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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68화 (68/261)
  • 68화

    가장 먼저 주스 병에 담아 온 물이 나왔다. 아진이 그것의 뚜껑을 까 도은의 곁에 슬쩍 밀어 넣었다.

    “누나. 음……. 물…… 마실래?”

    “……아니. 괜찮아.”

    “어……. 그럼 초콜릿은? 이거 되게 맛있어. 이거라도 먹어.”

    다음으로는 초콜릿을 내밀었다. 언젠가 석주가 준 거였다. 다섯 개나 받았는데, 개중 부서지지도, 녹지도 않은 멀쩡한 것을 골라 가져왔다. 그것을 본 도은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허나 먹겠다 말겠다의 답은 내놓지 않았다.

    또 정적이 흘렀다. 아진이 자신의 목을 긁었다. 그러다 도은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이제 도은이 무섭지 않았다.

    “누나, 어깨 좀 봐.”

    아진이 조심히 도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도은은 거부도, 동조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었다. 움직일 힘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아진은 피로 버석해진 도은의 원피스를 슬쩍 내렸다. 상처와 모직이 뒤엉켜 보기만 해도 인상이 구겨지는데 정작 도은은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았다.

    상처를 보며 방도를 고민하던 아진이 비닐 속에서 붕대를 찾아냈다. 그는 도은의 원피스를 조금 더 내려 상처 위로 물을 쏟아부었다. 종 방에서 굴러다니던 말라비틀어진 연고도 힘껏 짜 바르고 붕대도 둘둘 감아 주었다.

    “안 해도 돼.”

    도은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아진은 고집스레 하찮은 치료를 이어 갔다. 그리고 붕대를 꽁꽁 힘주어 묶었다. 아진이 도은의 피가 묻은 손등으로 자신의 코를 문댔다. 이게 뭐라고 숨이 가쁜지 모르겠다.

    아진은 비닐에서 또 무언갈 꺼냈다. 두툼한 솜 저고리였다. 그 역시 석주가 사 준 것인데, 저는 잠바가 있으니 하나 정도는 도은에게 줘도 괜찮았다. 아진은 저고리를 길게 펼쳐 훤히 드러난 도은의 맨다리에 덮어 주었다.

    그렇게 가지고 온 것을 모두 꺼낸 후에야 도은을 마주 보고 앉았다. 아진은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다 한참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조심히 입 밖으로 냈다.

    “누나.”

    “응.”

    “나……한테 왜 그랬어?”

    “…….”

    “왜, 왜 내가 시킨 것처럼 말한 거야? 나는…… 도박장 이후로 누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 말에 도은의 호흡이 뚝 끊겼다. 아진이 슬쩍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살 하나 없이 뼈 위로 살가죽만 있는 도은의 손은 매우 차가웠다. 저보다 체온이 낮은 사람은 몇 없는데.

    아진이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슥슥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누나. 나는 여기가 좋아. 사장님도 좋고, 꽃님이 아줌마도 있고, 방바닥도 따뜻하고…… 다 좋아. 근데 어, 누나가 한 말 때문에 내가 되게 나쁜 사람이 됐거든? 그러니까, 응, 나중에 사장님이 오시면 사실대로 말해 주면 안 될까?”

    조곤조곤 이어진 아진의 말에 도은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아진이 춥냐고 물어보려는데, 돌연 도은의 고개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러더니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해……. 미안해, 아진아…….”

    “누나…….”

    “어흐윽, 미안해……. 나도, 흐윽, 그러고 싶지 않았어…….”

    도은의 눈에서 굵직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진이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도박장에 있을 때, 온갖 험한 일이 있어도 울지 않던 그녀인데. 그런 그녀가 대체 왜 이리 울고 있나. 알 수가 없었다.

    아진이 도은의 손등을 도닥이며 그녀를 달랬다.

    “왜. 무슨 일인데. 말해 봐. 나는 도움이 안 되겠지만 우리 사장님은 누나를 도와줄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도은이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더니 괴이하리만큼 빠르고 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뺨을 듬뿍 적셨던 눈물이 사방으로 나부꼈다.

    “아니, 안 돼.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도울 수 있어. 사장님은 돈도 많고, 힘도 세거든.”

    아진이 다정한 음성으로 그녀를 추슬렀다. 석주에 대해 이야기하며 살짝 입꼬리를 올리기도 했다.

    “…….”

    도은이 그런 아진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녀의 희번들한 눈동자가 어둑한 손전등 빛을 머금어 반질거렸다.

    아진이 그 눈을 보며 다시금 입을 뗐다. 명진이 크게 다치긴 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사정이 있었던 걸 밝히면, 혹 누군가가 그런 못된 짓을 누나에게 강요했다면, 석주는 분명 이해해 줄 거라고, 더 이상의 해코지는 없을 거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근데 그 순간.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고 문이 열렸다. 끼이이-하고 문이 벌어지며 유달리 환한 겨울 달빛이 창고 안을 급습했다. 놀란 아진이 헛숨을 들이마시며 도은을 등으로 가렸다. 도은은 눈을 홉뜬 채 창고 문을 응시했다.

    검은 그림자가 달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아진은 그림자를 확인하자마자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자가 작은 게 석주도, 조직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곧 작은 그림자가 타박타박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바람에 밀린 문이 닫히고, 달빛이 사라졌을 때. 그림자 주인의 얼굴이 손전등 빛에 떠올랐다.

    “어…….”

    아는 얼굴에 아진이 눈썹을 올렸다.

    “아진이?”

    방문객 역시 아진에게 알은체를 해 왔다. 큼지막한 무언가를 껴안은 그가 아진과 도은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진아. 너 여기서 뭐 해?”

    “아, 어, 나…… 도은 누나가 거, 걱정이 돼서…….”

    “그랬어?”

    “근데 왜…….”

    “나도. 겨울이라 춥잖아. 이불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방문객이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두툼한 솜이불이었다. 천이 거칠고 낡긴 했으나 추위를 피하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아진이 가져온 저고리와 비할 바가 안 됐다.

    어쩐지 진 기분에 아진이 슬쩍 목을 움츠렸다. 저도 이불을 가져왔어야 했나……. 볼 안쪽 살을 꾹 깨물었다가 놓는데. 방문객이 아진의 어깨를 툭툭 뒤로 밀었다.

    “도은이는 내가 볼 테니까 넌 이제 나가 봐.”

    “어? 아냐. 나도 있을래.”

    “옷 갈아입힐 거야. 원피스는 춥잖아.”

    방문객이 이불 사이에서 천 뭉치를 꺼내 보였다. 아진아 아……, 하고 작게 탄식했다.

    “넌 가서 설거지나 해. 네 몫만 남았어.”

    “……응.”

    “얼른, 이놈아.”

    방문객의 재촉에 아진이 마지 못해 몸을 일으켰다. 헌데 어째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직 도은에게 답을 듣지 못해서였다. 아직 궁금한 게 많은데. 쭈뼛거리던 아진이 한숨과 함께 뒤를 돌았다. 그리고 문을 밀며, 도은을 뒤돌아봤다.

    도은은 멀거니 아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지 말라는 말도, 잘 가라는 말도 없었다. 아진이 가든 말든 상관없는 사람 같기도 하고, 모든 걸 포기한 사람 같기도 했다.

    입을 우물거리던 아진이 짧은 작별을 고했다.

    “도은 누나. 내가 내일 아침에 다시, 다시 올게.”

    “…….”

    도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진이 삐거덕거리는 문을 열고 나갔다. 새파란 달빛이 도은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가, 이내 검게 죽었다.

    아진이 대야를 가득 채운 설거지 더미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새 살얼음이 낀 그릇을 들었다 놓으며 대충 크기별로 분류했다. 요즘 조직원들이 집에서 밥을 먹지 않으니 설거짓거리가 몇 없었다. 그래도 솥 같은 건 매번 쓰는 거라 매일 씻어야 했다.

    아진은 수세미에 세제를 잔뜩 짰다. 그것으로 벅벅 그릇을 문지르는데 손끝이 아렸다. 봄, 여름, 가을 어느 때나 설거지는 손이 시리지만, 겨울은 확연히 다르다. 손톱이 빠질 것 같고, 손가락이 뻐득뻐득 둔하게 움직였다.

    평소라면 수시로 무릎 뒤에 손을 넣어 데웠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운도 없었다.

    사실 어제부터 이랬다. 추우면 추운 대로, 잠을 설치면 설치는 대로, 밥을 못 먹으면 못 먹는 대로 대충 살고 있는 중이었다. 꽃님과 명진의 안위를, 또 석주의 심정을 전혀 모르겠으니 뭐 하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휴…….”

    아진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솥을 헹궜다. 그리고 솥을 벽에 기대 세워 두었다. 솥 안에 고인 물도 손바닥으로 훔쳐 쓸어내렸다. 그 후 뻐근한 허리를 펴는데. 자박,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진은 별생각 없이 발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깐, 호흡을 멈춰야 했다.

    “…….”

    돼지였다. 돼지가 서 있었다.

    꿀꿀거리는 동물 돼지말고. 언젠가 석주의 집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이유로 팔이 잘려 쫓겨났던 그 돼지 말이다. 그가 부엌과 바깥 아궁이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왼쪽 팔뚝 아래로 팔이 없어 빈 소매가 펄럭거렸는데, 그게 매우 을씨년스러웠다. 돼지는 여전히 살집이 많았고, 인상은 더욱 험상궂어졌다. 밭은 숨을 씩씩거리며 서 있는데,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 숨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

    돼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진만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다만, 오른손에 들고 있는 낫을 앞뒤로 흔들어 댔다. 서슬 퍼렇게 날이 선 낫은 길고 컸다. 달빛이 비칠 때마다 번쩍번쩍하는 게 목에 가져만 대도 머리가 댕강- 잘릴 것 같았다.

    아진은 본능적으로 저 낫이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깨달았다.

    저치가 어떻게 여기. 어째서 여기. 왜 이 시간에. 갖가지 의문이 산발적으로 떠올랐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돼지가 빠른 걸음으로 아진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힉…….”

    기겁한 아진이 냅다 반대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절뚝이는 다리로 열심히 달렸다. 너무 무서우니 목구멍이 꽉 막혀 비명도 나오질 않았다.

    겨울 한기에 꽁꽁 언 바닥이 발바닥을 들쑤셨다. 아진은 그 위를 열심히 달렸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냥 당장에 돼지를 피하고 보자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마당을 쭉 달린 그가 막 모퉁이를 도는데. 또 다른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아진이 자신의 몸을 제어하지 못하고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맨바닥에 찧은 엉덩뼈와 척추가 알싸했는데 아프지도 않았다.

    “안녕, 병신?”

    그림자의 주인이 이죽거렸다. 아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회칼이 보이고, 조금 더 시선을 올리자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진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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