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석주가 이로 필터를 꽉꽉 깨물었다. 뭉그러진 필터에서 고약한 맛이 났다. 혀끝이 아릴 정도였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건.
국이나 김치에 약을 탔다라. 그럼 태회파 식구가 한 일은 아닐 것이다. 부엌에 서성거리는 조직원이 있었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분명 제 귀에 들어왔을 것이다.
석주가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식구를 의심하지 않아도 될 듯해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아직 알아야 할 게 많았다.
말을 마친 조직원이 뒤로 물러나고 또 다른 이가 바쁘게 입을 뗐다.
“언니야들도요. 제가 아까 우리 식구들 싹 돌아가면서 물어봤는데, 언니야를 부른 애가 하나도 없다는 거 아입니까. 누가 불렀으이 왔을 낀데……. 그 부른 새끼가 범인일 겁니다.”
“우리 안에 프락치가 있는 거 아입니까?”
“뭐, 꼭 우리 중에 있는 게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형님.”
그 말을 끝으로 잠깐 정적이 흘렀다. 석주가 짓무른 담배를 침대 아래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새로이 담배를 꺼내려는데. 조직원 하나가 은근히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그……놈이 국에다 약 탄 게 아닐까요?”
“그놈? 그놈이 누군데?”
“우리 식구고 종이고 다실에 있을 때 그놈이 미역국 나르는 거 제가 똑똑이 봤다 아입니까. 저 말고 다른 애들도 봤을…….”
한창 말하던 조직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석주가 험상궂은 낯으로 그를 내려다봤기 때문이다. 큰 키에 넓은 어깨, 그리고 서늘한 표정이 흡사 저승사자 같았다.
“그러니까, 누가 약을 탔다는 거냐고.”
석주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손가락에 끼어 있던 담배가 맥없이 으스러졌다. 석주의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당장이라도 조직원의 목젖을 뜯어 버릴 기세였다. 조직원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 아닙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형님. 죄송합니다.”
조직원이 고개를 한껏 고꾸라트린 채 뒤로 물러났다.
그를 응시하던 석주가 다시 의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어금니를 꾹 씹었다.
제가 제 식구를 위협한 건 처음이다. 식구에게 손찌검하고 욕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나. 말 그대로 식구니까.
석주는 제 사람에게 항상 친절했다. 헌데 오늘 이리도 신경이 곤두선 건 왜일까. 눈을 뜰지 못 뜰지 알 수 없다는 명진 때문인가.
아니, 아니었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그 작고 하얀 얼굴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도 아진이 의심받는 게 싫어서 이따위 행동을 하다니. 제가 미친 모양이다.
“이런 씨발…….”
나직이 욕설을 지껄인 석주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는데. 병실 문이 열리고 조직원 하나가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형님. 의사가 좀 보자 캅니다.”
석주가 망설임 없이 일어났다. 조직원들이 얼른 옆으로 비켜서 길을 만들었다. 석주는 흐트러진 두루마기 옷깃을 당겨 펼치며 병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조직원의 안내를 따라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최진걸은?”
석주가 앞을 응시한 채 물었다. 조직원이 얼른 대답을 올렸다.
“병원 앞에 있지 말입니다. 피 뽑아 준 사람들한테 돈 나눠 주는 거 돕고 있습니다.”
“그 새끼한테서 눈 떼지 마. 병원 못 들어오게 하고.”
“예.”
“그리고 집에 가서 총 들고 와. 권총으로. 다들 하나씩 차고 있으라고 해. 의사나 다른 환자들 눈에 안 보이게 두루마기로 가리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간 김에 종들 한 번씩 둘러보고, 창고에 있는 그 도은이라는 여자, 아직 살아 있는지 보고. 혹시 미역국 남아 있으면 진짜 약 탄 건지 아닌지 면밀히 살펴봐라.”
“예.”
조직원은 꼬박꼬박 대꾸했다. 석주가 무언갈 말할 것처럼 입을 뗐다. 그러다 별말 없이 다물었다가, 다시 뗐다. 목구멍에 턱 걸린 이름 하나가 도무지 바깥으로 나오질 않았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머뭇거리던 석주가 간신히 구역질하듯 물었다.
“또…… 아진이도 뭐 하고 있는지 보고.”
“……예.”
조직원이 고개를 까닥였다.
저 멀리 목적지가 보였다. 미리 온 조직원 하나가 진료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행여 석주에게 해를 끼칠 인물이 오가는지 감시하는 거였다. 새카만 양복을 입고 복도를 지나치는 여타 환자들이나 간호사들을 노려보는 게 좌로 보나 우로 보나 깡패였다.
석주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곁에 서 있던 조직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애들한테 괜히 병원 사람들한테 시비 걸지 말라고 당부해라. 명진이 눈뜰 때까지는 의사한테 잘해야 한다.”
조직원이 재차 고개를 주억였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형님.”
이내 석주가 문 앞에 섰다. 문 앞을 지키던 조직원이 꾸벅 인사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열린 문 사이로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보였다. 무테안경을 낀 그는 한겨울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머리칼이 하얗게 센 게 나이도 꽤 있어 보였다.
석주가 진료실 안으로 한 발을 디뎠다. 그러다 아, 소리를 내며 다시 나와 조직원을 쳐다봤다.
“꽃님이 아줌마는?”
“예?”
“우리 부엌에서 일하던 아줌마 말이야. 오늘 아침에 이 병원에서 수술 예정이었는데.”
조직원이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다 한 박자 늦게 답을 내놓았다.
“아, 그 아줌마 수술 들어갔습니다. 아직 나오진 않았고예. 나오면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명진이 이야기 밖으로 안 돌게, 아줌마 모르게 조심하고. 의사한테는 내가 직접 당부하마.”
“예, 형님.”
대화를 마친 석주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섰다. 꾸벅 허리를 숙인 조직원이 문을 닫아 주었다.
다시 밤이 지나고, 해가 떴다. 밤새 명진은 발작을 두 번이나 했다. 쇼크라는데, 이유가 한둘이 아니란다. 덕분에 명진의 몸에 붙은 흉악한 기계가 하나 더 늘었다.
“…….”
석주가 뭉툭하고 허전해진 명진의 손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피부가 아니라 차고 건조한 붕대가 만져지는 느낌이 영 마뜩잖았다. 저도 이런데 명진 본인은 어떤 기분일지 감히 가늠조차 안 됐다.
병신으로 살기 싫어서 눈을 뜨지 않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석주가 말없이 마른 입술을 달싹이는데. 병실 문이 열리고 조직원이 들어왔다. 어젯밤, 집에 가 보라 일렀던 그 조직원이었다.
“형님. 집 갔다 왔습니다.”
“그래.”
“총은 갖고 와서 애들 나눠 줬습니다. 그리고 미역국은…… 이미 설거지까지 싹 다 끝낸 상태였습니다. 먹고 남은 밥은 종들이 나눠 먹었댔고, 미역국은 그날 이후 본 적이 없답니다. 혹시 부엌에 약을 숨기 놨나 싶어가 뒤졌는데 암것도 못 찾았지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미역국은 누가 했다던?”
“여자 종들이 다 같이 했다 카던데, 뭐 이래 저래 물어보이까 그렇게 맛이 없었냐고 시무룩하게 되묻더라고예. 꽃님이 아줌마가 없어서 음식 맛이 영 못하다고 미안하다면서. 그 여자들이 약을 탄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럼 설거지는?”
“설거지는…… 아진……이가 했답니다. 근데 원래 솥은 아진이 담당이라 카더라고요.”
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쪼그려 앉아서 그 크고 무거운 걸 벅벅 닦곤 했지. 저도 몇 번이나 본 장면이었다. 어디서 듣기론 사내이면서 부엌일 하는 게 못내 자존심이 상해 힘쓰거나 거추장스러운 일은 부러 도맡아서 한댔다.
“말 나와서 보고 드리자면 아진이는…… 집에 잘 있습니다. 별다른 건 없고요, 밥도 잘 먹는 건 아니지만 뭐 세 끼마다 밥상 앞에 앉고, 잠도 제때 잔답니다.”
“어디서?”
“예?”
“어디서 자냐고.”
“그, 어, 남자 종들 묵는 방에서요.”
“……그래.”
석주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비틀어 창밖을 응시했다. 나뭇잎 하나 없이 비쩍 마른 나무가 보였다. 그 방은 추울 텐데.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근데…….”
“근데?”
“아진이가 창고 주변을 맴돈답니다.”
“창고?”
“예. 명진이 형님 찌른 그년 가두어 둔 주차장 창고 말입니다. 거기를 몇 시간씩 보고 있답니다.”
“…….”
조직원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허나 차마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석주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며칠 내내 그가 할 말을, 비난을, 의심을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어서 그랬다.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아진이 그 새끼가 범인일 겁니다.
프락치라고요.
중호파에서 숨긴 프락치가 분명합니다.
형님이랑 우리 다 속은 거라고요.
저번에 약 없어진 것도 그 새끼 짓일 겁니다.
이번 기회에 잡아다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왜 가만히 두십니까. 왜.
명진이 형님이 저렇게 누워 있는데.
그 간악한 절름발이 새끼 때문에 손가락도 없이 저렇게 누워 있는데!
뭐 그런 말이겠지. 석주가 혀로 자신의 입천장을 훑었다. 떫은맛이 났다. 잠시 고민하던 석주가 곁에 있던 다른 간이 의자를 손으로 쭉 끌고 왔다. “앉아.” 그 말에 조직원이 얼른 엉덩이를 붙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비슷한 선상에 자리했다.
석주가 그를 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예?”
“아진이 말이다.”
“…….”
조직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몇 초 전만 해도 속에 든 말을 와다다 쏟아 낼 것처럼 몸을 비틀어 놓고는 침묵을 이어 갔다. 석주가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식구들에게 못 보일 꼴을 많이 보였구나, 싶었다.
태회파는 서열과 관계없이 의견을 쉽게 주고받는 편이었다. 의견을 표출함에 있어서 윗사람의 눈치를 보는 일이 없었단 말이다. 근데 지금 이리된 건 오롯이 저 때문이었다.
제가 눈을 감고 아진을 두둔하고 있어서. 그래서.
석주가 재차 한숨을 내쉬는데. 조직원이 전장에 나온 병사처럼 굳센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간이 의자를 석주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그게…… 형님. 사실 제가, 여태 형님한테 말씀 안 드린 게 있지 말입니다.”
“뭐?”
“죄송합니다.”
조직원이 앉은 채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두루마기를 헤치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