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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78화 (78/261)

78화

고개를 부들부들 떨던 아진이 아무런 말이나 내뱉었다.

“그, 그럼 갚을게요……. 저, 저거 제가 다 갚을게요. 흐윽, 갚으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땟국물이 가득한 아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입가에 번진 피와 인중 사이로 흐르던 피가 그새 굳어 영 꼴 보기가 싫었다.

지금 아진은 딱, 거지꼴이었다.

그 모습을 본 석주가 설핏 눈살을 구겼다. 늘 예뻤던 얼굴이 오늘은 어쩐지 못나 보였다.

발을 슬쩍 움직여 아진의 손을 털어 낸 그가 한쪽 무릎을 굽히며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눈물이 가득한 군청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100만 원.”

“……네?”

“100만 원이야. 네가 저지른 짓의 값어치가.”

“그게 무슨……. 아니…… 그렇게, 큰돈을 어떻게…….”

“그래. 그렇게 큰돈을 네가 어떻게 갚을 건데?”

아진의 눈동자가 출렁거렸다. 어떻게, 라고 방법을 묻는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울음으로 붉어진 입술을 우물거렸다.

“일, 일해서 갚을, 게요…….”

그 말에 석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힘없이 읊조리는 말이 같잖기 그지없었다. 100만 원을 일해서 갚는다니. 고작 몸종이. 저야 일당을 50원이나 쳐 준다만, 보통은 끽해 봐야 3, 40원인데. 그걸로 갚겠다고.

석주가 퍽 다정한 눈으로 아진을 응시했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겠어?”

그 말에 아진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100만 원. 그 돈을 일당으로 갚으려면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못 갚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일 말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저는 절름발이고, 가족 없는 고아에, 글도 제대로 못 읽는 반푼이인데.

아진이 꾹 눈을 감았다. 굵은 눈물이 언 땅 위로 투둑투둑 떨어졌다. 비참했다. 더 비참한 건 석주는 제 이런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다 알면서, 부러 이런 말을 하는 거다. 저를 모욕하고, 상처 주기 위해서.

나쁜…… 새끼…….

아진이 부득 이를 갈았다. 억울함과 서글픔만 가득하던 눈동자에 분노가 서렸다. 그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안 가득 흙이 잡혔다. 알갱이가 굵은 흙이 손을 할퀴는 것 같았다.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아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석주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아진은 그를 똑바로 직시하며 으르댔다.

“내가 훔치지도 않은 걸 왜 갚-”

그러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조직원들에게 어깨가 잡혔다. 아진은 그대로 맥없이 뒤로 질질 끌려갔다. 지척에 있던 석주가 멀어졌다. 실제로는 몇 걸음 되지 않는데, 까마득하게 멀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는 그에게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진은 곧 비닐 위에 안착했다. 비닐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났다. 고기가 상했을 때 나는 악취와 비슷한 냄새였다. 아마 제대로 닦이지 못한 돼지의 피 때문이리라.

아진은 금세 다시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니, 아니에요. 사장님. 갚을게요. 갚을게요!”

아진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도와주지도 않았다. 종들은 은근히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아진의 팔이 떨어져 나가는 걸 가까이서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번들거리는 눈알에 그릇된 욕망이 가득했다.

조직원이 아진을 바닥으로 짓눌렀다. 우악스러운 힘에 아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닐에 비벼졌다. 다리는 꽉 결박됐고, 덩치 좋은 조직원이 등 위로 올라타 아진의 왼팔을 바깥으로 쭉 폈다.

그 위로 톱니처럼 날이 선 칼이 다가왔다.

기겁한 아진이 퍼덕퍼덕 몸을 뒤틀었다. 허나 조직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덩치가 산만 하던 돼지도 손쉽게 제압했는데. 그에 반도 되지 않는 아진을 결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진의 눈알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위협은 생전 처음이었다. 차 사고를 당했을 땐 모르게, 불시에 당한 터라 공포를 느낄 새도 없었거늘. 제 팔이 썰리는 걸 맨정신으로 버텨야 한다니.

자신 없었다. 차라리 목을 쳐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진이 짓눌린 얼굴을 들어 석주를 바라봤다.

“시, 싫어요! 사장님! 살려 주세요. 사장님!”

“…….”

“아악! 뭐든지 할게요, 뭐든지……. 허어엉, 다 할게요……. 살려, 끅, 주세요……. 제발!”

아진이 줄줄 눈물을 쏟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울부짖음이 끝남과 동시에 칼을 든 조직원이 석주를 바라봤다. 허락을 기다리는 거였다.

“…….”

석주는 특유의 무표정한 낯으로 아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진이 우는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뭐가 이상한데……. 아, 그러고 보니 앞머리가 없구나. 늘 치렁치렁하게 얼굴을 덮고 있던 머리칼이 반쯤 잘려 있었다. 뒷집에 불을 지르다 태워 먹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도망치면서 신분 세탁이라도 하려 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꽃님이 얼굴을 드러내지 말고 다니라 했다더니. 그새 잊은 건가. 아니면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어진 건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계략인가. 그도 아니면 그 말 역시 거짓이었나.

석주는 느긋하게 담배 연기를 뿜으며 아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저 쳐다봤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시선으로 희롱하고 있었다는 게 맞겠다.

피를 뒤집어써 시뻘게진 입술과, 추위에 얼어 복숭앗빛이 된 뺨과, 울음 때문에 평소보다 통통해진 눈두덩과, 머리칼이 짧아져 훤히 보이는 눈매, 옷 사이로 언뜻 보이는 쇄골과 가슴팍에 자꾸 시선이 갔다.

“사장님……, 잘못했어요……. 흑, 살려, 살려 주세요, 사장님…….”

하얀 얼굴에 묻은 재와 입가에 번진 피, 줄줄 흐르는 눈물이 육욕을 자극했다. 우습게도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석주의 입매가 비죽 뒤틀렸다.

제가 떡을 안 친 지 며칠이나 됐더라. 명진의 생일 이틀 전부터 못 쳤으니 대충 일주일은 된 것 같다. 그럼 잠을 못 잔 지는 얼마나 됐나. 명진이 칼에 맞은 후 사흘 내내 못 잤지.

그것을 자각하자 잊고 있던 피로가 올라왔다. 덧붙여 짜증도 났고, 분노도 일었다. 사방에 어질러진 이 많은 일을 어떻게 쓸고 닦아야 하나 머리도 지끈거렸다.

잠깐 도피할 곳이 필요했다. 약을 빨고 싶었다. 그도 아니면 술을 진탕 마시거나, 그것도 아니면 좆이 얼얼할 정도로 떡을 친다거나.

석주가 잘근잘근 담배 필터를 씹었다. 그러다 그것을 후 뱉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가 아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아진을 결박하고 있던 조직원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들이 뒤로 물러났다.

아진이 냉큼 몸을 일으켰다. 뭐 얼마나 눌려 있었다고 등과 어깨가 뻐근해서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기도 했다.

“으…….”

오랜만에 경험하는 험한 꼴에 몸이 지나치게 긴장했다. 석주의 집에 들어온 이후로, 그의 품에서 잠든 이후로 이런 취급은 처음이라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아진이 어깨를 옹송그리며 소리 없이 눈물을 떨어트리는데. 석주가 그의 머리칼을 크게 쓰다듬었다. 조금 짧아진 머리칼은 여전히 가늘고 부드러웠다.

“아진아.”

“흐우……. 사장님, 살려 주세요…….”

“일하고 싶어?”

아진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으로는 모자라 끄덕끄덕끄덕 세 번이나 턱을 움직였다.

“네, 네. 할게요. 우흐윽, 뭐든 할게요…….”

“네가 잘하는 일이 하나 있긴 한데.”

“…….”

“내가 돈도 많이 쳐 주마.”

석주가 입꼬리를 당기며 빙긋 웃었다. 아진이 그 멋진 미소를 텅 빈 눈동자로 바라봤다.

아진은 석주의 방으로 끌려왔다. 석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설마 이 방에서 제 팔을 자를까 싶어 안심은 됐다.

아진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동안, 석주는 재킷을 벗어 소파에 대충 던져두었다. 그리고 새로이 담배를 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의 잘생긴 낯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아진은 그를 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닦아 냈다. 마른 피, 차게 식은 눈물이 묻어났다. 더러워진 손바닥은 대충 바지춤에 문질렀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입술을 꼼질거렸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명진은 괜찮나? 꽃님은 어떻게 됐나? 수술은 잘 끝났나? 등등. 허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캐물어도 석주가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어디 감히 그런 걸 묻는 거냐고 또 뺨을 얻어맞을까 봐.

아진이 그새 얼얼하게 무거워진 볼을 쓰다듬는데. 석주가 후우-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벗어.”

“……네?”

“…….”

석주는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아진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뒤늦게야 깨달았다. 석주가 제게 무슨 ‘일’을 시키려는 건지, 제가 잘하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말이다.

아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석주에게 맞아 터진 입술이 다시 피를 비췄다. 그가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닦아 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을 보며 담배를 세차게 빨았다. 불씨가 차르르 담배를 타고 올라갔다.

“뭐든 하겠다며. 내가 네 몸을 사 주마. 그러니까 벗어.”

아진이 다시금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러고는 전과 달리 잔잔해진 눈동자로 석주를 응시했다.

“…….”

아진은 오해받는 삶에 익숙했다. 제가 저지르지 않은 죄로 벌을 받는 것도 꽤 많이 경험했다.

도박장에서는 툭하면 도둑놈 취급을 받았다. 저 절름발이 새끼가 지갑을 훔쳤다느니, 화투패를 숨겼다느니, 하물며 재떨이에 올려 둔 태우던 담배가 없어졌다면서 아진을 개 잡듯이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 또 이런 오해를 받는 거, 도둑놈 취급을 당하는 거 괜찮았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 분명…… 그래야 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서글픈지 모르겠다. 도박장에서는 그저 억울하고 화가 났는데, 지금은 그보다 슬픔이 더 컸다.

석주가 저를 믿어 주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그에게 특별한 사람 취급을 받다, 파렴치한 도둑놈으로 좌천당한 게 서러운 모양이다.

아진이 찢어진 입술을 느리게 달싹였다.

“제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어 주실 거죠?”

“…….”

석주는 대답 대신 연기만 내뿜어 냈다. 무언이었으나 결국엔 긍정이었다. 석주는 이미 아진을 정의한 것이다. ‘그런’ 놈으로.

아진이 바닥을 내려다봤다. 기름을 잘 먹여 윤기가 흐르는 마룻바닥 위에 선 제 더러운 발이 보였다. 흙먼지가 묻고, 상처 난 짝짝이 다리가 오늘따라 더 볼품없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제 꼴이, 제 주제가 선연히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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