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62화 (6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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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냥, 간병이나……. 어, 아줌마 세수도 시켜 주고, 밥도 먹여 주고…….”

-뒤지라고 고사를 지내라. 사지 멀쩡한데 죽을병 취급해서 보내려고?

“아이, 말을 왜 그렇게 해……. 병원은 안 추워?”

-안 추워. 깡패들이 엄청 좋은 병실 줬다. 아주 넓은데 나 혼자 쓰라더라. 창문도 크고 볕도 잘 들어.

“그래? 다행이네…….”

-그리고 돼야지 같은 깡패 놈들이 나 없는 동안 밥 어찌 먹냐고 난리다, 난리. 이 새끼들이 얼른 나으라고 성화인 게 또 부려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진이 작게 웃었다. 주절주절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조금 없긴 했지만 그래도 아파 보이진 않았다. 아진은 쿵덕쿵덕 뛰던 심장이 한결 수그러드는 걸 느꼈다.

마른 입술을 핥은 아진이 넌지시 물었다. 이번에도 석주의 눈을 피하면서.

“진짜…… 진짜 나 안 가도 되겠어?”

-와서 뭐 하게. 또 땍땍거리고 종알거리기나 하려고.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네 수발들게 생겼냐. 이참에 좀 쉬려는데, 방해하지 마라. 이 넓은 병실에서, 남이 해 주는 밥 먹으면서 영부인처럼 아주 우아-하게 쉴 거다.

꽃님은 그 후에도 이런저런 상황을 말해 주었다. 식단표를 받았는데 고기반찬이 매번 나온다느니, 복도가 조용해서 좋다느니, 창문 밖으로 커다란 나무가 보이는데 고즈넉하다느니, 깡패 놈들이 그래도 의리는 있어서 여기까지 극진히 모셔 줬다느니, 커피도 한 잔 달랬는데 후딱 줘서 마음에 든다느니 하나같이 아진을 달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말들이었다.

아진이 꼬박꼬박 고개를 끄덕이는데, 꽃님이 통화를 끝내려 했다.

-아진아. 나 팔 아프다. 전화기 이것도 엄청 무겁네.

“어어, 알았어. 이따 검사 결과 나오면 또 전화해.”

-보고. 이만 끊자.

“응…….”

-아, 그, 아진아.

“응?”

-바깥에 많이 춥더라. 차도 많고. 그러니까…… 집에 있어라. 집에 꼭 붙어 있어.

그 말을 끝으로 꽃님의 목소리가 끊기고, 명진이 나타났다.

-어, 아진아. 내 명진인데, 석주 형님 바까 봐라.

아진이 수화기를 석주에게 돌려주었다. 석주는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기 전에 아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괜찮으시다지?”

“……네.”

아진이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빙긋 웃은 석주가 명진과 통화를 이어 갔다. 아진이 털레털레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잔뜩 물어뜯어 울퉁불퉁해진 자신의 엄지손톱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당장 집에서 나가자던 꽃님이, 집에 있으라 했다.

이상하게 그 말이 귀에 남았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아진은 일곱 시가 되자마자 부엌에서 빠져나왔다.

“아진아! 바쁜데 어디 가!”

이순이 빽 소리를 지르며 아진을 불렀다.

“꽃님이 아줌마랑 전화하러!”

아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곧장 복도를 가로질러 석주의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담배를 물고 서류를 보던 석주가 피식 웃으며 이리 오라 손짓했다. 아진이 익숙하게 석주의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석주가 가느다란 허리를 안아 고정했다. 그 후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아진의 손에 수화기를 쥐여 주고, 다이얼을 쑥쑥 돌렸다.

아진이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뚜르르, 뚜르르, 가던 신호음이 끊기고 친근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진의 눈썹이 대번에 아치형을 그리며 올라갔다.

“아줌마! 응, 나 아진이. 응. 저녁 먹었어?”

발랄하게 튀는 목소리에 석주가 피식 웃으며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진이 뜨끈뜨끈한 석주의 손바닥에 볼을 묻었다.

아진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병원에 있는 꽃님과 통화했다. 병원 검사 결과, 꽃님의 가슴 속에서 뭐가 발견됐단다. 석주는 병명을 아는 것 같은데, 무엇인지 말해 주진 않았다. 그래도 큰 병은 아니라고 했다. 수술만 하면 뚝딱 나을 수 있다고.

그 소식을 들은 아진은 까무러칠 만큼 놀라서 당장 병원으로 가려 했으나 석주는 물론 꽃님도 말려서 결국 나가지 못했다.

대신 이렇게 매일 그녀와 통화하고 있었다. 석주가 아예 꽃님의 병실에 전화기를 놓아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음이 좀 편했다.

“응. 아, 오늘 조금 바빴어. 명진 형님 생일이래. 알아? 응. 아줌마 없어서 다른 요리는 못 하고, 그냥 다 같이 고기 구워 먹는대. 그래도 미역국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지금 하고 있어. 응. 아니, 방금 끓이기 시작했어. 맞아, 점심때부터 끓였으면 맛있었을 텐데…….”

아진이 종알종알 사사로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간간이 웃기도 하고, 또 된통 잔소리를 듣는지 입술을 삐죽거리기도 했다. 석주는 그런 아진을 품에 앉혀 놓고 서류를 뒤적였다. 이따금 만년필로 무언가를 적기도 했다. 아진의 어깨에 턱을 올려 두고 그의 냄새를 들이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아진은 꽃님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줌마, 내일이 수술인데…… 안 무서워? 아이, 배를 가르는데 어떻게 안 무서워? 마취? 마취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지…….”

내일은 꽃님의 수술 날이다. 수술에는 수십만 원의 돈이 든다고 했다. 그 밖에도 병실에 밥에 약값까지. 큰돈이 필요했다.

다행히 석주가 모든 돈을 대기로 했다. 그가 말하는 ‘내 사람’에, ‘식구’에 꽃님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꽃님의 말로는 내내 병실을 지키는 조직원도 있고, 딱히 안면도 없는데 시시때때로 와서 화투를 치거나, 신문을 읽다 간이침대에 누워 드르렁드르렁 낮잠을 자거나, 국화빵을 한 아름 사 와서 먹는 조직원들도 있댔다. 그놈들 덕에 속이 시끄럽다며 짜증을 내는데, 그 목소리에 묘하게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그 말에 아진은 석주에게 차마 다시 병원에 가고 싶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석주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행여라도. 행여라도 저와 꽃님을 버릴까 봐.

아진이 평생 모아 놓은 돈을 전부 털어도 3만 원이 안 됐다. 석주가 그녀에게서 손을 떼 버리면 답이 없었다. 그러니 석주에게 잘 보여야 했다.

한동안 꽃님과 수다를 떨던 아진이 아쉽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매일 꽃님과 통화를 하는데도 실체 없는 허상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꽃님이 아줌마는 괜찮으시대?”

석주가 아진의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네. 내일 수술이라면서 걱정도 안 되나 봐요. 나는 심장이 벌렁거려서 밥도 안 넘어가는데…….”

아진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석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이가 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초연해진다고 말해 주려다 너무 아저씨 같아 말았다.

그때, 누군가가 똑똑 방문을 두드렸다. 아진이 석주의 다리에서 주르륵 내려와 섰다. 석주가 “들어와.” 하고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오늘 생일인 명진이 씩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형님. 식사 준비 다 됐답니다.”

조직원들이 모인 다실은 왁자지껄했다. 마루에서 굽는 고기 냄새가 밤바람을 타고 잔뜩 밀려들었다. 날씨가 조금만 따뜻했어도 마당에 전을 펼쳤을 텐데, 겨울바람이 보통 따가운 게 아니어서 다실에 자리를 잡게 됐다. 아진이 잠바를 목 끝까지 여몄다. 그 모습에 곁에 서 있던 석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추워?”

“괜찮아요. 식사하세요.”

아진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를 상석으로 밀었다. 입매를 삐뚜름히 당겼다가 놓은 석주가 본인의 자리에 앉았다. 다시 한번 괜찮다는 뜻으로 그에게 빙긋 웃어 준 아진은 종들이 반찬을 나르는 것을 도왔다.

꽃님이 있었다면 육전에 불고기에 거나한 상이 차려졌겠지만, 그녀만큼 음식 솜씨가 좋은 이도, 그녀만큼 손이 빠른 이도 없어 오늘 상은 소박했다. 파무침과 양파 절임, 두부와 호박을 잔뜩 넣고 고춧가루를 솔솔 뿌려 완성한 된장찌개 등이었다.

조직원들은 그것도 좋은지 만면에 웃음을 잔뜩 띠고 있었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고기가 상 위로 올라왔을 땐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석주가 탁탁탁, 상을 두드렸다. 그리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조직원들이 입을 딱 다물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꽃님이 봤다면 누가 깡패들 아니랄까 봐 별 지랄을 다 한다고 했을 모습이었다.

“다들 알겠지만, 오늘은 명진이 생일이다. 항상 식구를 위해 애쓰는데 오늘은 다 내려놓고 즐기길 바란다. 생일 축하한다, 명진아.”

석주가 지척에 앉아 있던 명진의 뒤통수를 크게 쓰다듬었다. 명진이 쓸데없이 수줍게 웃었다. 석주가 상 아래에 두었던 검은색 상자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생일 선물.”

명진이 눈을 크게 뜨며 턱 아래를 벅벅 긁었다.

“아이고, 형님……. 우리가 한두 해 보는 것도 아니고 선물은 무슨 선물입니까.”

그러면서도 손은 상자를 향했다. 상자 안에는 번쩍이는 금색 시계가 들어 있었다. 꼬부랑글씨가 쓰인 제품 보증서도 있었다. 곁에 있던 조직원들이 딱 보기에도 비싼 거라며, 미제라며, 윤기가 난다며, 한마디씩 얹었다. 멀찌감치 있던 조직원도 시계를 구경하러 우글우글 모였다. 명진이 자랑하듯 시계를 들어 보였다.

석주는 상 위에 턱을 괴고 흐뭇한 낯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그러다 사그라질 기미가 없는 방정에 슬쩍 입을 뗐다.

“그만. 고기 식겠다.”

그 말에 조직원들이 얼른 자리로 돌아갔다. 석주가 술잔을 들었다. 조직원들이 그를 따라 술잔을 들었다. 석주가 명진을 보며 말했다.

“명진이 한마디 해라.”

“아……. 예. 어……. 우리 식구들. 어, 억수로 사랑합니다.”

명진이 어깨를 들썩이며 큭큭 웃었다. 그의 광대가 은근히 붉어졌다. 멀찌감치서 상황을 보던 아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언젠가 석주가 명진을 보고 귀엽다고 한 적이 있는데, 어쩌다 저 우락부락한 사내를 그렇게 묘사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명진의 말을 끝으로 조직원들이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명진을 향해 한두 마디씩 던졌다.

“저도 사랑합니다, 형님!”

“축하드립니다, 형님!”

“귀빠진 날 축하합니다, 명진이 형님!”

“아따, 명진이 형님 대가리가 이따시만 해가 어머님 고생깨나 하셨겠지 말입니다.”

“지랄! 니 대가리는 작나!”

조직원들이 낄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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