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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됐다. 겨울이 가까워지는 게 완연히 느껴졌고, 태회파는 큰 거래처 하나를 잃은 것이 무색하게 더욱 바빠졌다.
명진에게 듣기로는 원래 이맘때 약이 많이 팔린단다. 아무리 산업화가 됐다지만 아직 농부들이 많고, 가을 수확이 끝나면 무료해져서 약에 손을 많이 댄다고 했다.
태회파는 일이 바빠졌음에도 일주일에 하루는 반드시 쉬었다. 조직원들은 집 여기저기에 늘어져서 담배를 뻑뻑 피우거나,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낮잠을 자거나, 마당에서 공을 차며 놀거나, 푼돈을 걸고 화투를 치거나, 춥지도 않은 지 상박을 다 드러내 놓고 운동을 했다.
그럼 종들이 바빠졌다. 그들이 내놓은 빨랫감도 처리해야 했고, 아침, 점심, 저녁은 물론 간식이나 야식까지 해다 바쳐야 했으며 그 밖에도 자잘한 시중을 들어야 해서 정신없이 바빴다.
아진은 다른 일로 바빴다. 석주에게 잡혀 엉덩이를 주물러지고, 입술을 빨리느라 바빴다. 그러다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그의 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절뚝절뚝 바쁘게 부엌으로 향했다. 일손이 부족할 게 분명해서.
도착한 부엌은 예상했듯 난장판이었다. 솥 네 개가 동시에 끓어서 후끈한 습기가 확 와 닿았다. 아진이 느리게 계단을 내려갔다. 절름발이가 된 지 십수 년인데,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아직도 힘겨웠다.
부엌으로 내려온 아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꽃님을 찾는 거였다. 허나 어째서인지 펑퍼짐한 엉덩이가 보이질 않았다. 아진이 마늘을 빻는 이순에게 꽃님의 행방을 물었다.
“누나. 꽃님이 아줌마는?”
“바깥 솥에 있을걸?”
그 말에 아진이 부엌을 가로질러 마당으로 나갔다. 후끈한 부엌과 달리 서늘한 바깥바람이 느껴졌다. 코끝을 스치는 찬 냄새에 아진이 괜히 코를 훌쩍였다. 그리고 꽃님을 찾아 고개를 돌리는데. 창고 옆 가마솥 곁에 있는 그녀가 보였다. 헌데 그녀의 곁에 낯익은 사내가 서 있었다.
“…….”
진걸이었다.
진걸은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삐딱하게 서서 꽃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일주일 전, 중호파의 건물을 홀라당 태우고 온 진걸은 아직도 이 집에 있었다. 조직원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데다가 매주 대청마루에서 있는 식구 회의에도 끼지 못하는데 꾸역꾸역 붙어 있는 중이었다.
아진은 그 꼴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듯한데, 가만히 내버려 두는 석주도 싫었다. 근데 이제는 꽃님에게까지 접근하다니! 안 될 말이었다.
눈을 부릅뜬 아진이 벽에 세워져 있던 큼지막한 나무 주걱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마구 흔들며 절뚝절뚝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너 뭐야!”
아진의 기척에 진걸과 꽃님이 고개를 돌렸다. 작은 체구로, 불편한 다리로 겁도 없이 다가오는 아진에 진걸의 입술이 삐뚜름히 뒤틀렸다. 그러든 말든 아진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어 꽃님을 떡 가리고 섰다.
“뭔데! 우리 아줌마한테 왜 그래!”
“내가 뭐 했냐? 아줌마. 내가 아줌마 팼어요?”
진걸이 쯧, 혀를 차며 물었다.
“…….”
꽃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턱을 살짝 아래로 내리고 아진과 진걸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진이 몸을 움직여 진걸의 시선을 차단했다. 그리고 주걱을 진걸의 턱주가리를 향해 들이밀었다.
“아줌마랑 말하지 마!”
“하…….”
“저리 꺼져! 안 그럼, 안 그럼…… 사장님한테 이른다!”
언급된 석주에 진걸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그가 위협적으로 아진을 향해 한 발 다가왔다. 아진이 든 주걱이 그의 목젖에 쿡 닿았지만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병신 새끼가…….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게 꼴값은…….”
오랜만에 듣는 병신 타령에 아진의 눈매가 사납게 추켜 올라갔다. 예전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어서, 때로는 이름 대신 불려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몹시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아진이 주걱으로 진걸의 목젖을 꾸욱 눌렀다.
“나 병신 아니거든!”
“다리가 그 꼴이면 병신이지, 이 병신아.”
“씨발……. 네 동생, 어, 진수 새끼만 아니었어도 내 다리가 이 꼴이 되진 않았어!”
아진이 주걱으로 진걸의 턱을 올려쳤다. 뻑, 소리와 함께 진걸의 턱이 위로 쳐들렸다. 진걸의 이마에 핏줄이 불룩 올라왔다.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씨발놈아. 뒤질래? 그때처럼 또 처맞고 싶어? 맞는 게 좋지, 아주? 나머지 다리도 뭉개 줄까?”
진걸이 큼지막한 주먹을 흔들며 속삭였다. 행여 남이 들을까 목소리를 죽이는 모양새에 아진의 입매가 되레 위로 솟구쳤다.
이전이라면 냅다 얼굴을 후려갈겼을 텐데. 못 하겠는 거지. 제 뒤에 석주가 있으니까. 저는 석주에게 특별한 사람이니까. 저를 건드렸다간 석주가 분기탱천할 테니까.
아진이 주걱으로 쿡쿡 진걸을 찌르며 이죽거렸다.
“해 봐. 해 보라고. 사장님이 널 가만둘 것 같아?”
진걸이 뿌드득 어금니를 갈았다. 그가 주걱을 앗아 들었다. 거친 힘에 아진은 속절없이 주걱을 내주고야 말았다. 진걸이 그것을 바닥에 내리꽂듯 던졌다. 그리고 아진을 씹어 죽일 듯 노려봤다.
아진이 흠칫 어깨를 떨며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코앞까지 다가온 폭력의 기미에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허나 진걸은 끝내 아진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편 그가 홱 뒤를 돌았다.
“……어차피 곧 뒤질 새끼.”
들릴 듯 말 듯 한 음성으로 중얼거린 진걸이 성큼성큼 멀어졌다. 아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곧 뒤질 새끼라니. 재수 없게…….
아진이 멀찌감치 나동그라진 주걱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내내 침묵하고 있던 꽃님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줌마 왜 쟤랑 붙어 있어! 쟤가 뭐라고 했어? 어?”
“지나가는 걸 내가 불러 세웠어.”
“뭐? ……왜?”
아진이 주걱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주걱 끝이 단단한 흙바닥에 파묻혔다.
“할 말이 있으니까 불렀지.”
꽃님이 연기가 폴폴 올라오는 가마솥 안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고추장 양념 된 돼지고기가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익어 가고 있었다. 꽃님이 집게로 고기를 뒤적거렸다.
아진이 그런 꽃님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할 말이 뭔데.”
“별거 아니야.”
“아, 뭐냐고. 뭔데. 뭐야?”
“아우, 진짜. 땍땍거리지 좀 말어.”
“말해 줘! 어? 뭔데-에-.”
“그냥 집에서 나가라고 했어!”
“뭐?”
“진걸이 저놈 여기 계속 있으면 필히 뒈질 팔자야. 그래서 나가라고 했다.”
“……진걸이 새끼 걱정하는 거야? 아줌마 진걸이 새끼 좋아해? 나보다 더?”
“미친놈. 지랄 똥을 싸라. 내가 뭐 하러 그 새끼를 걱정해? 혼자 뒈질 놈이 아니어서, 저승으로 가면서 꼭 누구 하나는 끌고 갈 놈이라서 나가라고 한 거다.”
“…….”
예상치 못한 답에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좌우로 불안하게 흔들렸다. 죽음, 저승. 그런 건 아진에게 너무나 버거운 주제였다.
아진이 주걱을 대충 아궁이 귀퉁이에 세워 두었다. 그러고는 빽 고함을 질렀다.
“저놈이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그렇게 막 하고 그래!”
“해코지를 어떻게 하냐. 사방에 깡패들이 득실거리는데.”
“그래도-”
“이 육시랄!”
꽃님이 별안간 집게를 내던졌다. 철제 집게가 까강, 소리를 내며 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꽃님이 주름진 눈을 부라리며 아진을 윽박질렀다.
“네가, 어? 아진이 네가 뒤질 것 같아서, 어? 그래서 그랬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놀란 아진이 움찔 어깨를 떠는데. 꽃님이 그의 손목을 잡고 자신 쪽으로 바짝 당겼다. 아진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려 손목을 뒤틀었다. 허나 꽃님의 힘은 기형적일 정도로 셌다.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악력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아, 아줌마. 이거 놔…….”
아진은 덜컥 겁이 났다. 그러든 말든 꽃님은 얼굴을 들이밀며 아진을 독촉했다.
“너. 내가 같이 나가자고 하면 이 집에서 나갈 거라고 했지?”
“어?”
“나가자. 오늘이든, 내일이든. 당장 나가자. 사장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괜히 가서 얼굴 비추지 말고.”
“왜, 왜. 갑자기 왜 그래.”
“캐묻지 말고 가서 짐이나 싸.”
꽃님이 아진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재촉하듯 그의 어깨를 떠밀었다.
아진이 눈을 끔뻑였다. 순식간에 휘몰아친 상황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꽃님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제가 어째서 진걸의 죽음과 그의 저승길에 함께 거론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짜증만 났다.
아진이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었다가 열었다.
“……나가기 싫어.”
“저번엔 나간다며. 나갈 수 있다며.”
“그건, 그때고……. 지금은 나가기 싫어.”
아진이 고개를 수그렸다. 나가고 싶지 않다. 지금이 얼마나 좋은데. 제 이 비루한 삶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나날인데.
겨울에도 춥지 않고, 다른 사람은 다 일할 때 누워서 뒹굴고, 맛있는 것도 먹고, 글공부까지 하는 이 태평한 순간이 언제 또 있을 줄 알고 여기서 나간단 말인가. 다리 병신의 삶에 이런 행운이 다시 올 리 없었다.
“싫어, 정말…….”
아진이 고개를 내젓자 꽃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진!”
그에 아진이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 여기로 데리고 온 건 아줌마잖아. 그때, 도박장에서. 내가 잡일 잘한다고 끌고 왔잖아! 근데 인제 와서 왜 그래!”
“그땐 몰랐으니까! 사장이랑 진걸이 놈이 네 명줄을 갉아 먹을 줄 몰랐으니까!”
꽃님이 쾅쾅 발을 굴렀다. 분이 터진다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치기도 했다. 격정적인 반응에 겁먹은 아진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가 경련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줌마가 잘못 본 거야. 신기, 그거 원래 때마다 시마다 다른 거잖아. 내일은 또 다를 줄 어찌 알아? 괜히 나갔다가 차에 치이기라도 하면-”
“이 등신 새끼가! 당장 가서 짐 안 싸!”
“아, 싫다니까!”
아진이 뒤를 돌아 도망쳤다. 절뚝절뚝 우스꽝스럽게 달리며 꽃님의 반경에서 벗어나려 했다. 꽃님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휑- 하고 서늘하면서도 힘찬 바람이 불었다.
“아진아, 너- 어흑…….”
꽃님의 복슬복슬한 머리칼이 대차게 휘날린다 싶더니 그녀가 자신의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느리게, 매우 천천히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뚝 끊긴 꽃님의 목소리에 아진이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그러다 우뚝 발을 멈췄다.
“……아줌마?”
바닥에 쓰러진 꽃님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솥에서 올라온 새까만 연기가 뭉게뭉게 퍼져 나가더니 이내 꽃님을 가렸다.
고기가 타는 모양이었다.