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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74화 (74/261)

74화

“아니요.”

진걸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용서했다면 거짓말이죠. 그놈을 아무리 두들겨 패도, 그놈이 제 앞에 무릎 꿇고 빌어도, 죽은 진수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

“근데 사장님이 끼고 도시니까. 괜히 아진이 놈을 싫어하는 티를 내 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한 말이었다. 문장에 막힘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진에게 분노하는 마음은 진실인 모양이었다.

석주는 반쯤 남은 담배를 그대로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마른 잔디 사이로 나뒹구는 담배를 구둣발로 꾹꾹 비벼 껐다. 시뻘겋던 불씨가 맥없이 죽었다. 석주는 담배의 보잘것없는 죽음을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진걸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후 어깨와 가슴을 펼치곤 석주를 직시했다. 처음 그의 낯빛에 스며 있던 묘한 흥분감과 방금까지 나돌던 희미한 분노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석주가 가면 같은 그 얼굴을 빤히 보는데, 진걸이 낮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근데 아진이는 왜 물어보십니까? 무슨 일 있습니까? 설마…… 명진이 형님이랑 관련 있는 겁니까?”

그때. 돌연 석주의 미간이 확 좁아 들었다. 찰나, 진걸의 얼굴에 괴이한 미소가 어스름히 스몄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진, 명진, 형님. 세 사람을 동시에 입에 올리며 비릿하게 웃는 모습이 망측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석주의 기분이 바닥으로 확 내리꽂혔다.

벽에 기대어 있던 석주가 진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달빛을 등진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진걸의 머리를 덮쳤다. 진걸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왜 그렇게 보십니까?”

“왜 웃어?”

“……예?”

“왜 웃냐고.”

“아, 제가 웃었습니까? 어두워서 잘못 보신 모양입니다.”

진걸이 엄지와 중지로 자신의 입가를 슥슥 눌러 내렸다. 그에 석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입술이 옆으로 길게 벌어질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그래? 내가 잘못 봤다고? 어두워서?”

참 보기 좋고 잘생긴 얼굴이거늘, 진걸은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그러잖아도 추운 겨울밤인데. 몸이 꽁꽁 어는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그가 다시금 뒷걸음질 칠 때였다.

탕!

날카로우면서도 우렁찬 굉음이 세상을 울렸다. 진걸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놀란 그가 굉음의 시발지를 찾아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이내, 석주의 손에 들린 검은 권총을 발견했다. 푸른 달빛을 받은 권총이 번들거렸다.

그와 동시에 명치 언저리가 불에 지진 듯 뜨거워졌다. 진걸이 숨을 멈춘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제 가슴에 새카만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사이로 뜨끈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 기이한 광경을 멍하니 보던 진걸이 다시 석주를 쳐다봤다. 그러자 석주가 눈썹을 어그러트리며 권총을 들어 보였다.

“미안. 어두워서 잘못 쐈다.”

그 말을 끝으로 진걸이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추위에 얼어 단단해진 바닥이 뒤통수를 아프게 후려쳤다. 별이 주렁주렁 걸린 밤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눈을 부릅뜬 진걸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혀, 형님……. 왜, 왜…….”

석주가 뭍에 나온 잉어처럼 꿈틀거리는 진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 아직 열기가 남은 권총으로 진걸의 턱을 툭툭 두드렸다.

“내가 요즘, 머리가 많이 복잡해.”

“큭…….”

“그래서 너까지 신경 써 줄 겨를이 없네. 미안해.”

진걸이 석주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쿨럭 기침했다. 벌어진 목구멍 사이로 피가 울컥 솟구쳤다.

석주는 죽어 가는 진걸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전에 없이 서늘하고 시렸다.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석주는 지금 매우, 매우 분노한 상태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명진이 손가락과 폐가 썰려 혼수상태에 있는데, 분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잖아도 열이 많은데 가슴에 분노가 부글부글 차오르니 정수리도 뜨끈하고, 눈알은 타오르는 것 같고, 심장은 불에 달군 쇠꼬챙이에 쑤셔지는 것처럼 괴로웠다.

제 사람이 다쳤다는 분노. 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제 사람이 저 꼴이 되도록 아무것도 몰랐다는 자괴감.

그 모든 게 석주의 눈과 귀를 멀게 했다. 가히 아버지가 길바닥을 배회하다 돌아가셨던 그때와 비등한 수준의 분노가 석주를 들쑤시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의심스러운 진걸을 굳이 곁에 두며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건 좀…… 번거롭고 귀찮지 않나.

“그래도 네가 빙글빙글 웃는 꼴을 보아하니, 아진이가 남창이든 말든, 내가 그것에 휘둘려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건 알겠다.”

그 말에 진걸의 눈코입이 크게 벌어졌다.

“형님. 아닙, 쿨럭,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가 손을 휘적거렸다. 손끝에 석주의 바짓단이 닿았다. 진걸이 그것을 움켜쥐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덕재가 진걸의 손을 꾹 밟았다. 찰나 닿았던 석주의 바짓단이 멀어졌다.

진걸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나부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게 아닌데.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벌써 죽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나.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나. 어떻게 해야, 어떻게…….

그가 숨을 컥컥거리며 고민하는데. 눈앞으로 총이 다가왔다. 그 뒤로 희뿌옇게 번진 석주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고저 없이 말했다.

“살려 줘서 고마웠다.”

“허어억…….”

“부조는 넉넉히 하마. 장례식이 열릴진 모르겠지만.”

석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와 동시에 또 탕!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걸의 오른쪽 눈에 크고 검은 구멍이 생겼다. 반대쪽 눈은 튀어나올 듯 크게 뜨여 있었다.

석주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뺨에 피가 튄 게 느껴졌다. 그것을 손바닥으로 대충 닦으려는데. 진걸의 손을 밟고 있던 덕재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석주가 피식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우락부락한 사내새끼가 이런 걸 왜 가지고 다니는 건지……. 기껏 가지고 다니면서 고작 피 닦는 데 쓰라고 주는 건 또 뭔지…….

“고맙다, 덕재야.”

“아입니다, 형님.”

석주는 손수건으로 뺨을 닦아 냈다. 허나 뇌수와 질퍽하게 섞인 피는 쉽게 닦이지 않았다. 그의 미간에 옅은 짜증이 묻어났다. 그러다 숨을 크게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가 밤하늘 저 멀리로 시선을 던졌다.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 사진은 무엇인지. 아진이 진짜 남창이었던 건지. 제게 왜 거짓말을 했는지. 혹 그것 말고도 제게 거짓을 말한 게 더 있는지 알아야 했다.

아니, 아니다. 그딴 건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명진이다.

그가 병실에 누워 있는 그 근본적인 이유에 중호파가 있는지, 그렇다면 중호파가 어떻게 미역국에 약을 타고, 창녀들을 집으로 보냈는지. 명진의 가슴에 칼을 꽂은 도은이 아진의 이름을 부르짖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걸 알아야 했다.

그러니 아진이 남창이었건 말건,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그딴 것에 휘둘리면 안 됐다. 그러기 위해 진걸을 처리한 것이지 않나.

피를 모두 닦은 석주가 손수건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덕재가 그것을 슬쩍 빼선 자신의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조직원들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진걸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석주가 나직이 덕재를 불렀다.

“덕재야.”

“예, 형님.”

“이 새끼 목 썰어다 중호파 술집으로 보내라.”

“……예? 그럼 그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그렇겠지.”

“가서 함 뒤엎고 올까요?”

“아니. 이게 뭐냐고 지랄하면, 좋은 술을 보내려던 건데 잘못 가져왔다고 정중히 사과하고, 다시 술 갖다 주고 와. 술은 회사 창고에 있는 거 아무거나 들고 가고.”

“……예.”

덕재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긴 했지만 금세 긍정을 내놓았다. 석주에게 다 생각이 있겠지, 싶어서.

석주가 그런 덕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반응 잘 살펴라. 진걸이 이 새끼 얼굴 보고 황당해하는지, 화내는지, 것도 아니면 슬퍼하는지. 잘 봐야 한다.”

“예, 형님.”

덕재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조직원 몇이 진걸의 시체를 들고 그를 따라 사라졌다.

소란스럽던 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몰아치는 밤바람만 스산한 소리를 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석주가 흙바닥에 흥건히 남은 진걸의 핏자국을 내려다봤다.

판단은 제 몫이다. 진걸이 이죽거렸던 걸 보아 아진은 수렁에 빠졌을 뿐, 무고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행인데. 그래야 할 텐데.

고심하는 그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탁했다. 그가 입김을 내뿜으며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 때였다.

“형님! 형님!”

저 멀리서 말단 조직원 하나가 애타게 석주를 부르며 뛰어왔다. 석주의 눈썹이 어그러졌다. 또 무슨 일인가. 설마 명진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그가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무는데, 조직원이 헉헉거리며 석주의 앞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도, 상상치도 못했던 소식을 전했다.

“꽃님이 아줌마가 없어졌습니다!”

그 말에 석주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

“……뭐라고?”

가볍게 물고 있던 담배가 아래로 낙하했다. 잠깐 멈칫거렸던 그가 병원 안으로 달려갔다. 조직원들이 우르르 그를 뒤따랐다.

석주는 모르나, 언젠가 아진과 꽃님이 진걸의 죽음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진이 진걸에게 주걱을 휘둘렀던 그날. 꽃님이 쓰러지기 직전에.

‘아줌마가 진걸이 새끼한테 할 말이 뭐가 있냐니까!’

‘집에서 나가라고 했어!’

‘뭐?’

‘진걸이 저놈 여기 계속 있으면 필히 뒈질 팔자야. 그래서 나가라고 했다.’

‘……진걸이 새끼 걱정하는 거야? 아줌마 진걸이 새끼 좋아해? 나보다 더?’

‘미친놈. 지랄 똥을 싸라. 내가 뭐 하러 그 새끼를 걱정해? 혼자 뒈질 놈이 아니어서, 저승으로 가면서 꼭 누구 하나는 끌고 갈 놈이라서 나가라고 한 거다.’

저승으로 가면서 꼭 누구 하나는 끌고 갈 놈이라서 나가라고 한 거다.

꼭, 누구 하나는, 끌고 갈 놈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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