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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69화 (69/261)

69화

저놈은 왜 또 여기…….

아진이 잠깐 멍청하게 굳어 있는 사이. 진걸이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아진이 일어나기 위해 몸을 꿈지럭거렸다. 건강한 사내였다면 튕기듯 일어나 냅다 도망쳤을 텐데.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일어나는 데에도 몸뚱이가 휘청휘청 난리였다.

진걸은 느린 걸음으로도 어렵지 않게 아진을 따라잡았다. 그는 잡기 쉬운 머리나 어깨, 팔 등을 두고 굳이 허리를 숙여 아진의 무릎을 잡아채는 수고를 했다.

간신히 일어났던 아진이 다시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딱딱한 바닥에 쾅- 찧은 이마가 지끈거렸다.

“아흐…….”

아진이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며 신음하는데. 어째 다리가 차가웠다. 사나운 한기가 종아리를 긁고 있었다. 아진이 얼른 뒤를 돌아봤다.

진걸이 아진의 헐렁한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훤히 드러난 무릎에 회칼을 가져다 댔다. 무릎뼈를 도려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란 아진이 몸을 마구 퍼덕거렸다.

“하, 하지 마! 하지 마, 개새끼야! 하지 마!”

아진이 땍땍 소리를 질렀다. 허나 진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히죽히죽 웃으며 다리에다 칼을 더욱 바짝 붙였을 뿐이다. 그런 채로 아진이 버둥거리자 잘 벼려진 칼날이 하얀 피부를 사악 갈랐다.

“힉…….”

따끔한 통각이 느껴졌다. 피부를 파고든 칼이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아진이 우뚝 굳었다. 더 움직였다간 저 칼이 다리를 댕강 잘라 갈 것 같았다.

아진이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봤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달빛에 비쳐 더욱 창백해진 살결 위로 한 가닥의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차게 식은 피부와 달리 피는 뜨거웠다.

“하지…… 마…….”

“반대쪽 다리도 병신 만들어 줄까? 평생 기어 다니면 볼만하겠다. 어?”

“하지 마……. 제발…….”

아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마른 몸이 부들부들 안쓰럽게 떨렸다. 진걸은 아진의 다리를 타고 흘러오는 그 떨림을 즐겼다.

좆같은 병신 새끼. 내 동생 죽인 병신 새끼. 악마 같은 새끼. 남자한테 몸이나 파는 창놈 새끼. 그런 말을 중얼중얼 주문처럼 읊조리면서.

진걸은 칼끝을 세워 아진의 무릎을 쿡쿡 찔렀다. 그러면서 아진의 다리 여기저기를 함부로 주무르고 만져 댔다.

칼은 아진의 다리에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구멍 같은 상처를 계속 냈다. 그래도 큰 상처는 아니었다. 굵은 가시에 찔린 정도였다.

허나 아진은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것처럼 겁을 먹었다.

“하지 말라고……. 제발. 흐으윽, 진걸이 형…….”

몸이 어찌나 떨리는지 눈앞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진걸이 얼마나 막돼먹은 놈인지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경험한 바가 있어 공포는 곱절이었다.

아진은 멀쩡한 다리 한 짝마저도 불구가 될까,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하나 남은 다리로 사는 것도 이렇게 서럽고 힘든데. 두 다리 다 잃으면 어찌 사나. 그 모진 경멸의 시선과 불편을 어찌 감내하고 사나.

아진은 당장 다리가 썰리는 고통보다 훗날의 멸시가 더 무서웠다.

그때. 엎어진 아진을 내려다보던 진걸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집 모퉁이에 서 있는 돼지를 한 번 본 그가 아진의 다리를 던지듯 놓아주었다. 아진이 얼른 다리를 접어 안았다. 손으로 무릎을 슥슥 문지르기도 했다. 손바닥에 그새 식은 피가 묻어났다.

아진이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진걸이 그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억센 손아귀에 아진의 상체가 번쩍 들렸다. 진걸이 아진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흔들었다.

“아진아.”

“흐으…….”

“아진아. 이 육시럴할 병신 새끼야.”

“아흑! 하지, 하지 마세요……. 힉, 아파요……. 죄송해요, 윽, 하지 마세요…….”

아진이 눈앞에서 출렁거리는 회칼을 흘끔거렸다. 저 칼이 어디를 어떻게 찌를지 감히 가늠조차 안 됐다. 눈알을 후벼 파려나. 입술을 잡아 째려나. 아니면 댕강 목을 쳐 버리려나.

공포에 침몰한 아진이 끅끅 호흡을 뒤트는데. 회칼이 움직였다. 아진이 질끈 눈을 감았다.

서걱.

무언가가 썰렸다.

얼굴 위로 무언가가 우수수 떨어졌다. 처음에는 피가 떨어지는 건 줄 알았다. 진걸이 제 머리 가죽을 벗겨 내는 건 줄 알았다. 제가 죽어 가는 중이라 고통도 피의 뜨거움도 느껴지지 않는 건 줄 알았다.

근데 어째 이상했다. 진걸의 손이 금세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아진이 찔끔 눈을 떴다. 끽해 봐야 몇 초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인데 눈알을 찌르는 달빛이 따갑고 시렸다. 달빛을 등진 진걸이 저를 내려다보이는 게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회칼 역시도 잘 보였다.

……너무, 잘 보였다.

망막에 엉겨 붙어 있던 습기가 사라진 듯 온 세상이 멀끔했다.

아진이 고개를 내렸다. 자신의 다리 위로 흩어진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겨울바람이 휭- 하고 불자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사르르 흩날려 사라졌다. 아진이 그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진걸이 자른 건 제 머리 가죽이 아니라, 머리카락이었다.

왜……. 왜 머리카락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아진이 눈을 끔뻑이는데. 진걸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추켜든 칼로 아진의 얼굴 위에 그림 그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다음엔 눈알을 파 줄까. 한쪽 눈 병신, 한쪽 다리 병신, 짝 맞게? 아니지, 아니지. 그러면 귀도 하나 자르고, 팔도 하나 잘라야겠네.”

“…….”

아진이 넋을 잃은 채 진걸을 쳐다봤다. 그가 제 몸 여기저기를 읊을 때마다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그렇게 다 잘리고 나면 꼼짝없이 죽겠구나. 아니, 그 꼴이면 차라리 죽어서 다행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돌연 진걸이 두 팔을 위로 쳐들며 괴상한 고함을 질렀다.

“왁!”

흐익……. 놀란 아진이 손과 엉덩이를 움직이며 뒤로 기어갔다. 그 버러지 같은 모습에 진걸이 킬킬 웃으며 느리게, 매우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마치 아진에게 도망갈 틈을 주는 것처럼.

아진은 실로 그것을 틈으로 착각했다. 힘겹게 일어난 그는 진걸을 등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절뚝절뚝 뛰는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웠지만 네발로 달리더라도 이 상황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아진은 몇 걸음 뛰기도 전에 우뚝 멈춰 서야 했다. 낫을 든 돼지가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으아…….”

주춤주춤, 쭈뼛쭈뼛, 우왕좌왕하던 아진이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빼꼼 열린 쪽문을 발견했다.

뒷집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일전에 석주와 산책을 하러 들어갔던 문. 약 만드는 공장이 있는 문.

늘 사슬이 칭칭 감겨 있고, 커다란 자물쇠가 몇 개씩 달려 있었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문이 열려 있었다. 분명 이상했지만, 아진은 그 이상함을 감지하고 판단하고 피할 이성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개구멍이든 쥐구멍이든 머리를 들이밀 공간만 있으면 냅다 파고들었을 만큼 정신이 엉망이었다.

아진이 자신에게로 점점 다가오는 진걸과 돼지를 피해 쪽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깨로 문을 쾅! 치듯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숲 냄새가 파도처럼 자욱하게 밀려들었다.

“하아……, 하아…….”

아진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숲길을 따라 달렸다.

정돈되지 않은 흙길은 불친절했다. 길고 억센 풀줄기는 절뚝이는 아진의 발목을 잡아채려 들었고, 박힌 돌멩이나 떨어진 나뭇가지는 싸구려 운동화를 신은 아진의 발가락을 노리며 이빨을 쩍쩍 벌려 댔다.

아진은 용케 넘어지지 않고 뒷집 앞마당까지 다다랐다. 넘어질 새가 없었다. 수시로 돌아본 뒤에 돼지가 낫을 든 채 성큼성큼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안심되기보다는 불안했다. 풀이 우거진 어둠 사이에서 절 지켜보고 있을 듯해서. 제가 지쳐 쓰러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 것 같아서.

아진이 뒷집을 쳐다봤다. 크고 높은 건물은 저번에 석주와 왔을 때와 달리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총을 들고 선 조직원도 보이지 않았고, 적당한 간격으로 박혀 있던 조명등도 보이질 않았다.

갈 곳이 없는데.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는데. 저 건물에라도 들어가야 하나…….

아진이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휘웅, 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귓가를 스쳤다. 낫이었다. 아진이 파드득 몸을 떨며 뒤를 돌아봤다. 돼지가 지방이 잔뜩 낀 목젖을 움직이며 끌끌 웃고 있었다.

“아진아. 그래도 오른쪽 팔은 남겨 줄 테니까 너무 겁먹지 말어. 수저질은 할 수 있을 거야. 아, 팔 하나만 있어도 밥맛은 똑같더라. 신기허지?”

“…….”

아진이 소변이라도 누는 것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다 발길 닿는 대로, 틈 보이는 대로 뛰기 시작했다. 다리를 절며 겅중겅중 뛰는 아진의 뒤로, 돼지가 상체를 좌우로 들썩이며 춤추듯 따라왔다.

“오지 마……. 오지 마, 씨발…….”

아진이 울음기 섞인 말을 읊조리며 산기슭을 헤쳤다. 뒷집이 멀어진다 싶더니 나무 뒤로 사라져 버렸다. 숲이 우거질수록 시야가 어두워졌다. 빼곡한 나무에 달빛이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아진은 세 걸음마다 휘청거려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올라왔을까. 숨이 너무 가빴다. 겨울 특유의 찬 바람에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가슴 속에서 도자기가 깨진 듯했다. 유리 파편이 가슴 가죽을 뚫고, 목구멍을 찢으며 역류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실로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하아……, 하아…….”

또 발을 헛디딘 아진이 몸을 퍼덕거리다 손 닿는 나무 하나를 쥐었다. 거친 나무가 손바닥을 북북 긁었다. 따끔거리다 못해 뜨끈거리는 통각이었으나 아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포 앞에서 그런 통각 따위 하찮을 뿐이었다.

아진이 압정처럼 따가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뒤를 돌아봤다. 가파른 산길 아래로 돼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겨울바람에 사부작사부작 흔들리는 나뭇가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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