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88화 (88/261)
  • 88화

    찬 바람이 아진에게로 파도처럼 밀려왔다. 순간 얼굴이 어는 기분에 목을 움츠렸다가 폈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콧구멍은 물론 기도와 폐까지 따끔따끔해질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근데 그게 나쁘지 않았다.

    석주의 방에 넘실거리던 정적인 한기와 달리 상쾌하고 시원한 한기였다. 석주가 매번 창호지 문을 활짝 열어 두고 담배를 태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진은 눈을 감은 채로 공기를 연신 들이마셨다. 고통에 꿉꿉하게 절어 있던 뇌가 찬물에 씻기라도 한 듯 멀끔해졌다.

    그새 코끝이 얼어 불그스름해진 아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뽀얗다 못해 새하얀 세상이 시야에 가득 차올랐다.

    “아…….”

    눈이 왔구나.

    겨울이 온 건 알았지만 눈이 오는 건 몰랐다. 아진이 마당에 가득 쌓인 눈을 멍하니 쳐다봤다.

    서울은 눈이 많이 온다. 모든 겨울이 그랬다. 폭설에 폭설의 연속이라 가끔 도박장과 풍속점에 손님이 없기도 했다. 근데 아진은 눈을 본 적이 몇 번 없다. 평생을 창문 하나 없이 어두침침한 도박장 구석에 처박혀 살아온지라.

    그래서 아무리 괴롭고 슬픈 순간이라도, 눈을 마주하는 건 신비로웠다.

    아진은 무릎이 후들거릴 때까지, 추위에 몸이 꽁꽁 얼 때까지 마루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러다 정면에 서 있던 나무에 새 한 마리가 앉았다가 세차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을 때, 그 반동에 나뭇가지에 소복이 쌓여 있던 눈들이 진눈깨비처럼 흩날렸을 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진은 마당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뒤늦게 발견했다. 수북이 쌓인 눈을 치우고, 얼어서 뒤엉킨 나뭇가지를 꺾고, 솥에 불을 때고, 줄줄이 언 빨래에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을.

    근데 하나같이 얼굴이 낯설었다. 단 한 명도 아는 이가 없었다. 정말 석주가 집안사람을 싹 갈아치운 모양이다.

    아진이 입을 뻐끔 벌렸다.

    눈 때문에 온통 하얀 집에 낯선 사람들, 낯선 풍경, 이따금 절 이상하게 흘끔거리는 시선들.

    아진은 꼭 다른 세상에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철저한 이방인으로 그들과 섞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도박장에 있다가 석주의 집으로 옮겨 왔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긴 했다. 근데 그땐 꽃님도 있었고, 일하는 사람들도 다 아는 이들이니 적응하기 쉬웠다.

    허나 지금은 흙이라도 퍼먹은 듯 가슴이 꽉 막혀 왔다.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아진은 맨발로 마당으로 내려왔다. 발바닥 아래로 차가운 눈이 으스러졌다. 그 냉기가 삐뚜름한 다리를 타고, 등줄기를 기어올라 정수리까지 얼게 했지만 아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절뚝이는 걸음으로 마당을 배회했다.

    누구 한 명은 있을 것이다. 제가 아는 이가 한 명은. 적어도 한 명은 있을 것이다, 라는 부질없는 희망을 쥔 채.

    그러다 뒷마당에 다다랐다. 뒷마당엔 부엌문이 있고, 부엌 창고와 장독대, 그리고 종들의 방이 모여 있었다.

    전보다 더 익숙해진 풍경에 바쁘게 움직이던 아진의 발이 우뚝 멈춰 섰을 때였다. 종아리 언저리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진이 무언가에 홀린 듯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궁이가 있었다. 무엇을 끓이는지 모를 솥이 올라가 있었고, 그 아래로 불이 활활 타오르는 채였다. 시뻘건 아궁이 밖으로 장작 몇 개가 비죽 튀어나와 있었는데, 마른 나뭇잎이나 신문 따위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아진의 눈에 찌르듯 들어왔다.

    불에 그을린 공책이었다.

    아진이 비척비척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지끈거리는 허리를 숙여 한 손으로 공책을 집어 들었다. 반쯤 불에 타서 반만 남은 공책이 벌러덩 펼쳐졌다.

    [아신 이신 아신 아진 아진 아진 아진 아진]

    [깅섯주 깅석주 강섯주 강석주 강석주 강석주]

    삐뚤빼뚤하게 쓰인 이름이 드러났다. 불에 그을려서 더욱 삐뚤게 보이는 이름이. 눈에 얼었다가 젖었다가 해서 넝마와 다름없어진 이름이.

    “…….”

    아진이 그것을 빤히 쳐다봤다. 마침 바람 한 점이 훅 불었다. 공책이 북 찢어지더니 불 속으로 와르르 빨려 들어갔다. 불은 가늘고 나약한 종이를 흔적도 없이 태워 버렸다.

    “…….”

    아진이 그것을 허망한 낯으로 바라봤다. 그는 이름을 잡아먹은 불을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그러다 불똥 하나가 발등에 튀고서야 움찔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아진이 재로 까매진 손을 바지춤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그 후 지나가던 이름 모를 종을 불러 세웠다.

    “저기…….”

    종이 휙 고개를 돌려 아진을 바라봤다. 그의 손에는 꽁꽁 언 동태 한 태가 들려 있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동태들이 달그락거리며 부딪쳤다. 종은 남자였는데 아진보다 예닐곱쯤 많아 보였다. 명진의 또래였다.

    얼굴은 까무잡잡했고 어깨가 떡 벌어진 게 힘이 좋아 보였다. 거기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어서 덩치가 더 커 보였다.

    그가 턱을 들썩였다. 본인을 불러 세운 이유가 뭐냐는 물음이었다.

    바늘처럼 따끔거리는 침을 삼킨 아진이 소리 죽여 물었다.

    “도은…… 도은 누나. 아직 창고에 있어요? 치료는요? 했어요?”

    “도은? 도은이 누군데?”

    “저기, 주차장 창고에…… 누나가, 아니 여자가 있을 텐데…….”

    아진이 마당 저 멀리 뒤꽁무니가 슬쩍 보이는 창고를 가리켰다. 그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가 창고에 왜 있어? 이 추운 날에, 얼어 뒤질 일 있어?”

    그 말에 아진이 헛숨을 들이켰다. 도은이 없어? 남자는 마치 여자가 있었던 일 자체가 없었다는 투로 말했다.

    석주가…… 도은을 죽였나?

    아니면 손쓸 새도 없이 도은이 죽은 건가? 하긴, 총에 맞은 데다가 피도 그렇게 흘렸으니 따로 치료받지 않았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아니, 그도 아니면 혹…… 도은이 도망쳤나? 그래. 제가 도은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 그날이다. 돼지와 진걸이 나타났던 날. 어쩌면 진걸이 도은을 빼돌렸을지도 몰랐다.

    그럼 다행인데. 어떻게든 치료를 받았을 테니.

    ……제게는 다행이 아니지만. 도은이 없으면 제 결백은 누가 증명해 주나.

    아진이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러다 다급하게 남자에게 물었다.

    “최진걸. 최진걸은요?”

    “가는 또 누군데?”

    “이 집, 아니, 태회파에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사람인데, 키가 이만하고 어, 또…….”

    아진이 이렇게 저렇게 진걸을 묘사하는데. 남자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 못 봤는데. 태회파 막내는 금태 아니가? 금태가 3년 전에 들어오지 않았나? 가 이후로 식구 받은 적이 없을 낀데……. 석주 형님이 사람 억수로 가려 받잖아.”

    “…….”

    “금태 가가 아직 막내다. 학생이 뭐 잘못 안 거 아이가?”

    남자가 되물었다. 그는 태회파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것 같았다. 귀에 익은 사투리도 섞인 게 부산에서 올라온 게 아닌가 싶었다.

    아진의 눈동자가 파도 위의 부표처럼 둥실둥실 움직였다. 다 없어졌다. 종들도, 도은도, 진걸도, 꽃님도. 이제 남은 건 저뿐이었다. 그 사실이 말도 못 하게 무서웠다.

    잊고 있던 추위가 훅 아진을 덮쳤다. 아진이 자신의 팔뚝을 감싸 안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남자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멍든 얼굴에, 상처 난 입술에, 넝마 같은 옷에, 맨발에, 절름발이에……. 이 집과 영 어울리지 않는 행색이었다. 비렁뱅이인가…….

    남자의 시선에 경계와 혐오가 적절히 뒤섞였다.

    “근데 그쪽은 누구야? 이렇게 추운데 왜 맨발로 그러고 있어?”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진이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술에 취한 것처럼 절뚝절뚝 뒤뚱뒤뚱 마당을 걸었다. 남자의 시선이 뒤통수로 맹렬히 박혀 오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아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널찍한 마당을 반쯤 가로지른 아진은 찬찬히 집을 훑어보았다. 전과 다름없어 보이나 뭔가가 묘하게 달라졌는데, 뭐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

    아진은 눈밭 위에 멀뚱히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뒤늦게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있었다.

    조직원들의 방 앞, 마루 아래 댓돌에 놓인 운동화가 달라졌다.

    조직원들은 보통 구두를 신고 다닌다. 아무래도 정장에 비단 두루마기를 걸치고 다니니 고무신이나 운동화 같은 걸 신을 순 없는지라. 그리고 그 구두는 대개 현관 신발장에 넣어 둔다.

    반면 운동화는 각자의 방 댓돌에 두곤 했다. 뒷마당에 운동 기구가 있어서 주말마다 조직원들이 운동화나 슬리퍼를 신고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 운동화의 개수가 전과 달리 곱절로 많았다. 단체로 운동화를, 그것도 흙먼지가 묻은 헌 운동화를 샀을 리도 없고. 사람이 늘었다는 뜻이다.

    석주가 사람을 불렀다. 남자가 새로운 식구를 받은 적 없다 했으니, 다른 곳에, 아마도 부산에 있던 식구일 것이다. 그 뜻은 무엇인가. 석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

    아진이 댓돌 아래로 떨어진 운동화 한 짝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진은 도은이 갇혀 있던 창고 뒤에 쪼그려 앉았다. 도은도, 진걸도 없다는 남자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직접 확인하러 온 것인데, 정말 도은이 없었다. 제가 주었던 저고리와 초콜릿도 보이지 않았다.

    아진은 쿰쿰한 냄새가 나는 창고 안을 한참 동안 보다 나왔다. 그리고 잠시 집을 배회하다, 갈 곳이 없어 그냥 창고 뒤에 퍼질러 앉았다. 제대로 굽히지 못하는 한쪽 다리는 눈이 수북이 쌓인 바깥으로 쭉 뻗어 놓았다.

    “하아…….”

    눈이 솜이불처럼 두툼하게 쌓인 담장을 보던 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짙은 입김이 훅 뿜어져 나왔다. 그게 꼭 담배 연기 같았다.

    아진이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입김을 후우, 후우 불어 냈다. 석주가 담배 태우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 언젠가 명진이 담배 피우는 법을 가르쳐 줬던 걸 떠올리면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