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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77화 (77/261)
  • 77화

    아진은 처음부터 눈에 띄었다. 도박장에서 그를 처음 봤던 날. 윗도리만 걸친 채 그 하얗고 가냘픈 다리를 훤히 내놓고 있었지. 옷을 반쯤 벗다시피 한 여자들도 많았는데 그에게 가장 먼저 시선이 갔다.

    그 시선에 욕정이 섞여 있진 않았다. 머리칼로 얼굴도 죄 가리고 있었고. 저건 뭔가, 하는 눈으로 쳐다봤었지.

    다음으로 그를 또렷이 인지한 건, 술과 약에 취한 제 앞에 빗물을 온통 뒤집어쓰고 나타났을 때였다. 보여 주지 않던 얼굴을 훤히 드러낸 채, 말랑해 보이는 팔뚝과 분홍빛 유두까지 보여 주며, 사장님, 사장님- 하며 종알거렸었다.

    저는 그 예쁘고 청량한 몸뚱이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비록 첫 단추를 잘못 끼우긴 했으나 다음 단추부터는 잘 끼워 왔다고 자만했다.

    그렇게 전에 없던 행복과 평온을 만끽하며 살던 차. 기헌이 등장했지.

    술병을 정리하는 아진을 본 기헌은 이리 말했었다.

    ‘집에 절름발이가 있다는 건 들었는데……. 비위도 좋으시네. 병신을 집에 두고. 강 사장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참 착해.’

    절름발이가 있다는 건 들었는데.

    절름발이가 있다는 건 들었는데.

    절름발이가 있다는 건 들었는데.

    당시엔 그게 이상한 줄 몰랐다. 웬 놈에게 욕을 얻어먹고 기가 죽은 아진이 신경을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사실 기헌이 아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저 역시 중호파에 대해, 기헌에 대해 공들여 조사하고 있었으니까.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그의 집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아마 기헌도 그와 비등한 조사를 했을 테니, 아진의 존재에 대해, 제가 매일 밤 끼고 잔다는 절름발이 사내종의 존재에 대해 모르진 않을 터였다.

    그 후 몇 시간 뒤, 뒷마당에 기헌과 아진이 함께 있는 것도 봤다. 그래, 그건 이상했다.

    두 사람은 고요한 마당에 멀뚱히 서 있었다. 어떻게 봐도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근데 기헌은 매우 당연하게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고, 아진은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제 등장에 기헌은,

    ‘아. 화장실을 못 찾아서. 근데 여기 이놈이 알려 줬습니다.’

    라는 성의 없는 변명을 내놓았었지. 그리고 아진은,

    ‘저, 저는 이만…….’

    이라고 말끝을 흐리며 뭐가 그리 급한지 말을 붙이기도 전에 얼른 뒤를 돌았었다. 절뚝이는 걸음걸이로 부엌을 돌아 사라지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당시에 저는 온통 아진의 걱정만 했다. 기헌이 그에게 해코지를 하진 않았을까, 못된 말로 상처 주진 않았을까, 괜히 그의 눈에 띄어 나중에 험한 꼴을 당하면 어쩌나. 그런 걱정을.

    근데 다음 날이었나. 아진이 중호파에 대해 물었다.

    ‘그때 온 사람들 중호파 사람들이잖아요.’

    ‘응.’

    ‘그 사람들 사장님 적 아니에요? 되게 나쁜 사람들인데. 도박장에 있을 때도 행패를 엄청 부렸었어요.’

    ‘질 낮다는 소문은 들었어.’

    ‘근데 왜 집까지 초대한 거예요?’

    아진답지 않게 꼬치꼬치 캐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저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별생각 없었던 것 같다. 아무런 의심도 거리낌도 없이 제 계획을 줄줄이 나열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진걸이 집에 들어오고 환영식을 했다. 식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일하는 아진을 잡아채다 둘이서 몰래 곰살맞은 사진도 찍었다. 그 후 배가 부르다는 아진을 데리고 뒷집을 따라 산책했었지.

    그때도 제가 먼저 아진을 끌고 갔다. 제가 먼저. 아진은 뒷집에 대해 일언반구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제가 찬찬히 다 해다 바친 거다.

    ‘……저긴 뭐가 있어요?’

    ‘약 공장이야.’

    ‘약이요?’

    ‘그래. 필로폰. 내가 외국에다 파는 거.’

    등신같이 줄줄이 정보를 읊어 주는 제 꼴에 아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반가워했을까. 아니면 이런 멍청한 새끼가 우두머리냐며 비웃었을까.

    그 산책이 있고 며칠 후, 뒷집의 약이 사라졌었다.

    그리고 저는 또 멍청하게도, 아진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으며 은근히 그에게 흘러가는 의심을 손수 막아서며 눈을 부라렸다.

    당시를 떠올린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목젖이 움직거릴 때마다 잇새로 뿜어지는 담배 연기가 출렁출렁 춤을 췄다.

    아진의 살림이 작살 나는 소리를 듣고 있던 석주가 마당으로 시선을 옮겼다. 개처럼 끌려와 바닥에 엎드린 아진이 보였다.

    말간 얼굴에 재와 흙이 묻어 있었다. 콧등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자국도 있었고, 머리칼에는 바스러진 마른 낙엽도 묻어 있었다. 아주 열심히 도망친 모양이다.

    낯빛은 희멀겠고, 시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하게 움직였다. 조직원을 쳐다봤다가, 구경꾼처럼 둘러싼 종들을 쳐다봤다가, 종국엔 저를 봤다.

    사장님, 사장님…….

    작은 목소리가 저를 부르는 게 아득히 멀리서 들려왔다. 달싹이는 통통한 입술이 참 어여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진을 껴안고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게도. 저 작고 청량한 몸을 안고 자면 이 모든 악몽이 끝나지 않을까, 아침이 되어 달콤하게 입을 맞추며 잘 잤냐고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욕심이 났다.

    그러나 그 욕심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잔인하게 참수당했다. 아진의 보자기에서 명진의 시계가 나온 순간이었다.

    석주의 눈앞이 빛 한 점 들지 않는 암흑으로 뒤덮였다.

    석주의 손찌검에 쓰러진 아진이 눈물을 찔끔찔끔 짜냈다. 눈알은 지끈거리고, 코피는 줄줄 흐르고, 혀 위로는 피가 넘실거리는 고통이 너무 버거워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진이 꿈틀꿈틀 몸을 떠는데, 조직원 하나가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 아진의 바지 주머니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진 것을 주워 들었다. 허, 하고 탄식한 그가 그것을 석주에게 내밀었다.

    “형님. 이것 좀 보십쇼.”

    석주의 라이터와 뒷집 열쇠였다. 반질반질하니 새것 티가 나는 뒷집 열쇠는 보자기에 있는 열쇠 꾸러미와 한 짝인 듯했다.

    “…….”

    석주는 조직원의 손에서 라이터만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엄지를 세차게 내려 불을 켰다. 붉은 어스름이 석주의 콧잔등을 스쳤다.

    불을 몇 번 껐다 켜며 무언갈 생각하던 석주가 바닥에 널브러진 아진의 공책을 주워 들었다. 또박또박 힘주어 쓴 글씨는 아직 서툴러서 영 어른이 쓴 것 같지 않았다.

    석주는 그 공책에다 불을 붙였다. 먹잇감을 만난 불이 좋다고 펄쩍펄쩍 날뛰었다. 불붙은 공책은 곧 아진의 짐 꾸러미 위로 떨어졌다.

    불은 순식간에 몸집을 키웠다. 번쩍이는 패물, 크리스털 컵, 돈과 약으로 모자라 낡은 옷, 초콜릿, 석주가 사 준 잠바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까지 활활 태웠다.

    “…….”

    아진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코앞에서 불길이 일렁이는데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추워졌다. 손이 얼고, 발이 얼고, 등이 얼고, 목까지 얼었다. 아진은 무언가에 짓눌린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대충 얼마쯤 되지?”

    석주가 입에서 담배를 빼내며 물었다.

    “15만 원쯤 됩니다. 약까지 포함하면 30만 원도 더 됩니다.”

    조직원이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며 대답했다. 석주가 쓰게 조소했다. 거기다 명진이 다친 값에, 불에 탄 뒷집까지 포함하면 얼마쯤 하려나. 100만 원쯤 되려나…….

    100만 원. 석주에겐 그렇게 큰돈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겐 입이 떡 벌어질 돈이었다. 팔자 한번 크게 고칠 수 있는 돈이니까.

    “칼…… 들고 올까요?”

    조직원이 슬쩍 물었다. 그 말에 아진이 눈을 부릅떴다. 팔이 잘리던 돼지의 모습 떠올랐다. 그때 그가 훔쳤던 게 얼마였더라. 확실히는 모르지만 지금 불에 타는 제 물건이 아닌 제 물건에 비하면 훨씬 약소한 금액일 터였다.

    돼지가 어깨와 팔꿈치 가운데쯤 잘렸으니, 저는 어깨까지, 아니 어쩌면 상체가 반쯤 썰릴지도 몰랐다.

    아진은 순간, 어깨도 없고 다리도 절며 밥을 빌어먹는 제 환상을 봤다. 온갖 혐오와 멸시를 받으며 살다, 소리소문없이 죽는 제 모습을 봤다.

    아진이 튕기듯 일어났다. 그리고 두 손바닥을 붙이고 빌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사장님. 제가 안 그랬어요. 제가, 제가 안 그랬어요…….”

    진정 제 것이 아닌 것에 손댄 적이 없었다. 하물며 석주의 방에 있는 초콜릿 하나, 사탕 하나 그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은 게 없다. 그런 제가 어떻게 시계를 훔치고, 컵을 훔치고, 돈과 약을 훔치겠나. 어림도 없었다.

    아진은 정말 억울했다. 그러나 지금은 억울함보다 공포가 앞섰다. 눈물로 점철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석주의 얼굴이 뿌옇게 번졌다. 그것조차도 무서워서 손등으로 눈물을 벅벅 닦아 냈다.

    “…….”

    석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비스듬히 서서 담배만 뻑뻑 피워 댔다.

    아진은 그의 담배가 쑥쑥 줄어들 때마다, 희미하게 불씨가 남은 담뱃재가 흩날릴 때마다 공포에 움찔움찔 떨어야 했다.

    그때. 석주가 조직원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 한 번의 까딱임으로 아진은 팔이 잘리게 됐다. 조직원 몇이 얼른 창고 쪽으로 뛰어갔다. 아진은 타닥타닥 흙을 튕기며 멀어지는 조직원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근데 꿈이 아니라는 걸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저는 왜 여기 이렇게 죄인처럼 있으며, 석주는 왜 저를 원수 보듯 하고 있나. 어째서 이리된 건가.

    명진이 칼에 찔린 그 순간부터 아진의 세상은 괴이하게 뒤바뀌고 있었다.

    체벌 준비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바닥에 비닐이 깔리고, 도축장에서 쓸 법한 큰 톱이 들어오고, 조직원 두 명이 아진을 향해 다가왔다. 그쯤엔 보자기를 활활 태우던 불조차 사그라들었다. 세상이 한층 어두워지고, 추워졌다.

    조직원 두 명이 아진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아진이 파드득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미꾸라지처럼 조직원들의 손아귀를 피한 그는 엉금엉금 무릎걸음으로 석주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 후 석주의 바짓가랑이를 쥐고, 그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사장님, 진짜 제가 안 그랬어요. 저 아무것도 안 훔쳤어요. 저게 뭔지도 몰라요. 저는 그냥,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이러지 마세요. 제발요. 네?”

    “…….”

    “사장님. 사장님…….”

    아진의 간곡한 부름에도 석주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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