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63화 (63/261)
  • 63

    뒤늦게 식사가 시작됐다. 석주는 좋은 날이니만큼 종들도 일하지 말고 함께 밥을 먹자 일렀다. 눈치를 보던 종들은 알아서 구석에 상도 펼치고, 반찬과 고기도 갖다 먹었다. 아진도 그들 틈에 끼어 자리를 잡았다.

    숯불에 구운 고기는 맛이 좋았다. 소고기는 소고기대로, 돼지고기는 돼지고기대로 맛났다. 된장찌개도 꽃님이 한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칼칼한 게 밥과 함께하기 딱이었다.

    그런데도 아진의 수저는 느릿하게 움직였다. 다른 종들은 고기가 들어오자마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는데, 아진은 하나를 잡고 질겅질겅 고무처럼 씹어 댔다.

    “어디 아프냐?”

    “밥 그렇게 깨작깨작 먹으면 복 나가, 이놈아.”

    같은 상에 앉아 있던 종들이 걱정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을 했다. 아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기를 꿀떡 삼켰다. 꽃님의 걱정 때문에 목구멍이 까끌했다. 뭘 제대로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울렁거리고 메슥거렸다.

    수술은 잘 하려나. 아프진 않으려나. 무섭겠지. 오늘 잘 자야 할 텐데. 등등의 걱정으로 숨이 턱 막혀 왔다.

    아진이 윤기가 잘잘 흐르는 쌀밥을 쿡쿡 찌르며 한숨을 내쉬는데. 부엌 쪽문이 열리더니 이순의 얼굴이 빼꼼 나왔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아진을 불렀다.

    “아진아.”

    “……응?”

    “와서 미역국 나르는 것 좀 도와.”

    “응.”

    아진은 미련 없이 수저를 놓았다. 그리고 절뚝절뚝 부엌으로 내려갔다. 꽃님은 아파서 누워 있는데 혼자 맛있는 밥을 먹을 바에는 일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

    부엌에는 미역국 냄새가 진동했다. 큼지막한 솥에 바글바글 끓고 있었는데, 미역은 물론 소고기와 새알이 듬뿍 들어가 있는 게 제법 맛있어 보였다. 저 뜨끈한 국물과 소주 한 잔이면 모든 걱정이 사라질 것 같았다.

    이순이 대접 같은 국그릇에다 국을 철퍽철퍽 펐다. 국그릇이 쟁반을 가득 채우면 아진이 그것을 밖으로 날랐다. 무게가 제법 묵직했으나 한두 번도 아니고, 불편한 다리로도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아진은 가장 먼저 석주의 앞에 국을 내려놓았다. 다음으로는 명진의 앞에 놓았다.

    “고맙다, 아진아.”

    명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진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다른 조직원들에게도 미역국을 배분하려는데. 석주가 부드럽게 손목을 쥐어 왔다.

    아진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석주가 손을 미끄러트려 아진의 손을 잡았다.

    “왜 밥 안 먹어.”

    “아, 이것만 하고 먹을 거예요.”

    “아까 앉아 있을 때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잖아. 어디 아파? 추워서 그래?”

    그 말에 아진의 속눈썹이 출렁거렸다. 구석에 뒤돌아 앉아 있었는데. 용케 깨작거리는 걸 본 모양이다. 아진이 마지못해 입술을 달싹였다.

    “아뇨, 입맛이 없어서…….”

    “입맛이 없어? 왜?”

    “그냥…….”

    “그냥?”

    “……국 식어요. 얼른 드세요.”

    아진이 석주의 국그릇을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석주가 설핏 미간을 구겼다. 아진은 그 얼굴을 못 본 체하며 몸을 일으켰다. 석주의 손이 맥없이 흘러내렸다.

    아진이 조직원들의 앞에 국을 하나씩 내려놓는 내내 석주는 그를 응시했다. 떠들썩하게 술잔을 부딪치는 조직원들의 소음 사이로도 그 시선은 지나치게 선연히 느껴졌다. 아진은 국을 모두 내려놓자마자 부엌으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근데 쟁반을 내려놓기도 전에 부엌 쪽문이 다시 열렸다. 석주가 큰 덩치를 접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아진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부엌에 상을 펼쳐 놓고 밥을 먹던 여자 종들이 얼른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사장님, 안녕하세요.”

    아진이 달리듯 석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눈을 부라리며 그를 꾸짖듯 물었다.

    “사장님이 여길 왜 들어와요!”

    “네가 여기로 들어왔으니까.”

    “대장부는 이런 데 들어오는 거 아니에요! 고추 떨어진다고요!”

    상스러운 아진의 말에 여자 종들이 어머,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난데없이 성희롱을 당한 석주가 한쪽 눈썹을 비죽 올렸다. 이상한 곳에서 편협한 아진이 신기했다.

    “내 고추가 떨어지면 좋은 건 너 아니냐?”

    능글맞은 석주의 말에 아진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가 석주의 손목을 낚아채 마당으로 질질 끌어당겼다. 석주는 못 이기는 척 그에게 끌려 나왔다.

    마당을 가로지른 아진이 그늘진 창고 벽으로 석주를 밀어붙였다. 키도 덩치도 한참 모자란 주제에 고개를 한껏 쳐들고 매서운 표정을 짓는 꼴이 자못 깜찍했다.

    팔짱을 낀 석주가 아진을 그윽이 내려다봤다. 제 고추가 떨어졌는지, 붙어 있는지 아진이 확인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진짜 왜 그러세요!”

    아진이 빽 소리를 질렀다. 날카로운 음성에 석주가 턱을 안으로 당겼다가 풀었다.

    “걱정돼서 그러지. 밥을 안 먹으니까.”

    “먹어요. 먹을 거예요. 한 끼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무슨 유난을 이렇게…….”

    아진이 자신의 작은 손바닥에다 얼굴을 푹 파묻으며 끙, 앓았다. 석주가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진의 손을 조심히 떼어 맞잡았다.

    “나는 알아야겠다. 네가 왜 입맛이 없는지.”

    “…….”

    “말해. 얼른.”

    석주가 낮은 목소리로 독촉했다. 아진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허나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에 석주의 손아귀에 조금씩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사실 석주는 아진이 왜 입맛이 없는지 알고 있었다. 꽃님 때문이겠지. 그녀가 병원에 간 이후로 내내 식욕이 없는 아진이니까. 오죽하면 콜라나 초콜릿을 쥐여 줘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하지만 그걸 눈치껏 아는 것과 아진이 직접 말로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석주는 아진이 본인의 입으로 제게 말해 주길 바랐다. 이미 아진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더 가지고 싶었다. 오죽하면 아진보다도 아진을 더 알고 싶을 정도였다.

    한참 우물쭈물하던 아진이 처연한 눈빛으로 석주를 올려다보았다.

    “내일, 내일은 꽃님이 아줌마가 수술하는 날이잖아요…….”

    “응.”

    “아무리 쉬운 수술이라도 생살을 찢었으니 일어나면 엄청 아플 텐데……. 아파서 엉엉 울면 어째요? 달래 줄 사람도 없고……. 물론, 우리 아줌마가 아프다고 울 사람은 아닌데, 병원에 혼자 있으면 외로우니까…… 서럽고 무서워서 울지도 모르잖아요…….”

    “…….”

    “아줌마가…… 보고 싶어요…….”

    마지막 문장에는 물기가 스몄다. 어둠 속에서도 아진의 눈가가 붉어지는 게 보였다.

    석주가 한숨을 내쉬며 아진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들어차는 볼이 전과 달리 홀쭉하고 거칠었다. 한창 잘 먹이고 잘 재울 때는 살이 올라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웠는데. 그게 말도 못 하게 그리웠다.

    아진의 동그스름한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뗀 석주가 그와 지그시 눈을 맞췄다.

    “내일.”

    “…….”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

    그 말에 아진이 헛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 같이요?”

    “응.”

    “종로 병원에요?”

    “응.”

    “아줌마 보러요?”

    “응.”

    석주가 꼬박꼬박 긍정했다. 아진의 낯이 대번에 환하게 폈다. 마치 달덩이가 뜬 것처럼 밝았다. 뒤꿈치를 들썩이고 어깨를 접었다가 펴며 기쁨을 삼키던 아진이 석주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허리를 껴안은 팔이 제법 옴팡졌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사장님…….”

    아진이 석주의 두툼한 가슴팍에 얼굴을 마구 문댔다. 잠깐 굳었던 석주가 미소 지으며 아진을 마주 안았다. 아진의 정수리에 뺨을 묻고, 마른 등허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아진의 청량함에 눈이 절로 감겼다. 제가 안는 아진과, 제게 안겨 오는 아진은 완전히 다르다. 먼저 선뜻 안겨 오는 일이 흔치 않은 터라 지금 이 순간이 몹시 소중했다.

    아진이 석주를 빼꼼 올려다봤다. 앞머리가 옆으로 스르륵 넘어가고, 어느 밤하늘보다도 아름다운 군청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석주가 그 눈을 홀린 듯 응시했다.

    “정말 고마워요, 사장님……. 이 은혜 꼭 갚을게요.”

    아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입가에 휘영청 떠오른 미소가 참 어여뻤다. 석주가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즉 데려다줄걸, 싶기도 하고. 그랬다간 집에 오지 않겠다고 떼를 썼을 것 같아 여태까지 미룬 게 맞다, 싶기도 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다 상념을 털어 냈다. 당장에 아진이 좋으면 된 거지.

    “그래? 어떻게 갚을 건데?”

    석주가 눈썹을 올리며 장난스레 물었다. 음흉한 손은 어느새 아진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이제 엉덩이가 주물러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아진은 자그마한 목젖을 움직이며 음,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눈썹 위로 살짝 파인 홈과 볼록 튀어나온 아랫입술이 매우 사랑스러웠다.

    석주는 즐겁게 아진의 답을 기다렸다. 분명 생각지도 못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항상 그랬으니까. 뭐라고 하든 잘 돌리고 달래서 떡을 치자고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촉.

    뜨끈하고 말랑한 것이 턱 끝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석주가 놀란 기색을 숨김없이 보이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볼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인 아진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고 있었다.

    “이, 이렇게……?”

    쥐꼬리만 한 목소리에 석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놀리는 듯한 반응에 아진이 인상을 쓰며 그의 품에서 떨어지려 했다. 허나 석주가 그를 놓아줄 리 없었다.

    “고작 이걸로? 너 내가 꽃님이 아줌마 병원비로 얼마를 썼는지 아느냐?”

    “……저한테 돈 받고 싶으신 거예요?”

    아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석주가 돈을 바랄 줄이야. 제 이 비루한 몸뚱어리로 종일을 해서 십수만 원을 갚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진의 난색에 석주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말을 잘못했다. 내가 너한테 무슨 돈을 받아. 안 받아. 네가 이 집을 홀라당 태워 먹어도 돈 받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럼…….”

    “뽀뽀는 퉁 치기에 너무 가볍지 않냐는 뜻이었어.”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걸요…….”

    “없긴 왜 없어.”

    “…….”

    “혀 내밀어 봐.”

    석주가 아진의 아랫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눈을 끔뻑이던 아진이 빼꼼 혀를 내밀었다. 통통하고 붉은 혀를 본 석주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아진이 수도 없이 본 눈동자였다. 제 가랑이 사이로 좆을 들이밀 때마다 저런 눈동자였으니까.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