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끄트머리에서 자는 게 싫다고 툴툴거리던 통통한 입술이 떠올랐다.
‘창호지 문 사이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데 엄청 추워요. 여름엔 모기도 많고……. 그리고 사람들이 화장실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머리를 타 넘고 다녀서 기분이 엄청 나쁘다니까요? 아저씨 한 명은 화장실 갈 때 신발도 안 신고 가요. 그래서 제 이불에 흙 다 묻히고 그래요. 지린내도 나고. 으, 진짜 더럽죠? 왜 바꿔 달라고 안 하냐고요? 그야 제가 막내니까……. 어쩔 수 없죠. 저도 나이가 들면 안쪽에서 잘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서른쯤 되면? 그리고 지금은 어차피 사장님 방에서 자잖아요. 그러니까 상관없어요.’
라면서 예쁘게 웃었었다.
아진의 자리엔 이불조차 깔려 있지 않았다. 전화를 받았던 종이 한 말 그대로였다.
석주가 건조한 낯으로 아진의 자리를 응시하는데, 쿵쿵쿵 누군가가 뒤꿈치로 마루를 찧으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석주가 고개를 돌렸다. 조직원 하나가 복도를 뛰어오고 있었다.
“아진이 찾았어?”
석주가 얼른 물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조직원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심각한 낯으로 말을 끌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좀……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석주가 창고 안으로 발을 디뎠다. 창고 특유의 꿉꿉한 악취가 확 밀려왔다. 그 사이에 비릿한 혈향이 엉켜 있었다. 조직원이 한쪽으로 손전등을 비추었다. 석주의 시선이 자연히 그리로 향했다.
그곳엔,
“…….”
도은이 죽어 있었다.
그녀는 피에 전 머리를 아무렇게나 흩뿌린 채 낡은 이불 위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에 작으나 깊은 상처가 나 있었는데, 과도 크기의 칼로 냅다 찌른 듯했다.
석주가 엄지와 중지로 자신의 눈두덩을 꾹 눌렀다.
시체는 수도 없이 봐 왔다. 깡패 짓을 하면서 가장 무감해진 게 시체와 피다. 마구잡이로 썰린 신체도 숱하게 봐왔다.
근데 그건 남자, 사내의 시체에 국한해서고. 여자 시체는 느낌이 다르다. 정말 파렴치한 짓을, 하면 안 되는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그녀의 목을 쑤신 게 아닌데도 그랬으며, 그녀가 명진의 가슴에 칼을 꽂은 원수인데도 그랬다.
“이불 깨끗한 거로 새로 가져와서 덮어라.”
석주가 나직이 명령했다.
“예, 형님.”
석주의 곁에 서 있던 조직원 하나가 얼른 창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그의 빈자리를 또 다른 조직원이 채웠다. 그는 창고 밖에 멀뚱히 서 있는 남자 종 하나를 손짓으로 불러냈다.
“아저씨. 여 와 보소. 형님. 저 아저씨가 저 여자가 죽은 걸 발견했다 캅니다. 아저씨. 아까 내한테 했던 말, 형님한테도 똑같이 해 봐요.”
그에 남자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나이가 마흔쯤 되어 보이는 마른 남자였다. 단전 아래에 두 손을 모은 그가 석주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는 더듬더듬 입을 뗐다.
“제, 제가 아까 사장님 전화 받은 사람입니다. 그, 아진이를 찾으시는 것 같아서, 전화를 끊고도 집 여기저기를 둘러봤거든요. 그러다 저기 산홍이가, 어, 저기 머리 짧은 저놈입니다. 예. 저놈이 화장실 가길래 혹시 아진이 봤냐-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
“아진이가 이것저것 싸 들고 이 창고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겁니다.”
그 말에 석주의 한쪽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여기서도 아진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순간 뒤통수라도 맞은 듯 넋이 빠졌다. 그러든 말든 종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아진이가 여기 있겠구나, 했습니다. 걔가 도박장에 있을 때부터 창녀들이랑 친했거든요. 누나, 누나, 하면서 따라다니기도 했고 창녀들도 아진이를 동생처럼 챙기고 그래서…….”
“…….”
“여기 왔다가 저기, 저, 도은이랑 노닥거리다 자는 게 아닌가 싶어서 들여다봤는데……. 아진이는 없고 도은이만 죽어, 죽어 있어서……. 너무 놀라서 온 집안사람을 다 깨웠습니다.”
석주가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곰팡이가 슨 창고 천장이 보였다. 잠시 그것을 보던 석주가 뒤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 끝에는 조금 전 종이 가리켰던 산홍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석주의 시선을 눈치챈 조직원이 그를 불렀다.
“어여. 니도 여 와 봐라.”
그에 산홍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광대가 도드라졌고, 삼십 대쯤 되어 보였다. 조직원이 그를 비딱하게 쳐다보며 캐물었다.
“니 진짜 아진이 봤나? 아진이 맞다고 확신할 수 있나?”
“아, 예. 이 집에 다리 저는 애가 걔밖에 더 있습니까. 아진이가 걷는 건 몇 리 밖에서도 보입죠.”
“멀리서라면 아진이가 아닐 수도-”
“아진이 맞습니다. 분명.”
산홍이 단호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했다. 조직원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뒤틀렸다. 그가 석주를 슬쩍 바라봤다. 이제 어쩌냐는 뜻이었다.
석주가 다시 도은을 쳐다봤다. 제가 쐈던 총구멍이 있는 곳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석주가 그것을 보기 위해 한 발 앞으로 내딛는데. 바스락. 무언가가 밟혔다.
시선을 내리자 손바닥만 한 검은 무언가가 보였다.
초콜릿이었다.
석주가 아진에게 주었던 그 초콜릿이다. 값도 값이지만 국내에 따로 수입되는 게 아니라서 오로지 석주만 구할 수 있는 그 초콜릿이었다. 이로써 아진이 이곳에 들렀다는 게 확실해졌다.
“…….”
석주는 아무런 말 없이 창고에서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한데, 신기하게도 전처럼 머리가 아프진 않았다. 모든 게 명확해지고 있어서 그랬다. 이제 더는 잡을 미련도 고집도 없었다.
그런 석주의 곁으로 여자 종 두 명이 쪼르르 달려와 입을 놀렸다.
“아진이 말이에요. 아까 낮에 사장님 방에 들어가서 누구랑 전화도 했어요. 한참 동안 전화기를 잡고 있었다니까요.”
“맞아요. 저도 봤어요. 살금살금 사장님 방 가길래 욕실 창문으로 뭐 하나 몰래 훔쳐봤거든요.”
“소리는 안 들려서 누구랑 전화했는진 모르겠는데, 아무튼 누구랑 전화하긴 했어요.”
전화. 뻔한 상황이었다. 꽃님을 빼내겠다는 소식을 받았거나, 인제 그만 집에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거나, 그런 거겠지.
석주가 그렇게 생각하든 하지 않든, 정황상 그게 확실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직원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려왔다.
“아진이 그거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또라이 아닙니까? 붕대 감아 주고 상처 치료해 주더니 직이삐는 거?”
“안심하게 하고 쉽게 죽일라 칸 게 아니겠나?”
“어떻게 죽였든 간에 캥기는 게 있으니까 죽인 거지요? 지 정체가 들킬 것 같으니까. 도은, 저 여자는 그냥 이용당한 모양입니다.”
석주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아진이 도은을 죽였다. ……진짜 죽였을까?
그 언젠가, 패물을 훔치다 잡힌 돼지의 팔뚝을 자를 때가 떠올랐다. 죽이는 것도 아니고 팔을 잘라 내는 건데. 아진은 그것도 못 보겠는지 제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등 뒤로 얼굴을 숨겼었다.
근데 그런 애가 여자 하나 죽이겠다고 붕대까지 감아 주며 경계를 풀게 하고, 망설임 없이 목에다 칼을 쑤셨을까.
그랬을까.
모르겠다. 제가 아는 아진이 제가 품고 살던 아진인지, 도박장에서 남자들에게 몸을 팔던 아진인지 알 수가 없어서.
석주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는데. 저 멀리서 또 다른 조직원이 빽 소리를 질러 왔다.
“형님!”
“씨발…….”
석주가 나직이 욕을 짓씹었다. 형님, 형님. 저놈의 형님 소리가 오늘은 왜 이리도 듣기 거북한지. 저 후에 딸려 오는 말이 하나같이 좆같아서 그랬다.
석주가 입술을 실쭉이며 달려오는 조직원을 응시했다. 이번엔 또 어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을까, 허망한 기대까지 됐다.
마침내 조직원이 석주의 앞에 도착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이었다. 석주는 직감했다. 명진이 다쳤던 것만큼이나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조직원이 뻐끔뻐끔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곁에 있던 다른 이가 “뭐, 뭐. 말을 해라, 이 새끼야.”라며 그의 등을 탕탕 두드리고서야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뒷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 말에 모든 조직원이 입을 쩍 벌렸다.
“…….”
석주도 눈썹을 삐죽 올렸다. 그가 손바닥으로 한쪽 눈을 가렸다. 그러고는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시리고 메마른 겨울밤. 석주의 낮은 웃음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불이 난 뒷집은 심각한데, 또 그렇게 심각하지도 않았다. 건물 전체가 홀라당 탄 게 아니라 한쪽만 탔는데, 공교롭게도, 우연히도 재료를 보관해 두는 곳이었다.
마약 재료들이 타오르는 냄새가 독했다. 코가 찡하고 눈이 매울 정도였다.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석주는 담배를 문 채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뒷집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직원들은 세숫대야나 바가지를 들고 남은 불씨에다 물을 끼얹었다. 불은 금세 진압됐다.
허나 탄 재료, 그을린 재료, 재를 뒤집어쓴 기계들. 뭐 하나 건질 수 있는 게 없었다.
석주가 까맣게 그을린 벽을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조직원 몇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불이 크게 안 번진 거로 봐서 이놈 이거 토낀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이쪽으로는 차가 못 다니니까 산 근처에 있을 겁니다. 산도 험하고, 경사도 가파르고. 아진이 다리로는 멀리 못 가지 말입니다.”
아진은 하룻밤 새에 죄가 참 많이도 생겼다. 도은을 죽이고, 뒷집엔 불을 지르고, 중호파의 끄나풀에다, 도은을 꼬드겨 명진의 가슴에 칼까지 꽂은, 대단한 프락치가 됐다.
석주가 헛웃음을 흘리는데, 조직원이 슬그머니 물었다.
“형님? 무슨 생각 하십니까?”
“별거 아냐. 박기헌을 잡아다 목구멍에 수류탄이라도 쑤셔 넣어 줘야 하나, 뭐 그런 생각.”
“수류탄 챙겨 올깝쇼? 근데 수류탄 그게 은근히 크기가 좀 돼서 입에는 잘 안 들어갈 낀데……. 뭐, 반만 넣어도 얼굴이 날라가긴 할 겁니다.”
“푸흐, 아니, 아니다. 아직은, 아니야.”
석주가 조직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그러다 돌연 표정을 굳혔다. 그가 잇새로 담배 연기를 흩뿌리며 말했다.
“아진이 찾아. 찾아서 데리고 와. 죽이진 말고.”
“예, 형님.”
조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그리고 장장 다섯 시간 후. 석주는 아진과 조우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