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애들인가 보지.”
“아닌데……. 그림자가 되게 여자 같았는데…….”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여자 종인가 보지.”
석주가 무심히 대꾸했다. 아진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누나들은 몸에 붙는 옷 안 입어요. 일할 때 불편하다고.”
“그럼 뭐 귀신이기라도 할까 봐.”
석주가 아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려 했다. 바깥을 나도는 게 종인지 귀신인지 하등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아진과 제 사이를 방해하지만 않으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진은 그림자의 주인이 매우 궁금한 듯했다. 기어코 석주를 밀어 내며 소파에서 내려가더니 엉금엉금 기어 창호지 문을 탕, 밀어 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바깥의 소음이 산사태처럼 와르르 쏟아졌다.
근데 소음이 전과 달랐다. 이전엔 걸쭉한 남자들의 목소리뿐이었는데, 지금은 드문드문 꾀꼬리 같은 여자의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진이 마루로 두 팔을 짚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다실과 석주의 방은 직선으로 정렬되어 있다. 중간에 간이 화장실과 명진의 방이 있긴 하지만 그 역시 직선상에 있어 다실까지 훤히 내다보였다.
역시나. 원피스나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하이힐을 벗으며 다실로 올라가고 있었다. 하나같이 화장이 진하고 입술이 빨간 게 창녀들이었다.
조직원들이 반가움의 소리를 질렀다. 몇몇 조직원들은 양말 바람으로 마당에 내려와 에스코트하며 같잖은 끼를 부리기도 했다.
“풍속점 누나들이 왔어요. 사장님이 부르신 거예요?”
아진이 방 안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니. 덕재가 불렀나…….”
석주가 담배를 꺼내 물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아진이 다시 다실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창호지 문에 스쳤던 그림자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긴 생머리 여자가 마지막으로 다실로 들어갔다. 아진은 그것을 빤히 보고 있었다.
“왜? 아는 사람이야?”
석주가 담뱃불을 붙이며 물었다.
“아뇨.”
아진이 부정하며 문을 닫았다. 제가 아는 창녀라곤 도박장에 있던 열댓이 다다. 그들이 이 집으로 차출되어 올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설사 그렇다 한들, 날이 어두운 데다가 거리도 멀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아진이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잠깐 사이에 목덜미를 파고든 겨울바람이 차가워 목을 움츠리자, 석주가 뜨끈한 손바닥으로 그의 볼과 목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아진이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석주가 잇새로 담배 연기를 흘리며 아진을 내려다봤다. 뜨끈한 아랫목에서 뒹구는 고양이 같은 그가 귀여웠다.
“아는 사람도 아니라면서 왜 누나라고 불러?”
“어……. 그냥 버릇돼서요.”
“버릇?”
석주가 이상하다는 듯 턱을 뒤틀었다. 창녀를 누나로 부르는 게 버릇이 됐다니. 그다지 흔한 버릇은 아니었다. 의아함 가득한 석주의 낯에 아진이 작게 웃으며 그의 손바닥에 뺨을 묻었다.
“제가 있던 도박장에도 몸 파는 누나들이 있던 거 아시죠.”
“응.”
“그 누나들이랑 친했어요. 근데 매번 부를 때마다 창녀라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
“사실 본인 의지로 몸 파는 누나는 한 명도 없거든요. 다 남동생 대학 보내려고, 집안 등쌀에 휘말려서, 아버지가 도박 빚 대신 팔아넘겨서, 뭐 그렇게 억울하게 온 누나들이라서…… 좀…… 짠했어요.”
“…….”
“물론 제가 누구를 불쌍히 여기고 그럴 깜냥은 안 되지만, 다 사연 있는 사람들인데 우리끼리는 잘해 주고 조심하고 그럼 좋잖아요.”
아진이 건조한 미소를 띠었다. 석주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세상 불행을 다 짊어지고 살아온 주제에 남을 측은히 여기는 아진이 답답했다. 동시에 사랑스럽기도 했다.
석주가 엄지로 그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는데, 아진이 목소리를 바꾸며 말을 돌렸다.
“근데 누나들이 집에 오는 건 오랜만이네요.”
“그렇지. 그간은 올 필요가 없었으니까.”
“필요가 없어요?”
“응. 네가 있잖아.”
석주가 후우, 하고 연기를 내뿜으며 웃었다.
“…….”
아진이 그 웃음을 멍하니 바라봤다. 쌉싸름한 연기 사이로 은근히 보이는 미소가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가끔 석주의 잘생김을 새삼 인지할 때가 있는데, 그 순간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기분 좋은 철렁임이었다.
석주가 담배를 고쳐 물며 말을 덧붙였다.
“이전에는 잠 병신인 나 때문에 겸사겸사 부르던 거라서. 오늘은 명진이 생일이라 특별히 부른 모양이다.”
“그런가 봐요…….”
아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와중에도 석주에게서 도통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석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넘기며 눈썹을 들썩였다.
“왜 그렇게 귀엽게 쳐다봐. 뽀뽀하고 싶게.”
그 말에 아진이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석주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석주가 아직 한참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꾹꾹 비벼 껐다. 그러고는 아진의 허리를 감싸 자신 쪽으로 바짝 당겼다.
“왜 싫다고 안 해? 사장님 미쳤어요? 사장님 개새끼야! 사장님 작작 좀 해요! 그렇게 말해야지.”
석주가 아진의 작고 뾰족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아진이 한쪽 어깨를 위로 올려 자신의 귀를 긁었다. 석주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모양이었다. 코끝을 한 번 찡그렸다가 푼 그가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아니, 뭐…… 뽀뽀가…… 어려운 것도 아니고…….”
“…….”
석주가 잠깐 숨을 멈췄다. 그러다 허허, 하고 건조하게 웃었다.
또 겁도 없이 여우처럼 굴지. 몇 시간 전에 대차게 빨려 퉁퉁 부은 입술이 따갑지도 않은가 보다. 아예 몸뚱이 전체를 한입에 죄 욱여넣고 뼈만 남을 때까지 쪽쪽 빨아 먹고 싶은 제 마음을 알기는 하는 건지.
“어렵지 않으면 또 하자.”
석주가 아진의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아진은 기특하게도 눈을 감으며 고개를 슬쩍 내려왔다. 석주가 옅게 웃으며 그의 입술을 물었다.
두 사람은 느긋하게 입맞춤을 나누었다. 방해하는 이도 없고, 급한 일도 없는, 평화로운 상황에서 나누는 입맞춤은 감미로웠다. 아진은 이렇게 석주와 단둘이서 보내는 밤이 몹시 좋았다.
한참 입을 맞추던 아진이 숨을 헐떡이며 머리를 뒤로 물렸다. 그럼 석주는 잠시 입술을 떼고 기다려 주었다. 대신 붉어진 뺨이나 가느다란 목덜미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러다 아진의 숨결이 잔잔해지면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수십 번을 반복하니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졌다. 소란스럽던 바깥 소음도 누그러들었다. 조직원들이 각자 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우리도 이만 잘까?”
석주가 아진의 턱 끝을 촙 빨았다가 놓으며 물었다. 눈꺼풀이 몽롱하게 풀린 아진이 고개를 주억였다.
전등 하나만 남겨 두고 방 안의 모든 불을 끈 두 사람은 이불로 자리를 옮겼다. 석주가 팔을 벌리고 눕자, 아진이 그의 옆구리로 쏙 들어갔다. 그럼 석주가 매우 능청맞게, 당연하다는 듯 아진의 말랑한 가랑이 사이에 좆을 끼웠다. 아진은 그러든 말든 석주의 어깨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해?”
석주가 아진의 코끝을 톡톡 두드렸다. 아진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뗐다.
“내일 꽃님이 아줌마 몇 시에 보러 갈 거예요?”
“음……. 수술 전에 보는 게 낫겠지?”
“네.”
“수술이 열 시랬으니까 아침 먹고 바로 가자.”
“네.”
“그리고 수술 끝날 때까지 있다가, 꽃님이 아줌마가 눈뜨면 바로 집에 오는 거야. 알았지?”
“네.”
아진은 꼬박꼬박 긍정을 내놓았다. 석주가 피식 웃었다. 아진의 머릿속이 빤히 보여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진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나간 김에 종로 시내도 구경할까?”
“음…….”
아진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집에 올래요.”
그 말에 석주는 치솟는 입꼬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아진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제 자동차 같은 건 안 무섭다더니. 여전히 무서운가 보다. 석주에겐 희소식이었다.
석주가 아진을 꽉 껴안았다. 우악스러운 힘에 아진의 어깨가 안으로 말렸다.
“으악……. 사장님 숨 막혀요…….”
“참아.”
석주가 아진의 목덜미에 쪽쪽쪽 잔 입맞춤을 퍼부었다. 이잉……. 간지러우면서도 괴로운 느낌에 아진이 괴상한 신음을 흘릴 때였다.
크아아악……!
두꺼운 벽 너머, 저 멀리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작고 탁하긴 하나 분명 누군가의 비명이었다.
“…….”
“…….”
석주와 아진이 동시에 우뚝 굳었다. 먼저 움직인 건 석주였다. 아진을 놓아준 그가 항상 머리맡에 두는 총을 챙기며 벌떡 일어났다. 아진이 그를 따라 상체를 일으키는데.
“나오지 마라.”
석주가 그를 만류했다. 아진이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석주는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문을 한 뼘쯤 열어 둔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음의 시발지를 찾는 거였다. 살상 대상을 탐색하는 총구가 시리게 번뜩였다.
아진이 이불을 꾹 움켜쥐었다. 그냥 술 취한 조직원 하나가 발을 헛디뎌 넘어진 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우지끈, 쿠당탕!
무언가가 부서지고, 또 무언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전보다 훨씬 큰 소리였다.
석주의 고개가 팩 한쪽으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눈이 커지고, 입이 뻐끔 벌어졌다. 아진은 먼 거리에서도 그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석주의 만면에 새까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절망이었다.
심상치 않은 상황을 인지한 아진이 튕기듯 일어났다. 그리고 절뚝이는 다리를 재촉하며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아진은 방을 나오자마자, 고개를 돌리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석주와 똑같은 표정을 지어야 했다.
복도에 피가 낭자했다. 피의 주인은 복도 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져 있었다.
명진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문을 부수고 나온 것인지 찢기다시피 한 나무 조각들과 뒤엉켜 있었다. 근육질의 나신을 죄 드러낸 그의 가슴에는 투박하나 서슬 퍼런 회칼이 꽂혀 있었다. 피를 막기 위함인지, 상처 주위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손가락이…… 세 개가 없었다. 칼을 막으려다 손가락이 잘린 듯했다. 실로 썰린 손가락 몇 개가 차가운 마루 위를 구르고 있었다.
몸싸움이 있던 걸 알려 주듯 옆구리와 팔뚝은 깊이 베여 피가 흐르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공격이 아직도 당황스러운 듯 눈을 부릅뜬 채 방 안의 적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