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87화 (87/261)
  • 87화

    아진이 번쩍 눈을 떴다. 석주인가. 왜 벌써. 왜 이렇게 빨리. 오늘은 출근을 안 했나? 벌써 주말인가? 그의 눈동자가 좌우로 경련했다.

    근데 어째 소리가 이상하다. 소리가 가벼웠다. 마치 석주보다 덩치가 작은 이가 밟는 듯한, 이를테면 저나 여자쯤 되는 이의 발소리였다.

    아진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석주가 아니라면 누구지. 왜 이곳으로 오는 거지. 저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일어나야 하나, 아니면 잠든 척을 해야 하나, 그도 아니면 죽은 척을 할까.

    고민하던 아진이 소파 등받이 쪽으로 돌아누웠을 때였다. 달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덜커덩, 하더니 또 달칵. 문이 닫혔다.

    “…….”

    고요해진 방 안에 아진이 숨을 꺾어 마셨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방 안에 폭탄을 던져놓고 간 게 아닌가, 싶어지는 소리였다.

    아진은 몇 분간 숨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그러다 슬쩍 몸을 돌려 문 쪽을 쳐다봤다.

    방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다만, 없던 게 생겼다. 밥상이었다.

    아진이 환상을 보는 듯, 반쯤 넋이 빠진 낯으로 그 밥상을 쳐다봤다. 그러다 소파에서 떨어지듯 내려와 밥상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하하…….”

    밥상을 확인한 아진이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밥상에는 음식이 올라가 있었다. 물론, 밥상의 원래 쓰임새가 그러하지만 닷새 내내 구경도 못 하던 음식을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도 석주가 저를 죽게 두진 않으려는 모양이다.

    큼지막한 비빔밥 그릇에 죽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얀 쌀에 잘게 조각낸 채소가 섞여 있었는데, 뽀얀 김이 폴폴 올라왔다. 곁에는 계란국도 있었고, 간장 종지도 있었고, 잘게 찢은 소고기 장조림과 김치도 있었다.

    아진이 수저를 들었다. 순간, 나무 수저가 무거워 팔을 출렁이긴 했지만 떨어트리진 않았다.

    아진은 조심히 죽을 떴다. 그리고 호호 바람을 불었다. 목구멍도, 폐도 따끔하고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호호 불었다. 배가 몹시 고팠으나 거지처럼 음식을 목구멍으로 마구 쑤셔 넣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죽이 조금 식었을 때쯤, 입으로 가져갔다. 큰 숟가락에 입가가 찢어지는 듯했으나 그래도 꾸역꾸역 물어 삼켰다. 오랜만에 만나는 음식에 불모지처럼 버석하던 혀가 촉촉해졌다. 침이 배어 나오며 입천장이 뻐근하게 당겼다.

    아진은 세 숟갈을 연달아 퍼먹었다. 그러다 혼잣말을 읊조렸다.

    “맛없어.”

    꽃님이 아줌마가 해 준 거 먹고 싶다. 아줌마는 죽도 기가 막히게 하는데. 타고난 몸뚱이가 허약한 탓에, 추위도 많이 타는 탓에 사계절 내내 감기나 몸살을 달고 살았다. 그럼 꽃님이 넌 어떻게 되먹은 놈이냐며 욕을 질펀하게 하면서도 죽을 달달 끓여 주곤 했다. 그냥 남은 재료로 대충 만드는 것인데 꽃님의 손길이 닿았다고 그것도 참 맛났다.

    “맛없다. 진짜 맛없어…….”

    아진은 연신 맛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죽을 계속 입으로 퍼 넣었다.

    꽃님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석주도 보고 싶었다. 저를 함부로 대하는 지금의 석주 말고, 딱 일주일 전의 석주가. 제게 친절하던 석주가.

    아진이 죽 한 숟갈을 떴다.

    ‘네가 다리 병신인 것처럼. 나는 잠 병신이야.’

    ‘…….’

    ‘우리 병신끼리 돕고 살까?’

    씩 웃으며 말하던 석주가 떠올랐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뜬 아진이 다시 죽을 펐다.

    ‘네가 특별해서 그래.’

    ‘…….’

    ‘아진이 너는 내 사람 중에서도 유달리 특별해서 손수 약 발라 주는 거야.’

    제게 특별을 운운하던 석주가 떠올랐다. 아진이 죽과 함께 그 특별함을 삼켰다.

    ‘넌 꼭 귀하게 자란 양반집 도련님 같아. 생긴 것도 그렇고. 보들보들한 피부도 그렇고.’

    제 뺨을 보듬어 주며 예쁘다, 예쁘다, 해 주던 석주가 떠올랐다. 아진이 숟가락을 든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붓고, 찢어지고, 피딱지가 앉은 얼굴이 느껴졌다. 피식, 웃음을 흘린 그가 다시 죽을 퍼먹었다.

    ‘왜 안 와.’

    ‘…….’

    ‘기다리는데.’

    ‘……기다리지 마세요.’

    ‘왜. 나 너 없으면 못 자는 거 알잖아.’

    ‘…….’

    ‘너 없어서 사흘 내내 한숨도 못 잤어. 죽을 것 같아. 나 좀 살려 줘라, 아진아.’

    힘도, 돈도, 권력도 가졌으면서 절름발이 몸종에 불과한 제게 애원하던 석주가 떠올랐다. 아진이 입 안을 가득 메운 죽을 우물거렸다. 눈물 한 방울이 죽 그릇 안으로 툭 떨어졌다. 아진이 죽 사이로 스며드는 눈물을 멍하니 응시했다.

    ‘아진아.’

    ‘네.’

    ‘내일도 올 거지?’

    ‘…….’

    ‘모레도 와야 해. 이제 너 없이 잘 자신이 없거든.’

    석주가 떠올랐다. 눈물이 떨어졌다.

    ‘네가 좋아. 네가 제일 좋아.’

    석주가 떠올랐다. 눈물이 떨어졌다.

    ‘아진아. 나는 너 안 버려.’

    ‘…….’

    ‘네 부모처럼 널 잃어버리지도 않을 거야. 행여 잃어버린다 해도, 반드시 찾아낼 거다.’

    ‘…….’

    ‘외롭게 하지 않으마. 항상 네 곁에 있으마.’

    ‘…….’

    ‘그러니 나랑 이렇게 살자.’

    석주가 떠올랐다. 눈물이 떨어졌다.

    “어흐윽……. 흐윽, 흐으…….”

    이내 아진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 와중에도 입으로 죽을 계속해서 쑤셔 넣었다. 가슴이 꽉 막혀서 체할 것 같았는데. 그래도 집어넣고 또 집어넣었다.

    마침내 죽그릇이 비었다. 아진은 그런데도 숟가락을 놓지 못했다.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그것을 움켜쥔 채, 한참 동안 울고 또 울었다.

    목 놓아 울던 아진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꾸역꾸역 욱여넣은 식사를 눈물로 모두 탕진해서 기력이 쭉 빠진 상태였다.

    아진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어쨌거나 뜨끈한 밥으로 속을 채웠더니 한결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바깥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일단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옷을 주워 입었다. 해진 옷이 창피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석주의 셔츠를 빼 입을 순 없는 일이니까. 종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옷을 빌려 입자 싶었다.

    아진은 며칠 내 끌어안고 살던 석주의 두루마기를 빨래통에 버리듯 던졌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밥상을 들고 나갔다.

    본인이 먹은 것을 본인이 치우는 것. 아진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도망을 치려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애당초 아진은 그런 쪽으로 머리를 굴리는 것에 하등 재능이 없었다. 그렇게 복잡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으니까, 머리 없이도 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왔으니까 당연했다.

    아진은 밥상을 들고 절뚝절뚝 복도를 걸었다. 부엌으로 가는 거였다. 제가 할 일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삐걱삐걱 녹슬고 고장 난 몸이긴 하나, 냉골인 석주의 방에 구겨져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진은 긴 복도를 걸으며 세 번이나 걸음을 멈추었다. 밥상이 어찌나 무거운지. 팔이 빠질 것 같고, 다리도 후들후들 떨려서 기둥에 기대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렇게 다실에 도착했을 땐 식은땀으로 앞머리가 축축했다.

    다실을 가로지른 아진이 끼이익, 부엌 쪽문을 열었다. 뭐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부엌문을 여는 게 어색하고 설렜다. 괜히 콧잔등을 찡긋거린 그가 부엌 계단을 내려가는데. 안에 있던 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

    아진이 눈을 크게 떴다.

    “……누고?”

    안에 있던 종이 물었다.

    “누구세요?”

    아진도 물었다. 그 물음을 끝으로 어색한 정적이 몰아쳤다. 아진이 눈을 빠르게 끔뻑였다.

    부엌에는 종들이 다섯 명쯤 있었다. 여자와 남자가 골고루 섞여 있었는데,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다 낯선 이들이었다. 아줌마들도, 아저씨들도, 누나들도 보이지 않았다.

    부엌은 여전히 제가 채소를 다듬고, 전을 부치던 그 부엌인데. 뭔가 묘하게 달랐다. 아진이 문틀을 꼭 쥐며 절뚝, 한 발 뒤로 물러났을 때였다. 부엌 안에 있던 종들이 작지 않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다리 저네. 다리 절면 가 아니가?”

    “어어, 그래. 걔 맞네. 사장님 방에 있는 아 말이야.”

    “아……. 프락치? 명지이 형님 조진?”

    “뭐고? 니 여기 왜 왔노?”

    덩치 좋은 사내가 아진에게로 다가왔다. 표정이 험상궂었다. 아진이 별것도 하지 않았는데 주먹이라도 휘두를 기세였다. 위협적인 작태에 아진이 어깨를 움츠리며 웅얼거렸다.

    “밥상…… 치우려고…….”

    “거기 두고 가, 그냥.”

    아진은 군말 없이 밥상을 내려놓았다. 숟가락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져 그것을 집어 다시 밥상에 올려놓기도 했다.

    종들이 그런 아진을 희번덕한 눈으로 노려봤다. 그 시선이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아진이 어깨로 뺨을 문대며 고개를 숙였다. 함께하던 종들에게 모진 시선을 받아도 힘들었을 텐데. 낯선 이들에게 죄인 취급을 당하니 참 아프고 서러웠다.

    종들은 시선으로, 침묵으로 아진에게 썩 꺼지라 종용했다. 아진이 주춤주춤 좁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다 문밖으로 발 한쪽을 냈을 때,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뒤를 돌아봤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의문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다른 사람들은요?”

    “뭔 사람?”

    “원래 있던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이요.”

    “없지.”

    “어, 어디 갔는데요?”

    “그걸 내가 어찌 아냐? 다 나갔어. 석주 형님이 내보내서.”

    내보내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잘렸다는 건가. 왜? 사람들이 입방아를 조심 없이 찧어 대긴 했지만 그래도 일은 야무지게 잘했다. 석주나 조직원들도 그에 관해 일언반구 따로 말을 얹은 적이 없었고. 근데 잘랐다니.

    혼란을 이어 가던 찰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저 때문에?

    혹 저와 내통하던 사람이 있을까 봐? 프락치가 더 있을까 봐? 그 싹을 아예 잘라 내려고?

    이 집에서 일하던 종이 십수 명이었다. 도박장에서 함께 건너온 이들. 개중 반은 십 년 이상 알아 온 이들이다. 가족이라 부르긴 민망한 사이였으나 그래도 함께한 세월이 두터웠다.

    그들이 저 때문에, 한순간에 직장을 잃은 것이다.

    이곳은 좋은 일자리인데. 일이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일당도 다른 곳에 비해 많이 주는 곳인데. 단지 저 하나 때문에 그 일자리를 잃었다.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었다.

    아진은 부엌 쪽문을 닫지도 않고 홱 뒤를 돌았다. 그리고 다실의 창호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