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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85화 (85/261)

85화

아진은 나흘 동안 석주의 좆을 받아 냈다. 짓무른 뒤가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아팠다. 붓고 찢어지고 늘어져서 이제는 석주가 앞섶만 내리고 곧장 삽입해도 무리 없이 그것을 받아 물 정도였다.

물론 고통은 줄지 않았지만, 석주는 번거롭게 뒤를 째는 일이 줄어든 게 만족스러워 보였다.

“나쁜…… 새끼…….”

아진이 뻑뻑하게 부푼 목구멍으로 석주의 비난을 짜냈다. 그와 동시에 기침이 올라왔다. 마치 석주를 욕한 걸 벌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콜록, 콜록…….”

아진이 목을 감싸 쥐며 기침했다. 차게 식은 피부가 느껴졌다.

“추워…….”

그가 허리께에 걸쳐져 있던 두루마기를 어깨까지 올렸다. 석주의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석주가 덮어 준 것은 아니고. 욕실 앞에 놓인 빨래 바구니에 있던 걸 아진이 잠결에 끌어와 덮은 거였다.

석주의 냄새가 담뿍 나는 게 거북스러우면서도…… 좋았다. 매일 밤 저를 안아 주던 그 뜨겁고 따뜻한 체온을 되뇌기나마 할 수 있어서.

아진이 그렇게 하릴없는 상상을 하며 시선을 흩뿌리는데.

끼익, 끼익…….

저 멀리서 어렴풋이 마루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주의 집은 넓다. 사는 이도 많고. 그러나 현관으로 들어와 왼쪽으로 복도를 꺾어 들어올 이는 이쪽에 방이 있는 석주와 명진뿐이다. 근데 지금 명진이 집에 없으니 올 이라면 당연히, 석주뿐이고.

아진이 부르튼 입술을 핥았다. 그와 동시에 달칵, 문이 열리고 거대한 인영이 나타났다.

역시나 석주였다.

석주가 방문 옆에 달린 스위치를 올렸다. 방이 환해졌다. 쨍하게 눈알을 찌르는 빛에 아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안으로 말았다.

“…….”

석주가 아진을 쳐다봤다. 그는 제 두루마기를 뒤집어쓴 아진의 모습에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렸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석주는 두루마기와 재킷을 한 번에 벗어 소파에 던져두었다. 그 후 넥타이를 끌며 서재로 향했다.

그는 마치 아진이 방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처음 시선을 던진 이후로 찰나도 아진을 봐 주지 않았다. 줄줄이 놓인 위스키를 크리스털 잔에 따라 목을 축이고, 담배를 물고, 의자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는 내내 그랬다.

반면 아진은 계속 석주를 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달려가서 욕도 해 주고, 손찌검도 하고 싶다만 움직이는 게 너무 버겁고 괴로웠다. 이렇게 널브러져 있다가, 일을 마친 석주가 제 가랑이를 벌리면 꼼짝없이 뒤를 내어 주고 또 기절하듯 잠들어야겠지.

그 일과는 반복될 것이다. 그 개 같은 100만 원을 다 갚을 때까지, 계속.

아진이 눈을 꾹 감았다.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미적지근한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서늘한 무시에 질린 아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씻고 싶었다. 목도 말랐다. 나흘 내내 욕실 물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차디찬 욕실 물을 마실 때마다 목구멍이 찢어지는 것 같지만,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석주가 저를 굶겨 죽이려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두루마기를 대충 껴입은 아진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욕실로 향했다. 그나마 욕실 코앞에서 잠든 덕에 두 걸음 정도면 욕실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묵직한 목소리가 아진의 뒤통수를 푹 찔렀다.

“요즘은 인사 안 하네.”

아진이 넋이 반쯤 빠진 얼굴로 석주를 쳐다봤다. 갑자기 인사 운운하는 그가 이상했다.

의자 깊숙이 등을 묻은 석주는 담배를 문 채 아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아진의 인사가 듣고 싶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게, 이전의 아진은 그가 퇴근하자마자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었다. ‘오셨어요, 사장님.’,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녁은 드셨어요, 사장님?’ 따위의 말을 하며 아양 아닌 아양을 떨었었지.

이제 그러지 않는 건, 제 환심을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본인을 개처럼 물어뜯어 놓은 제가 미운 건가.

뭐가 됐든 석주는 그게 썩 아니꼬웠다. 아랫사람에게 반드시 인사를 받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을 만큼 고지식하진 않지만, 뭐랄까.

……씨발.

그래. 실은 아쉬웠다.

옆구리에 착 달라붙어 헤실헤실 웃던 아진이 꽤나 그리웠다. 제가 저 작은 몸을 양껏 찢어발겨 놓고도 아진은 제게 나긋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너무 몰염치하고 모순적이라 차마 다른 사람에게는 말 못 할, 이기적인 감정이었다.

“…….”

아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라곤 ‘인사는 개뿔’뿐이었다.

석주에게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입을 벌리는 것도 어렵고,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들었다. 여기서 허리를 숙였다간 쿵, 하고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힐 게 분명했다.

방 안 가득 침묵이 차올랐다. 아진이 손톱으로 욕실 문틀을 긁는데, 석주가 담배를 재떨이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책상 오른쪽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낮게 명령했다.

“이리 와.”

“…….”

그 말에 아진이 슬쩍 시선을 옆으로 넘겼다. 못 들은 척하려는 거였다. 가 봐야 얻어맞거나, 뒤로 석주의 성기를 받아 내거나, 혹은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모진 말을 들어야 할 게 뻔한데. 가고 싶지 않았다.

그 하찮은 반항에 석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책상 위로 턱을 괬다. 그리고 전보다 나긋한 음성으로 아진을 불렀다.

“아진아.”

아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익숙한 목소리다. 다정하게 저를 불러 주는 목소리. 애정과 관심이 담뿍 담긴 목소리. 근 며칠 듣지 못했던 석주의 진짜 목소리.

제가 잘못 들었나.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싶을 때.

“이리 와 봐.”

석주가 다정한 음성으로 재차 말했다. 아진이 퍼뜩 석주를 쳐다봤다.

석주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 있었다. 그 역시 익숙한 얼굴이었다. 함께 잠들기 전에, 혹은 자고 일어났을 때. 곁에 누운 석주가 항상 저런 표정으로 저를 봐 주었다.

‘잘 잤어? 더 자도 되는데.’

아진이 무언가에 홀린 듯 그에게로 한 발 다가갔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몸이 으스러지는 듯 아팠는데, 갑자기 그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출근하지 말까. 응? 종일 이렇게 안고 있게. 가지 말라고 해라. 그럼 가지 않으마.’

한 걸음, 한 걸음 석주에게 다가가는 발은 느리고 위태로웠으나 멈춤이 없었다. 두루마기가 바닥에 부드럽게 끌렸다. 아진은 색색 거친 숨을 내쉬며 널찍한 방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서재까지 다다랐을 땐,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후였다.

왜 이렇게까지 순순히, 또 힘들게 석주에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았다.

석주가 돌아왔을까 봐.

저를 안아 주고 보듬어 주던, 또 소중히 여겨 주고 사랑해 주던 그가 돌아왔을까 봐.

다시 저를 안아 줄까 봐.

그럴까 봐.

그랬으면 좋겠어서.

다 못된 장난이었다고 가볍게 퉁 쳐도 좋으니, 사과한다며 또 그 비싸고 맛없는 여름 사과를 사 줘도 좋으니, 그가 돌아왔으면 해서.

“사장……님…….”

아진은 무너진 몸을 이끌고 마침내 그의 앞에 섰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 가득 석주가 담겼다.

석주 역시 아진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지척에서 맞물렸다. 곧 석주의 입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아진이 그것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의 속눈썹이 위로 바짝 올라갔고, 귓바퀴도 뒤로 살짝 넘어갔다. 희멀겋던 광대에 불그스름한 기대가 차올랐을 때였다.

석주가 아진의 손목을 쥐고 자신 쪽으로 훅 당겼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아진이 그의 품으로 풀썩 쓰러졌다. 안면이 석주의 단단한 가슴팍에 퍽 부딪혔다. 근데 석주가 허리나 등을 잡아 주지 않아 그대로 그의 다리 사이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아으…….”

바닥에 무릎을 찧고, 석주의 허벅지에 얼굴을 처박은 아진이 작게 신음했다. 손으로는 얼얼한 무릎을 매만졌다. 무릎이 깨진 것처럼 아팠다. 이미 뒤틀린 한쪽 다리야 어떻게 되든 미련이 없다만, 멀쩡한 다리 한쪽도 병신이 될까 두려웠다.

고개를 푹 숙인 아진이 끙끙 않는데, 석주가 그의 턱을 감싸 올렸다. 아진의 시선에 석주가 강제로 비집고 들어왔다.

“빨아 봐.”

예상치 못한 말에 아진이 뻐끔 입을 벌렸다. 잇새로 새빨간 혀가 보였다. 짓무른 눈두덩은 더욱 붉어졌고, 며칠 새 살이 잔뜩 내린 뺨과 턱은 가늘고 여렸다. 그 얼굴이 어찌나 색기가 넘치는지. 창백하고 처연한 게 못된 욕망을 들끓게 했다.

석주가 아진의 뺨에다 자신의 아랫도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잘하면 오늘은 안 건드리마.”

“…….”

“아무것도 안 하고 값 치러 줄게.”

순간, 아진의 눈동자가 김 서린 유리처럼 탁해졌다. 잠깐이나마 기대했던 행복한 상상이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아. 저는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여전히 꿈을 꾸는 중인데, 무엇이 꿈인지는 잘 모르겠다. 저를 보듬어 주던 석주가 꿈이었는지, 아니면 제게 야멸차게 구는 석주가 꿈인지. 너무 헷갈리는 나머지 정신이 다 혼미했다.

아진이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자 석주가 엄지로 통통하게 부은 그의 눈두덩을 조심스럽지 않게 문댔다. 아릿한 통각에 아진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잠깐 사라졌다가 드러난 눈동자가 전과 달리 번뜩였다. 원망과 분노로 벼려진 안광이었다.

“싫어요.”

아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목소리였다. 석주를 노려보는 시선과는 사뭇 달랐다. 휘둘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보였다.

그 깜찍한 발악에 석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슬쩍 핥았다. 그러면서 엄지로 툭툭 아진의 뺨을 두드렸다. 이 만용을 어떻게 벌할지 고민하는 거였다.

얄궂게도, 그 고민이 즐거웠다. 역시 저는 양아치가 체질에 맞는 모양이다.

석주의 입매가 삐뚜름히 뒤틀리는데. 그의 엄지가 축축해졌다. 석주가 눈을 내렸다.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아진이 보였다. 숨 한 번 헐떡이지 않고, 입을 꾹 겹쳐 문 채 부릅뜬 눈으로 후두둑, 후두둑 눈물을 떨어트리는 게 몹시도 처량했다.

코앞에서 마주한 아진의 눈물에 석주가 잠깐 호흡을 멈췄다. 그 흔들림을 알았을까. 아진이 석주의 손에 뺨을 묻으며 간절히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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