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두껍고 하얀 종이였는데, 두 번 접혀 있어서 꼬깃꼬깃했다. 조직원이 그것을 펼쳐 허벅지에다 대고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그는 사진을 뒤집은 채로 석주에게 내밀었다. 석주가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상하지. 어쩐지 그것을 받고 싶지가 않았다. 보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 봐야 한낱 종이일 뿐인데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머뭇거리던 석주가 마지못해 종이를 받았다. 그것은 사진이었다.
“…….”
석주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길게 내쉬며 사진을 뒤집었다.
사진은 특별하지 않았다. 열댓 명의 사람들이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조금 특별한 점을 꼽으라면 모두 여자라는 거였다.
여자들은 세 줄로 서 있었는데, 짧은 원피스나 고운 한복을 입은 채였다. 하나같이 입술이 검은 게 립스틱을 짙게 발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머리도 한껏 치장한 게 보통의 여자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 가감 없이 말하면 창녀들이었다. 가슴에 1부터 10까지의 번호표를 붙이고 손님을 기다리는 창녀들.
조직원이 이걸 왜 제게 보여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석주는 그 사진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혹 제가 아는 얼굴이라도 있나 싶어서.
그러다 익숙한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고운 생머리에 곱게 웃는 얼굴. 도은이었다. 명진의 가슴에 칼을 꽂을 때와는 사뭇 다른 얼굴이긴 하나 분명 그녀였다.
설핏 인상을 쓴 석주가 다시 찬찬히 사진을 살폈다. 그리고 뒤늦게, 조직원이 이 사진을 제게 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진이 있었다. 둘째 줄 구석. 앞머리를 훤히 깐 아진이 비스듬히 옆을 보고 있었다. 셔츠 차림이었는데, 단추를 몇 개나 푼 건지 가슴과 어깨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의 셔츠 칼라에는 [10]이라는 번호가 붙어 있었다.
아진인데, 아진이 아니었다. 석주가 여태 알아 온 아진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근데 분명 아진의 얼굴이었다. 큼지막한 눈도, 오뚝한 코도, 통통한 입술도, 분명 아진이 맞았다.
“…….”
들썩이던 석주의 가슴팍이 우뚝 멈췄다. 그런데 심장은 쿵, 쿵, 쿵 거칠게 뛰었다.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릴 정도로 세찬 박동이었다. 석주가 든 사진이 파르르 떨렸다.
“몇 주 전에 회사 창고 정리하다가 발견한 겁니다. 그 창고가 예전에는 금 사장이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쟁여 두던 곳이었는데……. 보고 받으셨겠지만 별별 게 다 나왔습니다. 뭐, 장부, 물 탄 술, 가게 돈 삥땅 친 거……. 어차피 뒤진 놈이니 쓸모없습니다만, 이건…….”
“근데 왜 보고 안 했어?”
“……죄송합니다. 요즘 형님이 잠도 잘 주무시고 그러니까……. 뭐, 그놈이 몸 팔았다고 그게 그렇게 큰일도 아니고……. 어차피 매번 언니야들 부르셨는데, 그 언니야들이나 그놈이나, 큰 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
“아니, 실은……. 명진이 형님이 보고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형님 이제 좀 주무시는데 괜히 말 만들지 말라고…….”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명진이 숨겼다니. 어이가 없었다. 물론 그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이 하잘것없는 사진으로 말미암아 본인의 가슴에 칼이 박힐 것이라곤.
잠시 명진을 보던 석주가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진 속의 아진은 보고 또 봐도 적응이 안 됐다.
그래. 몸 파는 게 뭐 그리 대수겠나. 어차피 매일 밤 창녀를 불러 자던 제가 아닌가. 저라고 어디 깨끗한가. 평생 아진을 바라며 순정을 지켜 온 것도 아니고. 구를 대로 굴러온 몸뚱인데 남창이 뭐 어때서.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는데, 머리가 뜨끈할 정도로 치미는 이 분노는 무엇인가. 가슴이 새까맣게 타는 듯한 이 배신감은 또 무엇인가.
‘사장님……. 저, 저어, 흐윽, 남창 아니에요…….’
‘어, 미안해. 미안하다…….’
‘흐우으……. 윽, 흐어어…….’
‘내가 어제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러면 안 됐는데…….’
그럼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나. 보는 이가 가슴이 다 저밀 정도로 서럽고, 또 예쁘게 울어서 절 홀리더니.
‘모자라면 더 줄게. 곱절로 더 줄 수 있어.’
‘남창 아니라니까!’
‘너…….’
‘남창 아니라는데 왜 돈을 줘요!’
주는 돈다발은 왜 내던졌나. 애써 지워 보려던 과거를 제가 파내서 그랬나. 오해가 싫어서 화를 낸 게 아니라, 치부를 들킬까 화를 낸 거였나.
그래도 그러지 말지. 그런 식으로 날 속이면 안 됐지. 사실대로 말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여전히 너는 너이니, 그대로 너를 예뻐하고 사랑했을 텐데.
왜 하필 이 순간에 들켜서, 내가 너를 의심하게 해. 내가 너를 놓게 해.
내가 너를…… 너를…….
생각을 이어 가던 석주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사진을 반으로 접었다.
아니. 아닐 수도 있지. 아진이 그랬다. 어릴 때부터 ‘누나’들이 잘 대해 줘서 친하다고. 상처가 많은 사람들끼리 돕고 살았다고. 그러니 그저 장난으로 찍은 것일 수도 있지.
석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진을 믿고 싶었다. 그에겐 아진의 결백이 필요했다. 아진이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변명을 해 줄 이가 필요했다.
검지로 사진을 문지르던 석주가 조직원에게 명령했다.
“최진걸.”
“예?”
“최진걸 불러와.”
‘아진이 도박장에서 하던 일이 무엇인가.’
석주가 진걸에게 한 질문이었다. 진걸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어……, 하고 말을 끌었다.
진걸은 평소와 자못 달랐다. 광대도 발그레하고, 숨도 가쁜 게 어디서 술을 진탕 마시다 온 것 같기도 했고, 떡을 치다 온 것 같기도 했다. 묘하게 흥분 상태였다.
진걸은 석주가 찾은 지 두 시간하고도 사십 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의심스러웠지만 석주는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묻지 않았다. 지금은 진걸이 뒤에서 무슨 개짓거리를 하든 알 바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한참 고민하던 진걸이 더듬더듬 답을 내놓았다.
“제가 도박장에서 나왔을 때 아진이가 열여섯이어서…….”
“그래도 말해 봐.”
“뭐…… 재떨이도 비우고, 청소도 하고, 부엌에서 설거지도 하고, 창고 정리도 하고, 어…… 손님 있으면…… 네. 그랬죠.”
“손님 있으면 뭐?”
“창녀들 하는 짓이랑 비슷한, 그런 거 말입니다. 애가 어려서 방까지는 안 올라가고 뭐 이래저래 다른 방법으로 돈 번 거로 알고 있습니다. 열여섯 이후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
“근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석주는 대답 대신 담배 연기를 흩뿌렸다.
두 사람은 병원 정원에 서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조직원들도 있었다. 석주가 진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새까만 밤하늘을 응시하는데. 진걸이 한 걸음 다가왔다.
“설마…… 형님 모르셨습니까? 아진이가 몸 팔았었다는 거?”
“응. 몰랐어.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지금도 딱히…… 관심 없어. 상관도 없고.”
석주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에 진걸의 한쪽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그가 마치 비밀을 이야기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놈이 얼굴도 하얗고 선도 가늘고……. 좀, 계집애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근데 그래 봐야 고추 달린 남자라서 금 사장님이 팔기 뭣하다- 했었거든요.”
“…….”
“그런데 돈 없어서 욕정을 못 푸는 놈들이 아쉬운 대로 아진이한테라도 좆질을 하고 싶어 하더라고요.”
“…….”
“그 덕에 아진이도 입에 풀칠하고 산 거죠. 애가 절름발이라 일도 잘 못하고, 밥만 축내는 것 같아서 쫓아내느니 마느니 했었거든요. 그렇게나마 몸을 팔 수 있는 게 아진이한텐 다행-”
“진걸아.”
“예, 형님.”
“넌 아진이랑 한집 사는 거 안 불편하냐?”
“……예?”
진걸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석주가 담배를 깊이 빨았다. 그리고 연기를 천천히 흘려보내며 진걸을 삐딱하게 내려다봤다.
“아진이 열 살 때. 아진이랑 네 동생이랑 심부름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네 동생만 죽었다며.”
“…….”
“그럼 미울 텐데. 괜찮냔 말이다.”
진걸이 헛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다 석주가 내뿜은 담배 연기를 잘못 들이켜 쿨럭쿨럭 둔탁하게 기침했다. 그래 봐야 연기인데 많이 역한지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눈가가 벌게질 정도로 콜록거렸다. 어쩌면 연기가 역한 게 아니라 다른 게 역했을 수도 있고.
한참 기침하던 진걸은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한 채로 더듬거렸다.
“아셨, 아셨습니까?”
“그럼.”
“아진이, 아진이 그 새끼가 말한 겁니까?”
“아니. 아진이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 내가 조사한 거지. 그 정도도 모르고 널 내 집에 들였을까.”
석주가 푸흐, 건조하게 웃었다. 사실 아진과 진걸의 관계에 대해 안 지는 얼마 안 됐다. 일전에 약 5kg이 없어졌을 때. 혹시나 하고 진걸을 다시 조사하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석주가 물고 있던 담배를 내리며 진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네가 어릴 적에 아진이를…… 많이 때렸다며?”
그 말에 진걸이 부리나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마, 많이는 아닙니다. 그냥 제 동생이 불쌍해서 오고 가며 몇 번 쥐어박은 정도지.”
석주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그가 검지로 담배 끝을 튕겨 재를 털어 냈다.
“파는 물건인데. 그렇게 쥐어패도 금 사장이 아무 말도 않던?”
“예, 뭐……. 창녀도 아니고, 몸 파는 남자 새끼 얼굴에 흠 좀 나는 게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금 사장님이 저만큼이나 진수도, 그러니까 제 동생도 아끼셔서 이해해 주셨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금 사장 그렇게 안 보이던데 정이 많은 사람이었네.”
석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진걸이 웃는 그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 눈빛에 묘한 반항기가 스며 있었다. 동생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아서 짜증이 난 건지, 금 사장을 비웃는 게 싫은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석주는 진걸이 표정을 보이는 게 신기했다. 의심을 하든, 두들겨 패든, 항상 무감하고 무표정하더니. 지금 저렇게 기분을 드러내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아진과 관련한 이야기라 그런가.
석주가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지금은 아진이를 용서한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