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66화 (66/261)

66화

“명진아!”

석주가 빠르게 명진을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다섯 걸음이 채 남지 않았을 때. 방에서 체구가 작은 그림자가 던져지듯 날아왔다.

머리가 길고 마른 여자였다. 얼굴보다 쭉 뻗은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손톱은 뭉툭하나 손가락이 억센 나뭇가지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그녀는 괴이한 비명을 내지르며 명진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러더니 그의 가슴에 꽂힌 회칼을 꾸우욱 내리눌렀다. 주위에 누가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명진을 죽이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 같았다.

“크허억…….”

명진이 둔탁한 신음을 흘렸다. 벌어진 그의 잇새로 피가 울컥 튀어올랐다. 그에 여자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마른 손등 위로 힘줄이 도드라졌다. 칼을 더욱 깊이 쑤시려는 모양이었다.

그때.

탕!

쩌렁쩌렁한 총소리가 기와집을 뒤흔들었다.

“억…….”

여자는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뒤로 나동그라졌다. 곱게 차려입은 원피스 치마가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흩날렸다.

석주가 쏜 총알은 여자의 어깨와 가슴 사이에 박혔다. 엄청난 고통일 텐데 여자는 몸을 좌우로 흔들며 킬킬 웃을 뿐,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았다. 마루에 흩뿌려진 긴 머리칼 너머로 피가 고요히 번져 갔다.

석주가 명진의 앞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명진을 추슬러 자신의 다리 위에 눕혀 놓았다. 그가 명진의 뺨을 쓰다듬었다.

“명진아. 명진아.”

“큭……. 형, 형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왜 이래. 어?”

“저, 저 약쟁이 년이 갑자기, 쿨럭…….”

명진이 말하다 말고 기침했다. 작은 수류탄처럼 왈칵 터져 나온 피가 석주의 안면을 흠뻑 적셨다. 석주의 눈동자가 거칠게 경련했다. 그가 꿰뚫린 명진의 가슴을 꾹 내리눌렀다.

“됐다. 말하지 마라. 병원부터 가자. 병원부터…….”

명진을 고쳐 안은 석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복도 끝에 멀거니 선 아진을 빼면 집이 고요했다. 꼭 아무도 없는 것처럼. 석주의 이마 위로 불룩 분노한 핏줄이 솟아났다.

“누구 없냐! 다들 어디서 뭐 하는 거야!”

석주의 날 서린 고함에 그제야 집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근데 그마저도 어쩐지 이질적이고, 괴상했다. 제각각 방에서 문을 열고 나온 조직원들은 반 나신에, 옆구리에다 창녀를 낀 이도 있었고, 얼굴이 팅팅 부어서 자다 일어난 듯한 이도 있었고, 소피를 보다 뛰쳐나왔는지 바지 앞섶을 훤히 펼친 이도 있었다.

석주는 물론 아진까지 인상을 찌푸렸다. 항상 정갈한 몸을 유지하던 태회파의 조직원들 같지 않았다. 그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웅얼거렸다.

“형님! 형님! 총소리가 들렸-슴니다! 언 넘이 이 늦은 시간에 총 연습이고! 뒤질래!”

“씨팔, 이게 뭐고. 지금 몇 시고? 꿈이가?”

“아흐으……. 대가리 깨질 것 같네.”

“누가, 누가 날 불렀냐! 귀신이냐!”

“시끄러, 새끼야!”

저들끼리 다투던 조직원들은 달려오다 말고 기우뚱-거리더니 옆으로 쓰러지고, 앞사람과 엉켜 넘어지고, 발을 헛디뎌 중정으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그 꼴에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다들 약이라도 빤 것처럼 왜-…….

약?

석주의 낯에서 표정이 씻겨 나갈 무렵이었다. 명진이 툭, 툭, 매가리 없는 손길로 석주의 팔뚝을 두드렸다. 석주가 얼른 시선을 내렸다. 명진이 피에 전 입술을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근데 형님……. 칼 맞았는데도 어째 별로 안 아픕니다. 저도 철이 든 모양이지예…….”

“…….”

석주가 그런 명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대답해 주고 싶은데, 속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치받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섣불리 입을 열었다간 나약한 애원이, 이를테면 죽지 말라는, 날 혼자 두고 떠나지 말라는 가녀린 말 따위가 나올 것 같아서.

그때, 검은 두루마기가 명진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석주가 두루마기를 쥔 하얗고 작은 손을 매섭게 쳐 냈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두루마기를 가져온 사람을 확인했다.

아진이었다. 아진이 괜찮다는 듯, 석주의 팔뚝을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두루마기를 돌돌 말아 명진의 가슴께를 싸매기 시작했다. 칼을 뺐다간 야단이 날 듯해 뽑지 않고 그 주위를 둘러 가며 동여맸다.

“지혈. 지혈해야 해요, 사장님.”

“……어?”

“그리고 병원 가요. 지금 당장.”

“아, 그래……. 그래, 병원 가야지.”

석주가 아진을 도와 두루마기를 싸맸다. 명진은 몸을 움직거릴 때마다 입술 사이로 피를 찔끔찔끔 쏟아 냈다. 폐에 큰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석주가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아진은 손수건에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명진의 손가락을 쌌다. 불규칙적으로 구역질이 올라왔으나 여기서 토를 할 순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손가락 두 개를 수거한 아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머지 하나를 찾았다. 그러다 쓰러진 여자의 무릎 언저리에 굴러가 있는 걸 발견했다.

꼴깍 마른침을 삼킨 아진이 조심히 손가락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손가락을 집는데.

“아진이?”

쉬었는데도 고운 목소리가 아진을 불렀다. 아진이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산발을 한 여자가 아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진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미역처럼 길게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도은…… 누나?”

귀신이라도 본 듯, 넋을 잃은 아진이 중얼거렸다.

도은이었다. 도박장에서 일하던 도은. 항상 다정하고 친절하던 도은. 못난 사내인 저를 숨겨 주고 보듬어 주던 도은. 똑똑하고 눈치 빠르던 도은.

그런 그녀가 어떻게 여기에, 왜 여기에, 어쩌다 여기에…….

“아진아!”

도은이 튕기듯 일어나며 아진의 이름을 외쳤다.

“누나가 왜…… 여기…….”

결혼한댔잖아. 멋지고 돈 많은 염색 공장 사장이랑 결혼한댔는데……. 혼란을 흠뻑 뒤집어쓴 아진이 명진의 손가락을 든 채 굳어 있는데. 도은이 난데없이 아진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뒤틀린 무릎 탓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유달리 마른 발목이었다.

아진이 흠칫 몸을 떨었다. 도은의 손이 마치 시체의 것처럼 차가웠다. 발목을 타고 올라온 한기에 머리칼이 쭈뼛 서는 듯했다.

“아진아, 오늘이라며.”

도은이 핏줄이 거미줄처럼 올라온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어?”

“오늘이라며! 오늘이면 다 죽일 수 있다며!”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진이 말을 더듬었다. 뒤통수로 석주의 시선이 박히는 게 느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조직원 몇몇이 수군거리는 목소리도 들렸다.

그때. 도은이 머리와 마른 몸을 마구 흔들며 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 새끼야! 네가 오늘이라며! 야 이 개새끼야! 네가 오늘이라며!”

아진이 힉, 하고 겁을 들이마셨다.

“누나. 누나 왜 이래. 무슨 말이야, 그게…….”

도은이 이상하다. 도은이 아닌 것 같았다. 말갛던 뺨은 움푹 꺼져 있고, 화장을 했음에도 눈 밑은 새카맸으며, 번진 립스틱 자국 너머로 보이는 입술은 어디서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한 건지 죄 터져 있었다.

“개새끼야! 네가 오늘이면 다 죽일 수 있댔잖아! 오늘이랬잖아! 다 도륙 낼 수 있다고, 분명 그랬잖아!”

도은이 씩씩거리며 분노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이상했지만, 원체 제정신 같지 않아서 그게 이상하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기겁한 아진이 발을 빼내려 했다. 허나 도은의 아귀힘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그러잖아도 하얀 아진의 발이 창백하게 질렸다. 발목이 뚝, 하고 끊길 것만 같았다.

끝내는 아진이 풀썩 마루에 주저앉았다. 기껏 주운 명진의 손가락이 데구루루 굴러갔다. 도은이 옳다구나 하며 아진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아진은 그 와중에도 명진의 손가락을 다시 주워 손수건에 꼭 싸맸다.

아진은 도은의 억척스러운 힘에 속절없이 그녀의 앞까지 끌려갔다.

도은이 아진의 위로 얼굴을 드리웠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아진의 뺨을 가시처럼 할퀴었다. 그녀가 쉭쉭 내쉬는 차가운 숨결은 눈꺼풀을 얼렸고, 독한 향수를 죄 뒤집어썼으나 가려지지 않는 퀴퀴한 냄새에 코끝이 딱딱해졌다.

“네가…… 아진이 네가…….”

도은이 부르튼 입술로 아진을 불렀다. 그러다 돌연 히이이, 하며 옆으로 넘어갔다. 비쩍 마른 몸이 파드득파드득 경련했다. 뼈마디가 뒤틀리고, 눈동자가 눈꺼풀 너머로 뒤집혔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렇게 뭍에 올라온 잉어처럼 퍼덕이던 도은은 돌연 꺽, 하더니 그대로 까무러쳐 버렸다. 작은 머리통이 그대로 쾅! 바닥을 내리찍었다.

아진이 가쁜 숨을 내쉬며 도은을 쳐다봤다. 그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명진을 품에 안은 석주가 저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전에 없이 무미건조하고 차가웠다. 가장 처음, 도박장에서 마주했을 때도 무심하긴 했으나 차갑진 않았는데. 까만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아진은 그 눈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 분노가 저를 향해 있는지, 도은을 향해 있는지 판가름하려고.

하지만 알 수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직원들이 석주와 명진의 앞으로 우르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검은 그림자가 석주의 얼굴 위로 겹쳐지고 또 겹쳐졌다.

조직원들은 번잡하게 웅성거리더니 명진을 둘러업고 바쁘게 집을 나섰다. 개중 한 명은 아진에게 다가와 그의 손에 들린 손가락을 낚아채 달려 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석주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명진의 피로 범벅된 자신의 손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다시 아진을 바라봤다.

돌아온 시선은 전보다 더 차가웠다. 아진은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뒤틀렸음을 감지했다.

이건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사, 사장님.”

아진이 혼잣말처럼 석주를 불렀다.

“…….”

그러나 석주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피가 뭉친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돌아 사라졌다.

“사장님…….”

아진이 다시 그를 불렀다. 허나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소리 없이 뱉은 석주의 이름이 서늘한 허공 사이로 흩어졌다.

홀로 남은 아진이 석주가 사라진 복도를 멍하니 응시했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복도가 삐거덕거리며 기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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