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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75화 (75/261)

75화

거꾸로 맞춘 조각

꽃님의 병실은 텅 비어 있었다. 정말 텅. 침대조차 없이 공허하게 비어 있었다. 꽃님이 달고 있던 묵직한 기계들은 삐, 삐, 삐,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문은 훤히 열린 채였다.

병실에 붙여 둔 조직원 둘은 피가 철철 흐르는 배를 부여잡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어물어물 말한 바로는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가 오길래 길을 비켜 주었고, 그러다 불시에 칼을 맞았다고 했다. 곧 덩치 좋은 사내가 여섯이나 들이닥쳤고, 꽃님을 침대째로 데리고 나갔다고.

석주는 다친 조직원들을 추슬러 의사에게 보낸 후, 병실을 둘러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수소문하며 당시의 상황을 알아보라 했다. 조직원 몇이 우르르 뛰어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이 간땡이 부은 새끼들이 침대째로 데리고 갔다는데 진짜 미친놈들 아입니까? 이 시간에? 우리가 명진이 형님 때문에 떼거리로 있는 걸 알고 있을 낀데 말입니다.”

“납치겠지예? 명진이 형님에 이어서 꽃님이 아줌마까지 어떻게 해 버리는 거 아입니까?”

“납치는, 븅딱아. 그 다 죽어 가는 아줌마를, 가족 하나 없는데. 납치해서 얻을 게 뭐냐? 납치 아입니다, 형님. 데리고 간 겁니다.”

잠자코 듣던 석주가 마지막으로 말한 조직원을 휙 쳐다봤다.

“왜?”

“예?”

“다 죽어 가는 아줌마를, 굳이 우리가 득실거리는 이 병원까지 쳐들어와서, 침대째로 데려간 이유가 뭐냐고?”

“그야…….”

“그야?”

“그쪽 식구니까 싸고도는 거지요. 그쪽 식구니까. 아줌마도 프락치였던 겁니다. 최진걸 그 새끼처럼요. 명진이 형님이 죽은 것도 아니고, 상황도 요상하게 흘러가고 그러니까 식구들이라도 빼내려고 한 거 아니겠습니까?”

“…….”

“그게 아니고서야 아줌마를 빼 갈 이유가 없다 아입니까. 우리 엿 먹이게 하려는 거였으면 누워 있는 명진이 형님이나, 아니면 다른 형님들을 담갔겠지요.”

“…….”

“우리가 쌩돈 주고 죽어 가는 아줌마 수술도 시켜 놨겠다, 큰 기둥인 명진이 형님도 담갔겠다, 이제 진짜 전쟁 함 치를라고 카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거 식구들은 미리미리 빼 가는 거지요.”

석주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진걸을 처리함으로써 한결 맑아졌던 머릿속에 다시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간만에 기헌의 얼굴이 떠올랐다. 중호파의 수장인 기헌 말이다. 만약 이 모든 게 중호파의 짓이라면 실로 놀라웠다. 얕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치밀할 줄이야.

꽃님까지 그들이 심어 둔 사람이라면 이 거대한 계략은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계획된 건가.

그녀는 전혀 의심하지 못했는데. 혹 진걸을 붙여 둔 이유가 꽃님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진걸은 어떻게 봐도 수상하니 차라리 그쪽으로 신경을 쏟게 해서 꽃님을 숨기는, 그런 계략이 아니었을까.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돌연 표정을 굳혔다.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집에 있는 종들은 모두 잘 시간이었다. 물론, 아진도 포함해서.

병실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석주가 바닥에 널브러진 전화기를 주워 들었다. 아진과 통화하라고 꽃님의 병실에 손수 설치해 준 그 전화기였다. 그가 휙휙 빠른 손놀림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어디 거시는 겁니까?”

조직원 하나가 물었다.

“집에.”

석주가 뚜르르, 뚜르르 신호가 이어지는 수화기를 든 채 대답했다.

“집에는 왜……?”

조직원들이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석주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든 말든 석주는 신호음이 끊기길 기다렸다.

신호음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럴수록 석주의 미간은 점점 더 좁아졌다. 그러다 마침내. 뚝, 하고 신호음이 끊겼다. 그러고는 낯선 음성 하나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왔다.

-뉘, 뉘십니까……. 저는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만…….

“강석주입니다.”

-아이고, 강 사장님. 이게, 제가 소피 보러 가다가 전화가 막 쩌렁쩌렁 울려서 받았는데. 제가 받아도 되는 건지……. 거참……. 사장님 방까지 함부로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물어볼 게 있는데.”

-예. 뭡니까?

석주는 입을 떼기 전에 목을 잠깐 가다듬었다. 그의 두툼한 목젖이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아진이…… 집에 있습니까?”

그렇게 목을 가다듬었음에도 목소리가 억눌렸다. 집에 있냐고 물어보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질문이라고 이리 긴장이 되는 건지. 석주가 수화기를 꾹 틀어쥐는데, 반대편에서 몹시 가벼운 답이 흘러왔다.

-아진이요? 아진이야 집에 있지요.

“지금 확인한 겁니까?”

-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 시간이 시간이니 방에서 자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 확인 부탁합니다.”

-그건 왜…….

“지금. 당장 말입니다.”

-아, 예. 조금만 기다리세요.

석주의 채근에 종이 귀찮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 수화기를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 소리 섞인 정적이 이어졌다. 석주는 초조하게 그 정적을 듣고 있었다.

중호파가 정말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면, 그래서 자신들의 식구들을 빼내 가고 있는 거라면. 아진의 행방이 그의 결백을 증명해 줄 것이다.

꽃님까지 침대째로 빼 간 시점에 제 눈을 홀리고, 미역국에 약을 타고, 도은을 구슬려 명진의 가슴팍에 칼까지 꽂은 아진을 제집에 그냥 두진 않았을 테니까.

석주가 수화기를 반대 손으로 옮겨 쥐었다. 자꾸 손바닥에 땀이 찼다. 그가 불그스름한 자신의 손바닥을 보며 인상을 쓰는데. 고요하던 수화기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사장님.

“아진이는요?”

-그게…… 아진이가 자리에 없는데요.

“……없어?”

순간, 석주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꽁꽁 언 세상이 밟힌 살얼음처럼 와작와작 부서지는 것 같았다.

-예. 저랑 같은 방 쓰거든요. 이불도 안 깔린 게 눕지도 않은 것 같은데…….

“혹시-”

-예. 혹시나 싶어 화장실도 보고, 부엌도 봤는데 없습니다. 어디 자빠져 자는 건지……. 애가 추위를 유난스럽게 많이 타서 또 어디 뜨끈한 아랫목 찾아서 자는 게 아닐까 싶-

석주가 수화기를 쾅,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진이 집에 없다. 이 시간에 그가 집에 없을 이유가 없는데, 없다. 열한 시만 넘어도 꾸벅꾸벅 졸면서. 이불조차 펴지 않았다. 사라진 지 몇 시간 됐다는 뜻이다.

석주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어금니를 꽈악 짓씹자 관자놀이가 불룩 솟아올랐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근래 계속 병원에 가고 싶다고 칭얼거리던 아진의 목소리가 석주의 정수리를 송곳으로 찌르듯 쿡쿡 들쑤셔 댔다.

‘벼, 병원에 가야…….’

‘괜찮아요. 갈 수 있어요. 차 하나도 안 무서워요, 이제.’

‘내일, 내일은 꽃님이 아줌마가 수술하는 날이잖아요…….’

‘아무리 쉬운 수술이라도 생살을 찢었으니 일어나면 엄청 아플 텐데……. 아파서 엉엉 울면 어째요? 달래 줄 사람도 없고……. 물론, 우리 아줌마가 아프다고 울 사람은 아닌데, 병원에 혼자 있으면 외로우니까…… 서럽고 무서워서 울지도 모르잖아요…….’

‘아줌마가…… 보고 싶어요…….’

‘정말요? 병원에 데려가 주실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사장님……. 이 은혜 꼭 갚을게요.’

너는 실로 병원에 오고 싶던 게 맞을까. 꽃님을 걱정한 게 맞을까. 걱정과 수심이 가득한 그 애달픈 표정과 목소리가 진실이긴 했을까.

그냥 집을 벗어나고 싶었던 건 아닌가. 도망칠 기회를 엿보던 건 아닌가. 병원에 오자마자 꽃님과 사라지려 했던 건 아닌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었을까. 그 예쁜 얼굴과 목소리로 또 어떻게 저를 홀리려 했을까.

의심할 수 없는 것들에게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들에게도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석주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후우우, 한숨 같은 숨을 내쉬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혼자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진을 만나야 했다. 만나서 그의 결백이든 거짓이든 들어야 했다.

석주가 휙 몸을 돌렸다. 파도 무늬가 수놓인 두루마기가 크게 펄럭거렸다.

“집으로 가자.”

아진아. 제발. 집에 있어라. 제발.

따뜻한 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자고 있어. 그리고 들이닥치듯 등장한 날 보고 웃어 줘. 내가 보고 싶었다고 말해. 따뜻한 내 품이 그리웠다고 칭얼거려. 그럼 다 괜찮아.

다, 괜찮아.

* * *

석주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뜻밖의 소란과 마주해야 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 종들이 자지 않고 마당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주의 만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언뜻 봐도 또 다른 일이 터졌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가늠조차 안 되는데,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석주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곁에 선 조직원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

“예.”

석주는 그 짧은 명령을 마침과 동시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아진이 없다는 걸 알지만, 제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혹시, 정말 혹시. 전화를 받았던 그 종이 제 방에서 자는 아진을 못 봤을 수도 있는 거니까. 아진은 잠꼬대도 하지 않고 새근새근 조용히 자니까.

석주가 벌컥,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달칵 불을 켰다.

“…….”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늘 이불이 깔리던 곳도 멀끔했다. 주인이 없어 불을 때지 않은 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석주가 꾹 눈을 감았다. 이미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 와중에도 혹시나 싶어 욕실도 보고 서재도 봤다. 하지만 그 역시 텅 비어 있었다.

허나 석주는 거기서 미련을 놓지 않았다. 그대로 방을 돌아 나와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는 공허하게 빈 다실도 보고, 밥 냄새 대신 바람 냄새만 나는 부엌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아진이 머무는, 사내종들의 방에 다다랐다.

“…….”

문 앞에서 잠깐 마른침을 삼킨 석주가 비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방은 여태 모든 공간이 그랬던 것처럼 비어 있었다. 종들이 덮고 자던 이불이 아무렇게나 펼쳐지고, 또 구겨져 있었는데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방을 훑어보던 석주의 시선이 건너편 창호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아진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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