아진은 가짜 연기를 내뿜으며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최진걸이 없다. 행방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닷새 동안, 제가 석주의 방에 구겨져 있을 동안 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은도 없다. 제게 죄를 덮어씌운 이도, 무죄를 증명해 줄 이도 없어졌다는 거다.

    “큰일 났네…….”

    아진이 옹송그린 한쪽 무릎 위로 이마를 묻었다. 이렇게 있다간 꼼짝없이 죄인이 될 것 같았다. 이미 죄인이긴 하나 앞으로도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건 또 다른 일이다. 100만 원을 다 갚을 때까지,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죄인으로 석주에게, 사람들에게, 세상에게 미움을 받아야 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는 이미 올가미에 발이 걸렸다. 견고하게 설계된 힘센 올가미에, 발목뼈는 물론 종아리와 무릎이 으스러질 만큼 옴팡지게도 걸렸다. 어떻게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걸 인지하자 돌연, 명치 저 아래에서부터 두껍고 시큼한 게 올라왔다. 꼭 상한 찹쌀떡이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창고 벽을 짚은 아진이 상체를 앞으로 훅 꺾었다.

    “우욱…….”

    목구멍에서 시큼하고 질퍽한 죽이 쏟아져 나왔다. 기껏 먹은 죽이 소화되지 못하고 역류하고 있었다. 아진은 손톱으로 창고 벽을 북북 긁으며 먹었던 것을 모두 토해 냈다.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흠뻑 적셨다. 입가에는 역겨운 토사물과 타액이 덕지덕지 묻었다. 구역질을 하느라 용을 잔뜩 쓴 탓에 목구멍과 폐가 쪼그라드는 듯 갑갑했다.

    “하아, 하아…….”

    아진이 벽에 기댄 채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색색 가쁘게 내쉬는 호흡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시큼한 입이 싫어 눈 한 뭉치를 집어 들어 입가를 벅벅 문댔다. 양껏 베어 물고 입 안을 헹구기도 했다.

    나중엔 그마저도 힘겨워 손을 늘어트렸다. 그의 손바닥에 엉켜 있던 눈이 느리게 녹았다.

    “춥다…….”

    추워. 추운 거 너무 싫은데. 왜 이렇게 춥지.

    아진이 쓸데없이 맑은 하늘을 보며 웅얼거렸다. 몸이 시시각각 차게 식어 갔다. 눈밭 위를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손과 발에 감각이 없었다. 눈도 가물가물 감겼다.

    이렇게 잠들면 죽나.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죄인으로 석주에게 돈을 갚다 죽는 것보다, 그의 차가운 방에서 볼품없이 굶어 죽는 것보다, 이렇게 쾌청한 날에 눈밭에서 아무도 모르게 얼어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아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새파랗던 하늘이 주홍빛이 되고 곧 보랏빛이 되었다. 겨울 해는 성질이 급해서 하루가 짧다고 툴툴거리던 꽃님의 말이 떠올랐다. 아진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스몄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진의 잇새로 흘러나오던 입김이 옅어졌다. 눈 역시 뜨고 있는 것보다 감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때였다. 자박, 자박. 발소리가 들렸다.

    아진이 묵직한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데. 밤하늘보다 크고 검은 손바닥이 다가와 머리채를 콱 틀어쥐었다.

    “악!”

    석주였다. 석주가 저승사자 같은 얼굴로 아진의 앞에 서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 기겁한 아진이 반사적으로 석주의 손을 밀어 내려는데. 석주가 짝, 아진의 뺨을 후려쳤다. 찬 바람에 꽁꽁 얼었던 뺨이 그대로 찢어진 듯한 통각이 일었다.

    “아…….”

    아진이 볼을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뒷덜미를 잡고 걸음을 옮겼다.

    하얀 눈밭 위로 개처럼 질질 끌려간 아진의 발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환상적인 동그라미

    아진은 다시 석주의 방으로 회귀했다. 바닥에 엎어지는 순간, 마당으로 나갔던 게, 불에 그을린 공책을 봤던 게, 도은과 진걸의 부재를 확인한 게,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던 그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아진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엎어진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의 앞에 쪼그려 앉은 석주가 아진의 머리채를 다시 잡아챘다.

    “아흑!”

    아진의 허리가 뒤로 휙 꺾였다.

    석주는 화가 매우 많이 난 것 같았다. 며칠 내내 심드렁하고, 차갑고, 정적으로 굴며 아진을 괴롭히더니. 지금은 분노를 표현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여태 억눌러 왔던 화를 전부 쏟아 내겠다는 것처럼 굴었다.

    “아진아. 세상에 나 엿 먹이고 멀쩡히 도망친 새끼는 하나도 없어. 너도 그래. 너도 도망 못 가. 어디로든, 그게 설사 죽음이라 할지라도. 못 간다고.”

    “사장님, 아파요…….”

    “죽고 싶어도 못 죽어, 넌.”

    “사장님. 제 말 좀,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제발!”

    아진이 빽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머리채를 쥔 석주의 손목을 양손으로 밀어 내며 빠르게 말했다. 눈을 부릅뜨고, 석주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이전에도 했던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제가 안 그랬어요!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명진이 형님도, 도둑질도 제가 안 그랬어요! 도은 누나가 한 말 때문에 이러시는 거면, 그거는, 어…… 오해가 있었는데……. 누가 도은 누나한테 시킨 거예요. 아마, 아마 최진걸이 그랬을 거예요.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제가 왜, 뭣 하러-”

    “하아…….”

    석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짜증. 싫증. 지루함. 따분함 등. 아진의 결백을 들어 주고 알아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의 마음을 읽은 아진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장님. 제, 제 말 들으셨어요?”

    “그래. 들었어.”

    “근데 왜…….”

    왜 아무런 대답도 안 해. 왜 사과하지 않아. 왜 믿어 주지 않아. 왜. 왜. 왜!

    아진의 눈꺼풀이 꿈틀거리며 경련했다.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하고 또 해도 믿어 주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나. 진걸도 없고 도은도 없는데. 하물며 석주는 진걸이 한 짓임을 알고 있다는 모호한 말을 하지도 않았나.

    제 가슴을 갈라 속을 보여 줄 수도 없고. 아니, 차라리 그렇게 제 억울함을 증명하고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진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을 때였다. 석주가 그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이전처럼 움켜쥐거나 제압하는 손놀림은 아니었다. 손바닥 전체로 쓸어내렸다가, 엄지로는 살짝 튀어나온 목젖을 누르고, 나머지 손가락으로는 턱선을 쓰다듬는 게 다른 의도가 있음이 빤히 보였다.

    어떻게 이런 와중에.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인데. 내 말은 단 한 문장도 진심으로 들어 주지 않았으면서!

    아진이 그의 뜨거운 손가락에 부르르 몸을 떠는데. 석주의 손이 저고리 옷깃 안으로 쑥 들어왔다. 동그란 어깨가 꽉 잡혔다. 아진이 눈을 홉뜨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석주의 손이 멀어졌다.

    아진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안 해요. 나 돈 안 갚을 거예요. 안 갚아.”

    “…….”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헐겁게 묶인 아진의 저고리 고름을 쥐고 죽 잡아당기기만 했다. 아진이 새빨갛게 언 손으로 고름을 꽉 움켜쥐며 소리를 질렀다.

    “안 한다고! 싫다고!”

    귓바퀴를 날카롭게 할퀴는 고음에 석주가 설핏 미간을 구겼다. 그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코로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아진의 입을 콱 틀어막았다. 그의 손가락에 짓눌린 볼이 홀쭉해지고, 광대는 불룩해졌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아진이 그의 팔을 밀어 내며 목을 움츠리는데. 석주가 얼굴을 바짝 붙이고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진아. 내가 요즘 바빠. 회사 일이 많거든.”

    “흐우읍! 우우, 으우으!”

    “약도 만들어야 하고, 계약처 만나서 물건이 늦을 것 같다고 양해도 구해야 하고, 찾아야 할 것도 많고, 조심해야 할 것도 많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아.”

    “으웁…….”

    “오늘도 회사에서 좆 빠지게 일을 하는데 말이야.”

    “…….”

    “전화가 왔어.”

    “…….”

    “병원이더라고.”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병원이라는 단어에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의 청색 눈동자가 버석하니 굳었다. 그 눈동자에 석주의 얼굴이 잔뜩 들어찼다. 화가 났음과 동시에 슬퍼 보이는 석주의 얼굴이. 힘겨워 보이는 얼굴이. 많은 것을 짊어져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명진이가…… 숨이 멈췄대.”

    “…….”

    그 말에 아진의 숨 역시 우뚝 멈췄다. 그가 석주의 팔을 밀어 내던 손을 아래로 툭 떨어트렸다. 사라진 반항에 아진의 뺨을 움켜쥐고 있던 석주의 아귀힘도 한결 느슨해졌다.

    “급하게 수술해야 할 것 같으니까 오라더라고.”

    “…….”

    “그래서 다 내팽개치고 갔어. 차가 어찌나 느린지. 아예 병원 앞에다 회사를 차려야 하나 싶더라니까.”

    “…….”

    “아무튼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날 보면서 웃는 거야.”

    “…….”

    “웃어. 되게 이상한 웃음이었어. 눈은 일그러져 있는데, 입매는 올라간. 그런 거 있잖아.”

    “…….”

    “왜 웃냐 물어봤더니 미안하대. 살려 달래. 뭐가 미안하냐, 내가 당신을 왜 죽이냐, 다시 물었더니. 검사하러 검사실에 명진이를 잠깐 옮겨 놨는데, 누가 호흡기를 뗐다는 거야.”

    “…….”

    “명진이 폐가 망가져서 호흡기 없으면 숨을 못 쉬거든. 그래서 명진이가 발작했고, 잠깐 숨이 멎었었는데. 지금은 괜찮대. 수술도 안 해도 될 것 같대.”

    말을 마친 석주가 “하아…….”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임과 동시에 자책이자, 진절머리가 난 듯한 한숨이었다.

    “내가…… 병원을 그렇게 지키는데. 그렇게 두 눈을 뜨고 살피고, 감시하고, 조심하는데. 아직도 틈이 있어. 아직도.”

    “…….”

    “어떻게 해야 그 틈이 사라질까.”

    “…….”

    “응? 아진아. 너는 아냐?”

    석주가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에 잡혀 있던 아진의 얼굴 역시 도리도리 흔들렸다. 앞머리가 팔랑거리며 나부꼈다. 짓눌린 볼 탓에 입술은 오리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왔고, 속눈썹은 느리게 팔랑거렸다. 석주가 그것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석주의 오늘은 힘겨웠다. 아니,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다. 명진이 다친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다.

    매일을 치열하게 보내고 있는데. 그렇게 시달리고 집에 와서 본 게 텅 빈 방이었다. 빨래통에 처박힌 제 두루마기, 사라진 아진, 차가운 냉기. 그 모든 요소에 석주는 머리가 갈라지는 듯한 두통과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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