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83화 (83/261)
  • 83화

    그렇게 진실이 밝혀지고 나면 어쩌지. 석주에게 어떻게 복수하지. 석주는 어떨까. 제게 사과할까.

    ……아마 사과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돈다발을 내밀거나, 다친 곳에 연고를 발라 주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계속 말하겠지.

    그럼 받아 줘야 하나. 아니면 주먹으로 흠씬 때려 주기라도 할까.

    아진은 부질없는 상상을 하며 입매를 당겼다가 풀길 반복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아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이는 석주뿐이었다.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온 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쿵쿵쿵, 발걸음이 멀어지는 게 들렸다.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욕실 반대편에 있는 서재로 간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언가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책상 의자를 뺐다가 넣는 소리도 들렸고, 서류나 책 따위가 떨어지는 소리도 났다. 마당과 이어진 창호지 문이 끼이익 다급하게 열렸다가 닫혔다.

    그러더니 발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방을 가로질러 욕실로 오는 듯했다.

    아진은 그 소리를 뻔히 듣고 있었음에도 고개를 내밀거나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절 찾는 소리에 불안이 아니라 분노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석주에게 저는 여전히 명진을 다치게 한 죄인이라는 뜻이었다.

    곧 석주가 욕실로 들이닥쳤다. 욕실 벽에 기대앉은 아진이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석주를 바라봤다.

    “하…….”

    석주가 세게 숨을 끊어 냈다. 그러더니 자신의 이마를 크게 쓸어 넘겼다.

    아진은 그런 석주를 보다, 벽을 짚고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석주를 없는 이 취급하며 그를 피해 욕실에서 나왔다.

    걷는 건 여전히 힘겨웠다. 가뜩이나 다리 한쪽이 불편한데, 반대쪽 무릎까지 삐거덕거리니 몇 걸음마다 억새처럼 맥없이 휘청거려야 했다.

    “콜록, 콜록…….”

    간간이 기침하며 가슴이나 목을 움켜쥐기도 했다. 그래도 아진은 용케 넘어지지 않고 방 한가운데까지 왔다. 그 후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바지를 끙, 소리와 함께 주워 들었다. 그리고 짧게 탄식했다.

    “아…….”

    이걸 어떻게 입지. 몸을 숙이고 다리를 들 엄두가 안 났다. 원래도 바지를 입을 때마다 벽에 기대어 입곤 했는데. 멀찌감치 있는 벽까지 가서 어깨를 기대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뒤통수에 꽂힌 석주의 시선이 느껴져 짜증도 났다. 병신 같은 모습만 골라 보여 주는 것 같아서.

    아진이 자신의 은근히 뒤틀린 다리와 보라색으로 물든 무릎, 크고 작은 상처가 많은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어느새 다가온 석주가 아진의 손에 들린 바지를 낚아챘다.

    별것도 아닌 행동에 아진은 주먹으로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휘청거렸다. 무릎이 삐거덕삐거덕 난리였다. 이러다 멀쩡한 무릎도 고장 나 평생 못 걷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뇌리를 스치는데. 석주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게?”

    아진이 얼굴을 들고 석주를 올려다봤다. 석주는 여전히 크다. 예전에는 거대한 그의 덩치가 부럽고, 또 그의 널찍한 가슴팍에 안겨 있는 게 좋았는데. 지금은 그저 두렵기만 했다. 제가 어떻게 덤벼도 석주에겐 상처 하나 못 내겠구나, 싶어 분하기도 했다.

    아진이 부르튼 입술을 달싹였다.

    “일……하러요.”

    “일?”

    “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아진이 석주의 손에 들린 제 바지로 손을 뻗었다. 더럽고 해진 바지이나 당장 입을 것이 그것뿐이었다. 그나마 있던 몇 안 되는 옷가지는 불에 타 버렸고. 당분간은 저것 하나로 연명해야 했다.

    그나마 꽃님이 종종 제 옷을 사다 주었는데, 이제 그녀마저 없으니…….

    근데 석주가 손을 휙 뒤로 물렸다. 그러더니 질 낮은 양아치처럼 이죽거렸다.

    “다른 놈들한테도 몸 팔게?”

    아진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석주가 이상하다. 깡패지만, 그렇다고 깡패 짓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꼭 그의 육신에 다른 영혼이라도 들어간 것 같았다.

    아진이 퉁퉁 부은 눈으로 석주를 노려봤다. 석주가 그 눈을 마주하며 삐뚜름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놈들은 많이 쳐 줘 봐야 30원일 텐데. 괜찮겠어? 남창한테 창녀보다 값을 더 쳐 줄 순 없잖아.”

    역겨운 말에 아진이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확 오기가 치받았다. 정말 몸이라도 팔까. 어차피 이리된 거, 진짜 남창 짓 못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말리는 꽃님도 없고. 저는 돈이 궁하고. 이 집 주인은 저를 남창 취급하고.

    아진이 쉬어 빠진 목소리로 앙칼지게 되받아쳤다.

    “……그거라도 모아야죠. 100만 원이면 뒷구멍이 헐 때까지 팔아도 모자라는데. 얼른 나가서 손님을 찾아야-”

    아진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석주가 그의 양쪽 뺨을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퉁퉁 부은 데다가 시퍼렇게 멍도 올라와 있고, 볼 안쪽은 터져서 아직도 피 맛이 나는데, 그 볼을 우악스레 잡으니 통렬한 고통이 올라왔다.

    “윽…….”

    아진의 만면이 한껏 구겨졌다. 석주가 일그러진 아진의 얼굴을 뚫어지라 보며 읊조렸다.

    “아진아. 너 빚 다 갚을 때까지 이 방에서 못 나가.”

    “놔, 놔…….”

    “그러니 내가 불러다 주마. 누구를 불러 줄까? 아니, 너한테 물을 게 아니라 손님한테 물어야겠구나.”

    “흐…….”

    “우리 식구 중에 사내놈 뒷구멍 쑤시는 데에 취미 있는 애는 없는데. 그래도 내 아진이 너를 위해 친히 가서 물어봐 주마.”

    “…….”

    “아, 이왕이면 한 번에 서너 명씩 불러다 줄까?”

    아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한 번에 서너 명. 순간 얼굴이 새까만 낯선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다리를 벌리고 있는 제 모습이 상상됐다. 석주 하나 받는 것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서너 명을 한 번에 받으면…….

    허물어지는 아진의 낯을 지척에서 보던 석주가 볼을 놓아주었다. 아진이 천천히 아래로 무너졌다. 객기도 객기 나름이지. 뻗대 봐야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길 수도 없었고. 석주는 아진이 맞서기엔 너무 강하고, 잔인한 상대였다.

    “왜 이러세요…….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상처가 많이 난 목소리에 눈물이 섞였다. 더는 짜낼 눈물이 없다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눈앞이 울렁울렁해졌다.

    몸도 아프고, 가슴도 아픈데, 가장 아픈 건 석주가 이리도 가감 없이 저를 미워한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는 남이 못 보게 얼굴도 가리고 다니라더니. 예쁜 처자가 나타나면 결혼하겠다는 저의 터무니없는 말에 그러지 말라며 애걸복걸하더니. 이제는 사내 서넛을 모아 제 몸을 팔게 하겠단다.

    아진은 그 간극이 너무 버겁고 쓰라렸다. 혐오와 멸시는 아낌없이 받아 봤지만, 저를 좋아해 주던 이가. 제가 좋아하던 이가 저를 미워하는 건 처음이라 슬픔이 곱절에 곱절이었다.

    아진이 쓰린 눈두덩을 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는데. 석주가 그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채를 잡고, 방을 보게 했다. 눈물 젖은 시야에 석주의 방 전경이 들어왔다.

    이전에는 따사롭고 평화로운 안식처였지만, 지금은 고문실과 다름없는 장소였다.

    석주가 특유의 저음으로 아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봐라, 아진아.”

    “…….”

    “이제 이 방이 네 세상이야.”

    “…….”

    “이 방에서 넌 계속 몸을 파는 거다. 100만 원을 채울 때까지, 계속.”

    잔인한 통보에 아진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 그가 제 ‘세상’이 된 방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고 있으니 여기저기에서 몸을 겹치고 속닥거리는 과거의 저와 석주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중 가장 또렷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차가 무서워 바깥에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석주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래서 돈을 모아도 쓸데가 없으며, 도박장에 비하면 석주의 집은 천당과 같아 행복하다는 말을 종알거렸을 때.

    석주가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런 말을 했었다.

    ‘그럼 그냥 여기 있어.’

    ‘여기, 내 방에, 내 무릎 위에 앉아 있어.’

    ‘그럼 내가 세상을, 세계를 이 방으로 가져오마.’

    ‘너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해.’

    그 멋진 얼굴과 목소리로, 사랑을 담뿍 담은 눈으로 저를 보며 그리 말해 주었다. 그저 가만히만 있으면 제 앞으로 세상을 가져다주겠다, 상상도 하지 못할 멋진 말을 해 놓고는. 그렇게 저를 품에 안아 놓고는.

    이제 와 이 방이 제 세상이라고. 몸을 팔아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못 나간다고.

    아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탈함으로 말미암은 웃음은 아니었다. 조소였지. 자기 자신을 비웃는 조소.

    석주가 한 말을 되뇌며 안심하는 제게 보내는 조소.

    이 방이 제 세상이라 하면, 석주가 저를 쫓아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석주가 저를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진은 등신 같이도, 그 사실에 안도했다.

    * * *

    “…….”

    석주가 꾸역꾸역 고집스레 눈을 감고 있는 명진을 가만히 쳐다봤다. 명진은 다친 이후로 찰나도 눈을 뜨지 않았다. 의사는 늘 비슷한 말만 내놓았다. 적당히 비극적이면서도 또 적당히 희망찬 말이었다.

    석주는 어쨌거나 명진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아주 늦어도 좋으니 언제가 됐든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며 명진의 닫힌 귀에 말해 주기도 했다.

    몇 시간 병실에 머물던 석주가 몸을 일으켰다. 더 있고 싶지만 나가 봐야 했다. 할 일이 많았다.

    석주가 두루마기를 어깨 위로 두르며 병실을 나왔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조직원들이 꾸벅 인사했다. 석주가 그들을 지나쳐 복도를 가로질렀다. 덩치 좋은 장정들이 우르르 그를 따라나섰다.

    복도를 배회하던 환자와 간호사들이 그들의 눈치를 보며 벽으로 바짝 붙어 섰다.

    석주는 병원 밖으로 나오자마자 담배부터 물었다. 덕재가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후우…….”

    석주가 잇새로 연기를 길게 뽑아냈다. 겨울 특유의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그의 이마를 시원하게 쓸고 지나갔다. 그것을 코로 한가득 들이마시자 몸속에서 들끓던 열이 한결 가라앉았다.

    그러나 부족했다. 자연히 제 방에 있는 작은 몸뚱이가 떠올랐다. 제가 짓밟고 뭉개서 조금 망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 체온이 식어서 껴안고 열을 쏟아 내기엔 더할 나위 없는 몸뚱이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