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86화 (86/261)

86화

“제가, 제가…… 안 그랬어요…….”

“…….”

“흐으윽, 저는…… 진짜…… 아무것도 안 훔쳤어요…….”

“…….”

울음과 고통이 뒤섞인 말에는 거짓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석주의 낯에서 표정이 씻겨 내려갔다.

제가 안 그랬습니다. 형님. 제가 그런 거 아닙니다. 속으신 겁니다. 형님. 씨팔, 형님! 제가 안 그랬다니까요! 아니, 아닙니다. 형님, 살려 주십시오. 형님, 형님!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한 사람 중에, 정말 무고했던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진도 그와 똑같은 길을 가려는 모양이다. 뇌가 차게 식었다.

아진은 석주의 그런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넘실거리는 눈물 탓에 뭐가 천장이고 뭐가 바닥인지도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아진은 그저 자신의 결백을 쏟아 내기에 급급했다.

“다 최진걸이, 최진걸이 그런 거예요.”

“…….”

“최진걸이 저한테 덮-”

“알아.”

듣다 못한 석주가 그의 말을 가로질렀다. 그에 바쁘게 내쉬던 아진의 호흡이 뚝 끊겼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시야를 어지럽히던 눈물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세상이 멀끔해졌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그가 석주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알……아? 안다고요?”

“그래, 알아.”

“근데 왜……, 왜 저한테…… 이러시는 거예요…….”

혼란에 잠긴 아진이 더듬더듬 물었다. 진걸이 그런 걸 안다고? 근데 왜 제가 벌을 받고 있나? 어째서 제가 석주의 앞에 이리도 비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꿇어앉아 있는 건가? 이 자리는 진걸의 자리인데, 어째서.

“…….”

석주는 답하지 않았다. 아진의 말을 무시하려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내놓기 껄끄러운 사실이라 침묵을 택한 거였다.

석주가 조사하고 결론을 내린 바, 진걸은 기헌이 심어 둔 프락치가 맞았다. 목숨까지 걸어 가며 아주 공들여 준비한 프락치.

그런데도 진걸의 죽음에 중호파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한 이유는, 그들이 진걸을 심은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걸 설명하려면 조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알아야 하는데, 태회파는 석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간단한 체계는 있지만, 석주가 가장 위고 나머지는 그저 ‘식구’로 퉁 칠 수 있을 만큼 경계가 모호하다. 석주를 중심으로 집결하고, 석주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반면 중호파는 기헌을 중심으로 모인 게 아니다. 서울에 있던 크고 작은 조직들이 저들끼리 싸우고, 강제로 흡수하고, 흡수당하고, 합병도 하며 만들어진 조직이다.

중호파라는 이름 아래에 있으나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도 저들끼리의 ‘파(派)’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 ‘파’끼리는 사이가 썩 좋지 않다. 기헌의 아래로 둘째, 셋째 권력 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가. 또는 언제쯤 기헌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앉을 수 있을 것인가, 치밀하게 눈치 싸움을 한다.

즉, 진걸은 중호파가 심은 프락치가 아니라, 기헌이 독자적으로 심은 프락치라는 것이다.

진걸이 아무 거리낌 없이 중호파의 업장에 불을 질렀던 것도 그 업장이 기헌의 소유가 아니라 중호파 내에 있는 다른 ‘파’의 소유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였다. 진걸의 죽음에 무덤덤했던 조직원들 역시 내부적으로 기헌의 ‘파’가 아니었던 거고.

내부 사정이 그렇다 보니, 기헌은 섣불리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그는 태회파가 먼저 중호파를 쳐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명분을 이용해, 대외의 적을 이용해 조금씩 와해하고 있는 중호파를 하나로 뭉치려는 것이다.

태회파를 그냥 막 잡아먹으면, 중호파 내에 작은 태회‘파’가 또 생겨나는 것이고 세력 역시 나뉘어 관리가 더욱 어려워질 테니 말이다.

석주는 자신이 프락치인 걸 도발적으로 드러내는 진걸의 행동을 보며 그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부러 살살 저를 긁어 피바람을 일으키길 기다린다는 걸.

거기까진 문제가 안 됐다. 석주는 진걸의 개짓거리에 이따금 진심으로 화가 났지만, 그걸로 앞뒤 분간 없이 칼을 들고 중호파에 쳐들어갈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문제는 아진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걸의 짓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아진의 짓인지 경계가 모호했다.

그리고 시간상, 먼저 심긴 프락치는 아진인데. 기헌이 두 번째로 프락치를 심으면서 아진과 원수나 다름없는 진걸을 심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현재 확실한 건 아진은 저와 명진을 처리하기 위해 심긴 이라는 거였다.

그는 명진의 가슴에 칼을 꽂았고, 도은을 죽였고, 뒷집에 불을 질렀으며, 중호파가 주는 돈에 만족하지 못해 집 안의 소소한 패물을 훔쳤다. 어쩌면 그 밖에 또 다른 죄가 더 있을 수도 있고.

무수한 죄였다. 태회파가 만들어진 이래 석주를 이렇게까지 엿 먹인 프락치는 처음이었다.

제가 멍청한 탓이고, 아진이 너무 아름다웠던 탓이고, 또 진걸이 제 눈을 잘 가려 준 탓이다.

진걸이 부러 크게 일을 치며 시선을 끌면, 그 그늘 사이에서 조용히 움직이던 아진이 다른 것을 구해다 바쳤겠지. 진걸은 발도 못 들여 봤던 뒷집 구조라든가, 미역국에 약을 탄다든가, 집 안 열쇠를 복사한다든가 등.

그는 제 신경이 어디로 어떻게 쏠려 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계획인지 몹시 쉽게 알 수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대충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기헌은 아진과 진걸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빼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했지. 진걸은 죽어 버렸고, 아진은 아직 이렇게 제 가랑이 사이에 있었다. 또 명진의 일로 제가 눈 뒤집고 달려들 줄 알았을 텐데, 그러질 않으니 퍽 당황한 상태이리라.

애가 단 기헌은 곧 또 다른 방식으로 제게 접근해 올 터였다. 그리고 저는 그 접근을 그저 기다리기만 하지 않을 것이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던 석주가 아진을 내려다봤다.

‘다 최진걸이, 최진걸이 그런 거예요.’

아진은 진걸이 죽은 걸 알았을까. 그래서 진걸에게 모든 걸 덮어씌우려는 걸까.

잠시 허공을 보던 석주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진은 석주를 집요하게 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올라온 눈동자에 정체 모를 간절함이 가득했다.

허나 석주는 끝내 그에게 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가 냉소적으로 웃으며 아진의 멍 든 뺨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빨기 싫어?”

“…….”

“싫으면 엎드리고.”

석주는 매우 가볍고 능청맞게 주제를 돌렸다. 아진이 석주의 가랑이 사이에 끼어 있던 상체를 뒤로 홱 빼냈다. 애원이 가득하던 눈에 절망과 원망이 차올랐다. 그가 엉금엉금 기어 석주에게서 벗어나려는데, 석주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걸음. 딱 한 걸음 만에 아진을 따라잡았다. 뾰족하게 마른 팔꿈치를 억세게 움켜쥔 석주가 그를 질질 끌고 소파로 향했다. 파랗게 질린 아진이 삐거덕거리는 몸을 마구 흔들며 반항했다.

“싫어! 싫어!”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다 싫으면 어떡해, 아진아. 돈 갚아야지.”

“싫어! 하지 마! 아아악! 하지 마!”

“…….”

석주가 아진을 소파 위로 밀쳤다. 아진이 소파 등받이에 쿵 부딪혔다가 아래로 맥없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고장 난 다리로 낑낑거리며 소파 끝으로 도망갔다. 근데 발목이 텁, 잡혔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끌려갔다.

“악!”

소파 모직에 쓸린 무릎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뜨끈거렸다. 아진이 무릎을 더듬거리며 얼굴을 찡그리는데, 엉덩이를 덮고 있던 두루마기가 뒤로 휙 걷혔다.

뒤를 스치는 찬 바람에 아진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방에서 보낸 나흘 내내 뭘 제대로 입은 적이 없는데 그 찬기가 왜 이렇게 낯설고 이질적인지.

아진이 힘껏 발버둥 쳤다.

“아흑! 사장님, 하지 마세요. 사장…….”

그때, 갑자기 눈앞이 샛노랗게 변했다. 그러더니 시야 귀퉁이부터 새까만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몸이 차게 식었고, 온종일 전을 부친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으며, 가스를 마신 듯 머리가 핑핑 돌았다.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던 아진이 풀썩 쓰러졌다. 그런 아진의 입가에 얄궂게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 오늘 밤은 고통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어서. 그게 참 기뻤다.

* * *

아진은 늦은 오전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무거운 눈두덩을 밀어 올리는 게 괴로웠다.

“으…….”

아진이 작게 신음하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바닥에 비볐다. 근데 어째 바닥이 푹신했다. 빙판처럼 차갑지도 않았다. 아진이 고개를 살짝 뒤로 밀어 바닥을 봤다. 제가 누워 있는 곳은 바닥이 아니라 소파였다.

그제야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두루마기가 젖혀지자마자 기절했던 게.

아진이 얼른 자신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그곳은 축축하지도, 끈적하지도 않았다. 아진이 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엎어졌다.

“……안 했네.”

그대로 뒤져 버리면 100만 원 못 갚을 테니까 참아 준 건가. 근데 이렇게 저를 방치하다간 100만 원은 무슨, 10만 원도 못 갚고 죽어 버릴 텐데. 그래도 상관없나.

……상관없으니 이따위 취급하는 거겠지.

아진이 소리 없이 웃었다.

석주에게는 100만 원이 그리 큰돈이 아니다. 없어서 아쉬울 만한 돈도 아니다. 그런데도 부득부득 제게서 돈을 받아 내려는 건, 벌을 주기 위한 명목일 뿐이다.

아진은 돼지가 팔이 잘린 벌을 받았던 것처럼, 석주에게 뒤를 대 주고 그 고통에 몸부림치는 벌을 받는 중인 것이다.

그걸 나흘째, 아니 밤이 지났으니 닷새째구나. 닷새째 통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때. 꼬르륵. 아진의 배가 시끄럽게 울었다. 아진이 다시금 조소했다. 몸이 이렇게 아프고, 살고자 하는 의지도 딱히 없는데. 이 와중에도 배는 고픈 게 우스웠다. 몸뚱이는 제 생각과 다른 모양이다.

“…….”

아진은 간헐적으로 울리는 꼬르륵 소리를 마냥 듣고만 있었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욕실로 가 차고 비릿한 물로 배를 채우고 싶지도 않았고, 이 몸을 이끌고 부엌까지 가서 밥을 빌어먹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종들이 어디 순순히 밥을 주겠나. 너한테 밥 줬다가 사달 날 일 있냐며 거지 내쫓듯 주걱을 휘두르겠지.

텅 빈 방 안을 보던 아진이 두루마기를 추슬러 올렸다. 그리고 눈을 꾹 감았다. 그냥 자자. 자고 일어나면 또 밤일 것이고, 다시 석주와 마주해야 하겠지만, 일단은 자자.

그렇게 최면을 걸며 잠들려 하는데.

끼익, 끼익……. 마루가 밟히는 소리가 났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